[Review] 야망보다 욕망, 체면보다 쾌락 - 도서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

“난 그저 야한 이야기를 쓰는 늙은 남자일 뿐이다.”
글 입력 2020.11.1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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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붉은 표지 위로 담배를 문 늙은이의 얼굴이 보인다. 술에 벌겋게 취해 있는 듯한 모습이다. 찰스 부코스키의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은 제목과 표지가 한눈에 말해주듯 술, 담배, 살인, 섹스, 도박 등의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풀어낸다.

 

찰스 부코스키는 1920년 독일 안더나흐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미국으로 간 뒤 로스엔젤레스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는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독학으로 작가 훈련을 했다. 그 이후 창고와 공장을 다니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다 우연히 우체국에 취업해 12년 간 일하며 시를 쓴다.

 

그리고 잦은 결근과 지각으로 해고당하기 직전, 존 브라이언이 창간한 지하신문 <오픈 시티>에서 매달 100달러를 받고 칼럼을 연재할 것을 제안 받는다. 이 책은 바로 그 <오픈 시티>에 실렸던 칼럼을 추려낸 것이다.

 

존 브라이언은 부코스키가 무슨 내용을 쓰던지 신경도 쓰지 않고 그가 원고를 넘기면 바로 신문에 실었다. 그 덕에 부코스키는 어떠한 부담감도 없이 맥주를 마시며 글이 나오는 대로 썼다. 여과 없이 적어 내려간 그의 글은 정말 말 그대로 ‘음탕’했다.

 

 

 

낯설고 불쾌한 묘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위가 높다는 것을 알고 책을 펼쳤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책은 “어떤 빌어먹을 놈은”으로 시작된다. 빌어먹을 같은 단어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어지는 칼럼들엔 살인, 섹스, 똥, 자살 등 사회에서 터부시되는 단어들로 가득하다. 체면 따위는 눈 크게 뜨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글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보편적이지 않은 인생을 산다. 7달러가 든 지갑때문에 살인을 하거나, 일주일에 1달러 조금 넘는 방세를 내고 다 허물어진 헛간 같은 곳에서 지내며 추위에 떨고 집주인의 문전박대를 받는다. 창녀와 섹스하는 이야긴 수도 없이 나온다.

 

그들은 야망보다 욕망, 체면보다 쾌락을 추구한다. 인생의 목표가 단순해지니 삶 역시 단순해진다. 불쌍하고 더럽고 안타까운 삶을 산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쾌락과 욕망만 채워진다면 상관없다.일은 구하면 그만이고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떠돈다.

 

보통의 삶과는, 적어도 내 삶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이야기들이라 낯설고 불쾌한 감정이 가득한 채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럼에도 읽는 것을 그만두지 않은 것은 어이없이 피식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그의 유머와 통찰력 있는 문장들 덕분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처럼 말이다.

 

 

“아무튼 행동하지 않는 지식은 무식한 것보다 끔찍하다는 속담을 알고 있다(넝마를 걸치고 돌아다니며 내가 지어낸 말이다). 몰라서 감으로 골랐다가 맞지 않는다면 ‘젠장, 하느님은 내 편이 아니구나.’ 하면 된다. 하지만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으면 마음속에 걸어 다닐 다락과 어두운 복도가 있는 것과 같다. 그건 좋지 못해 불편한 저녁으로 이어지고, 결국 술을 진탕 마시고 마음이 사정없이 찢어진다."

 

p. 58-59

 

 

“몇 년 전에는 일주일 내내 술에 취했다 깨고 나서 자살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 …(중략)… 이어서 헤드라인을 보았다. 밀튼 버얼의 사촌이 떨어지는 바위에 머리 부상을 당하다. 신문 헤드라인을 저따위로 쓰는데 사람이 어떻게 자살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신문을 훔쳐 들고 집으로 왔다."

 

p. 139

 


 

부코스키는 왜 이런 글을 쓰게 됐을까


 

 

“이상하게도 기억을 떠올려 보면 난 냉동인간 상태로 태어났다. 또 하나 기억나는 일은 우리 아버지, 비겁하게 사악하고 잔인한 인간이 욕실에서 긴 가죽끈, 채찍 뭐 그런 걸로 날 때린 것이다. …(중략)… 난 울고 싶지 않았다. 잔디를 깎는 것처럼 우는 건 더러운 일이다. …(중략)… “여보, 여보, 이 아이가 미친 것 같아. 내가 매질을 하는데도 울지 않아!”. “그 애가 미친 것 같아요?” “맞아, 여보.” “아, 참 안타깝네요!” 그것이 냉동소년을 처음 알아볼 수 있는 상태였다.”

 

p. 279-281

 

 

발췌한 내용은 책의 말미에 실린 헨리 치나스키 이야기의 일부다.

 

그가 이런 글을 썼던 건 그의 가정사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맞으며 자랐다. 이 냉동인간 이야기가 그의 어릴 적 경험을 그대로 묘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냉동인간 이야기의 주인공 헨리는 부코스키의 다른 작품 <우체국>, <호밀빵 햄 샌드위치>, <여자들> 등의 작품에서도 작가의 페르소나로 계속해서 등장한다.

 

고난과 역경이 예술의 재료가 된다. ‘예술가는 가난해야 한다’는 명제를 뒷받침하는 것 같아 좋아하지 않는 말이지만 부코스키의 삶을 보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부코스키도 아버지의 폭력이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없었다면 평생 무려 60여권의 책들을 써 내려갈 수 있었을까.

 

*

 

책을 읽는 내내 배설과 쾌락 같은 인간의 본능을 다룬 것에 대한 불쾌함이 있었다. 우리가 굳이 마주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동물적인 면모를 직시하게 만드니까. 게다가 나는 여성으로서 여성을 머리 빈 섹스도구로 자주 묘사하는 그의 글이 읽기 힘들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를 추종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여과 없이 솔직한 문체와 그 안에 담긴 냉철한 비판 의식을 그 누구의 작품에서 읽어낼 수 있을까. 감성과 아름다움, 체면 같은 건 다 던져버리고 우리 내면에 자리한 욕망과 쾌락을 마주하게 하는 이 책을 쉽게 잊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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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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