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유리알과 나무의 혁명 - 허공에의 질주 [영화]

영화 허공에의 질주를 본 후
글 입력 2020.11.15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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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읽은 한 별종의 이야기에 마음이 홀렸다. 지리산에 방생 된 반달가슴곰들 중 한 마리인 KM-53은 조금 유별났다. 나머지 곰들의 활동반경은 자신의 구역에서 15km 내외이다.

 

그러나 KM-53은 끊임없이 지리산에서 탈출했다. 잡혀서 다시 지리산으로 운반되어도, 차에 치여 큰 부상을 입어도, 그는 쉬지 않고 80km나 떨어진 수도산을 향해 달렸다. 무엇인가 그를 끌어당기듯, 그의 마음은 바람처럼 수도산을 향해 불었다.

 

결국 KM-53은 수도산으로 옮겨졌다. 그가 늘 원해왔듯이. 그러나 가장 최근의 기사에서 다시 접한 그의 소식에 나는 마음을 놓았다. 그는 또 다시 영동으로, 금오산으로, 떠돌고 있었다. KM-53은 수도산에 이끌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별종이 아니다. 그는 방랑자다.

 

영화 <허공에의 질주(Running On Empty, 1988)>는 특이한 가족의 사연으로 시작된다. 반전 시위를 위해 군사 실험실을 폭파시키다 실수로 경비원의 눈을 멀게 한 아더와 애니는 15년간 FBI를 피해 도피 생활을 해왔다.

 

수상한 낌새가 느껴질 때마다 두 아들들과 함께 이름은 물론 머리 색부터 눈동자 색깔까지 바꾸며 이사를 다니던 그들은 또 다시 새로운 마을에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첫째 대니는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을 명확히 깨달으며 설상가상 음악 선생님의 딸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던 중 또 다시 거처를 옮겨야 할 상황이 다가오며 대니의 갈등이 시작된다.

 

영화는 대니를 중점으로 흘러간다. 자아와 현실의 간극 사이에서 느끼는 아픔은 그 한숨에서조차 푸릇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대니가 아닌, 아더와 애니 부부의 이야기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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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성장의 경계는 늘 청춘의 그것으로 치부된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마음은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젊음의 나아감이란 인생의 모든 것이 처음임을 뜻한다. 처음이기에, 경험하지 못했기에 느껴지는 서툶은 너무나도 당연하며 응원 받는다.

 

늘 부모님을 따라 도망 다녔던 대니의 성장은 마치 유리알 같다. 너무나 투명하고 소중하며 저절로 반짝인다. 얇고 흰 피부에 어른거리는 붉은 기운은 사랑을 감추지 못하며 안경 사이로 반짝이는 눈은 윤슬처럼 정직하다. 이 일렁이는 푸른 봄은 유약하고도 간절한 훈풍을 몰고 온다.

 

그러나 마음 구석까지 가득 채워지는 유리알은 금방 탁해진다. 적어도 세상의 기준에서는 그렇다. 짧은 적응이 지나간 후 이미 유희거리는 사라져 있다. 그 자리는 이미 묵직한 덩이의 ‘때’들 만이 자리하고 있다. ‘때’가 지난, ‘때’를 놓친, ‘때’가 그리운, 덩이들.

 

딱 한번 주어지는 유리알을 놓쳐 깨트려버려 빛나지도 돌아가지도 못하는 그런 덩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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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음악 선생님은 대니에게 마돈나와 베토벤의 차이를 묻는다. 베토벤 음악에 맞춰 춤출 순 없다고 그는 답한다. 마돈나의 음악은 멜로디만 달라질 뿐 박자는 같다. 그러나 베토벤의 사중주곡은 멜로디와 박자 모두 계속해서 바뀐다. 모든 것이 마돈나의 음악과 같았다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지루하겠지만 결국은 편안할까? 그러나 인생은 결국 마돈나가 아니라 베토벤이다. 결코 익숙해지지도 적응할 수도 없는 음악에 우리는 살고 있다. 베토벤에도 춤을 출 수 있다. 단지 우스꽝스러울 뿐.

 

투명함은 필연적으로 우스꽝스러울 수 밖에 없다. 바닥까지 보인다는 것은 숨길 수 없다는 것이다. 숨길 수 없음에는 웃음거리가 될 운명을 예견함이 있다. 유리알은 그렇게 모두 숨길 수 없어 우습다. 너무 우스워서 뭐가 우스운지도 모르는 것 또한 우습다. 그러나 이 지구의 어항 속을 헤엄치는 이 금붕어들은 그 우스움을 잊고 만다. 투명함이 탁해지고 더 이상 안을 볼 수 없는, ‘때’가 지난 때가 오면.

 

나 홀로 우스워진다는 것은 오싹한 일이다. 그렇게 우리들은 점점 춤을 추지 않게 된다. 모두 점잖은 이들 사이로 베토벤에 맞춰 우스울 게 자명한 춤을 출 수는 없다. 눈물이 날 정도로 우스워져야 비로소 자랄 수 있다는데 모두 발 밑으로 소심한 탭 댄스만 굴리고 있을 뿐이다. ‘때’라는 건 사실 없는지도 모르고, ‘때’를 놓친 줄만 알면서, 소심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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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의 부모인 아더와 애니 또한 한 때는 그들만의 유리알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그로 인해 각자의 부모님과는 평생을 거의 만나지도 못하고 아이들과는 도망 다니는 신세이지만, 그들은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노력을 해왔고 또 계속 하고 있다.

 

아더와 애니는 가족을 위해서 살아간다. 앞으로의 남은 인생에는 도망만이 가득함이 확실하지만 아이들만은 지키며 함께 하려 한다. 저돌적이며 혁명의 불꽃을 품고 있는 부부이면서도, 그들 또한 지나간 유리알을 뒤로 한 채 현실의 상황을 움켜쥐고만 있다.

 

과거의 동료가 찾아와 좋지 못한 제안을 건네자 애니는 ‘넌 46살 먹은 어린애야’라고 말한다. 혁명가가 된다는 것은 총으로 놀거나 혼자 재미 보는 것이 아닌 연민과 절제력이 필요하다며 말이다.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때를 맞추는 것은 혁명가의 자세가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의 방향은 그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죄의 값을 치뤄야 한다는 것, 부모님을 만나 눈시울을 붉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아들을 홀로 서게 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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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들은 대니에게 떠날 것을 말한다. 꿈과 가족 사이에서 방황하는 대니를 굳세게 떠밀어 준다. 대니의 유리알이 더욱 반짝일 수 있도록 한 낮의 햇빛 아래로 굴려 보낸다.

 

비록 부부는 또 다시 도망치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이제는 더 이상 구슬처럼 앞으로 굴러나갈 수는 없지만, 나무처럼 뿌리 깊이 자리잡은 그들은 마음의 나이테를 또 다시 한 겹 쌓아 올린다.

 

아더와 애니, 그리고 지리산의 방랑곰 KM-53. 그들은 베토벤의 맞추어 서툰 춤을 추는 인생의 광대이자 진정한 혁명가였다. 멈추었다 생각했을 때 한번 더 자라나는, 청춘의 전유물을 빼앗아온 감미로운 혁명자들. 나는 오늘도 그들을 떠올린다. 어디선가 지금도 아름답게 혁명을 일으키고 있을 그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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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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