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겨울을 닮은 책들 [도서]

글 입력 2020.11.15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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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미뤄져서 그런지, 지난해 11월에 비해 날씨가 따뜻한 것 같다. 그런데도 세탁소에 맡겨 두었던 코트며 각종 겉옷들도 꺼내왔고, 작년에 쓰고 남은 핫팩들을 선반에 올려뒀다. 뿌듯한 얼굴로 그것들을 바라보며 이 주를 지냈는데, 아직 모기가 있는 걸 보아하니 입김이 나오려면 멀었다. 여태 그랬듯 겨울은 예고 없이 찾아올 건가 보다.


나는 계절에 따른 변화들을 즐긴다. 날이 바뀔 때마다 향수는 물론이고 이불, 커튼의 색, 잠옷을 바꾸어 넣으며 준비를 한다. 여름밤과 겨울 새벽을 기다리며 주위 물건들을 바꾸는 것은 꽤 설레는 일이다.

 

또, 계절의 책이 있다. 늦봄엔 뿌옇고 안개 같은 책, 초여름엔 푸릇한 책, 장마엔 눅눅하고 끈적하며 여운이 긴 책, 가을엔 가벼운 시집을 읽는다. 이제 겨울이 왔으니 침대맡에 귤을 두어 개 준비해두고, 포근한 극세사 이불을 깔아뒀다. 그것들을 주위에 둔 채 졸린 눈을 비비며 읽는 나의 겨울 책들을 조심스레 적어내린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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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의 집을 떠나며 쓰네오가 한발 늦게 오열하는 장면이 그토록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이것이 죄지은 자의 참회의 눈물이 아니라, 실패한 자의 통한의 눈물이기 때문이다. 죄가 아닌 실패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조제가 쓰네오를 비난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를 비난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녀는 비난하지 않는다."

 


불쑥 나에게 가까워진 한 친구가 있다. 우린 두 번째 만남부터 함께 여행했다. 파리의 밤거리를 걸었고, 한 해의 마지막과 시작을 함께했다. 우린 밤마다 나란히 누워 이런저런 얘기들로 꿈인 듯 현실인 듯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 애는 나보다 사랑을 잘 알았다. 사랑을 바라보는 망원경 배율이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애가 한참 이야기를 하면,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이불을 쥐어 부스럭거렸다. 그 애의 ‘너는?’이라는 말에 늘 ‘잘 모르겠어.’라고 대꾸했다. 사랑은 나에게 너무 어려웠고, 멀었다. 그게 어찌나 대단한 일인지 겪어 보고 싶지도 않았다. 내 인생을 통째로 흔드는 무언가가 나타난다는 사실이 두려웠기 때문에.

 

초여름 생일, 그 친구에게 이 책을 선물로 받았다. 다양한 영화들을 토대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사랑엔 낯을 가리지만 그에 대한 영화나 음악은 좋아했다. 이 책을 읽어내며, 무어라 정의할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한 의문점이 조금씩 해소되었다. 시력이 나빠 흐리게만 보이던 시야에 안경을 하나 씌운 기분이었다.

 

첫 애인과 헤어진 대학 동기가 이 주 내내 컵라면과 소주로 밤을 지새웠다는 소식에도 비웃지 않았다. 사랑뿐만은 아니었다. 이 안에선 욕망과 윤리, 사회부터 개인까지 다룰 수 있다. 이 책을 펼쳐드는 순간  아주 동경하는 큰 어른과 밤새도록 영화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초여름에 받은 책이 왜 겨울의 책인가에 대한 답엔 이런 변명을 댈 수 있을 것 같다. 바깥엔 눈이 내리고, 각자 수면양말을 하나씩 신은 어른 예술인과 어린 예술인이 다 식은 어묵탕에 소주를 마시며 영화를 말하는 듯해서. 그래서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나의 겨울 책이 되었다.

 

 

 

불온한 검은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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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오늘도

꿈이 피를 말린다.

그 꿈이 나한테 이럴 수가.

 

- 목요일 중

 

 

불행에 대해 말하는 계절마다의 책이 있다. 여름엔 김애란 작가의 <비행운>을 읽고, 가을엔 심보선 시인의 <오늘은 잘 모르겠어>, 한강 작가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읽는다.

 

불온한 검은 피는 그중에서도 가장 날카롭고, 가장 시리다. 표지조차 겨울에 내리는 부슬비 같다. 눈이 채 되지 못한, 그럼에도 땅바닥에 내려와 얼어붙으면 꼭 서너 명은 넘어지게 만드는 빗방울. 하지만 이 시집 속 주인공들은 누군가를 탓하지 않는다. ‘아빠 때문에 우리 집이 가난해’ ‘이 나라 때문에 직업을 잃었어’ ‘당신은 나를 왜 사랑하지 않아’라는 원망 없이, 자신이 가진 불행들을 온몸으로 감싸 안는다.

 

장면과 순간, 우리가 느끼는 쓴맛 사이사이 벌이라도 내리듯 쏟아지는 단 것들이 그래도 그들을 살아가게 한다. 인간의 배신은 인간에게 치유되고,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떠안고 사랑을 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처절한 상황들 속에서 나는 안도를 느낀다. 늪을 눈앞에 두고 손만 담갔다가 빼길 반복하는 야비함일까? 타인의 불행을 위로 삼는 비윤리적인 감정일까? 둘 다 아니라는 (아니고 싶다는) 결론을 내 본다.

 

이 시집엔 지금은 옛것이 되어버린 나의 불행이 있다. 그래서 지금의 불행도 언젠가 지나갈 수 있으려니, 순간의 포착이 이렇게 아팠던 거라니 추억하며 과거의 나를 위로하고 먼 미래의 나를 응원한다. 그런 용기가 생긴다.


 

 

어떤 이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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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 후문 쪽의 매실나무를 같이 본 게 누구였는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어쩐지 너였던 것 같아. 그 나무를 닮은 나무를 오늘 봤어. 그게 네가 아니라고 해도 감나무는 기억하지? 그건 기억 못할 리가 없지. ... 그래도 우리가 가끔 만나 옛 이야기를 할 땐, 그때처럼 웃는 일도 생기는 것 같아. 언젠가 마당을 갖게 된다면 감나무를 심을 게. 서리하러 와줘. 땡감은 잘 숨겨둬야지."

 

 

첫 장기 여행 직전이었다. 가벼운 책을 하나 읽고 싶었다. 되도록 그림이나 사진이 많았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만화책은 또 끌리지 않았다. 서점을 한참 기웃거리다 책 제목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냅다 계산대에 가져갔다.

 

긴 비행시간을 이 책과 함께 보냈다. 작가는 여행을 다니며 생각나는 특정 인물들에게 편지를 쓴다. 순간의 기록을 정갈하게 담아둔 모양새라, 장면을 상상할 필요가 없어 아주 친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물처럼 담긴 엽서들을 들춰보며 곧 도착할 유럽 여행의 기대를 키웠고, ‘나도 이렇게 편지를 써야지!’ 하고 다짐했다.

 

예상과 다르게 조금은 처참한 모양새의 편지 모음이 완성되었다. 한 도시를 중심으로 한 ‘한 달 살기’는 생각보다 느슨했고, 그 점이 나를 옭매었다. 할 일이 없어지니 불안해져 없는 과제를 만들어내 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가족들이 바쁘게 살아가는 소식을 들으면 조급함은 더 심해졌다.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이 여행이 왜 고달픈지에 대해 다섯 페이지를 적어내렸다. ‘이게 강박인가? ㅇㅇ아,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 나겠지?’ 그리움을 말하다 탓할 상대를 찾아내는 글들이 반복되었다.

 

여행을 떠날 때 반쯤 읽었던 책은 돌아올 때 나머지 반을 해치웠다. 또, 여행 내내 적었던 누군가를 향한 편지들을 살펴봤다. 처참했지만 그간의 고군분투가 담겨 있었고, 한국에 도착해서는 ‘그래도 또 가야겠다!’라고 말했다. 그때 이 책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편지를 쓰지 않았겠지. 불안한 마음을 풀 곳이 없어 함께 여행을 떠난 친구와 크게 다퉜을 수도 있겠다.

 

하필 그 여행은 겨울이었다. 꽃봉오리가 막 돋아날 즘에 한국으로 돌아왔으니. 이 책을 매해 읽으면 읽을수록, 즐기지 못했던 그때의 나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내려놓는 방법, 쉬는 방법. 겨울이 되면 일주일 정도는 동면 모드에 들어갈 수 있는 마음의 여유.

 

*

 

새로운 겨울 책을 알고 싶다. 매년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워져도 좋고, ‘역시 이거지!’하며 일방적인 호감을 차곡차곡 쌓게 되어도 좋다. 또,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을 계절과 글자의 관계성을 훔쳐보고 싶다. 만일 나를 아는 누군가가, 혹은 나를 알게 될 누군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나는 요즘 날씨엔 이런 걸 읽어.’하며 본인 이름 석 자가 새겨진 책을 보여 줬으면 하는 소망이 인다. 

 




[이민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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