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는 온전한 사람일까?, 연극 '반쪼가리 자작' [공연예술]

글 입력 2020.11.13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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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오르기 5분 전.


이미 광대들의 막은 올라있다. 객석의 빈자리가 차츰 채워질 때쯤 허름한 옷을 입은 광대들이 등장한다. 유랑극단의 천막 같기도 하고 전쟁터의 막사 같기도 한 남루한 무대.

 

광대들은 서커스의 흥겨운 노래를 벗 삼아 공연을 준비하다, 꽉 찬 객석을 발견하고 쭈뼛쭈뼛 다가온다. 수줍은 미소와 함께 손을 쭉 올리며 입을 연다. "시작"


오늘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1. 질풍노도의 청년에서 반쪼가리 메다르도 자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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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반쪼가리 자작' 포스터 ⓒ극단 프로젝트하다

 

 

광대들의 입을 빌려 시작되는 이 이야기의 제목은 <반쪼가리 자작>. 선과 악이 뒤섞인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청년 메다르도 자작이 주인공이다.


순진한 청년 메다르도는 가문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이교도와의 전쟁에 참전한다. 전쟁을 책으로만 배워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하던 메다르도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을 죽이는 일에 익숙해진다. 어쩌면 즐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적군의 대포 때문에 전진도 후퇴도 어려운 시점. 메다르도는 자신이 해결하겠노라 무작정 대포를 향해 달려 나간다. 우여곡절 끝에 대포의 앞까지 도착했지만 정면으로 날아온 포탄이 메다르도의 몸을 반으로 가른다. 메다르도는 반쪼가리가 된다.


반쪼가리 메다르도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온전하지 못한 끔찍한 모습을 반겨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너는 내 아들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아버지와 반쪼가리 메다르도를 조롱하는 마을 사람들 뿐. 아버지가 죽자, 영주가 된 메다르도는 폭력과 공포로 마을을 다스리기 시작한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수형에 처하고, 눈에 보이는 동물들은 반으로 갈라 죽이고, 마을 곳곳에 불을 낸다.

 

 

"아름다움과 지혜와 정당성은 바로 조각난 것들 속에만 있다는 것을!"

 

 

악한 메다르도의 폭정에 목소리를 드높이던 사람들마저 폭력에 익숙해지던 어느 날, 착한 행위를 하는 메다르도가 마을에 나타난다. 남은 반쪼가리 착한 메다르도가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착한 메다르도는 공포에 지쳐있던 마을 사람들의 희망이 된다. 악한 메다르도 대신 자비로서 이들을 구원해줄 것이리라. 그러나 착한 메다르도의 절대적인 선행과 설교는 마을 사람들을 진절머리 나게 한다.


둘 중 하나만 남거나, 아니면 둘 다 사라지는 게 낫지 않을까? 마을 사람들은 두 메다르도가 사랑에 빠진 소녀 파멜라를 통해 싸움을 붙이기로 결심한다.

 

 

 

2. 세상 남루한 메르헨 판타지 연극


 

연극 <반쪼가리 자작>은 환상문학의 거장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 1923~1985)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17세기 이탈리아와 터키의 전쟁에 참전했던 테랄바의 메다르도 자작을 통해 선과 악이 분열된 자아를 다루고 있다.


박성찬 연출은 한 사람의 몸이 갈라져 절대악과 절대선으로 나뉜다는 원작의 환상적인 이야기에 메르헨적인 요소를 도입했다. '세상 남루한 메르헨 판타지 연극'이라는 문구처럼 투박하지만 아기자기한 연출들이 눈에 띈다. 대걸레에 머리를 붙여 만든 조잡한 말부터 아이가 색종이를 오려 붙였을 것 같은 영주의 왕관, 가면과 그림자놀이 등. 전쟁과 폭력, 선과 악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 흥미롭게 다룬 것이 인상적이다.


메르헨이라는 정체성을 완성시키는 것은 인형극이다. 전쟁에서 비인간적으로 몰살되고 처리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작은 인형으로 등장한다. 인형들은 모두 신체의 일부를 잃은 채 피 흘리고 있다. 전쟁터를 배경으로 가볍게 뿌려지고 무심하게 자루로 쓸어 담아 처리되는 이 인형들의 모습은 존엄도 인간성도 존재하지 않는 끔찍한 전쟁의 현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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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반쪼가리 자작'ⓒ극단 프로젝트하다 photo by 김솔

 

 

그 중심에 메다르도 자작이 있다. 어딘가 음울해 보이는 이 인형은 반쪼가리라는 자신의 임무를 그 누구보다 잘 연기하는 배우다. 메다르도 자작은 인형의 모습으로 포탄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한다.

 

관객들의 눈 앞에서 몸이 양쪽으로 갈라진다. 반쪼가리 인형은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꿈틀거린다. 인형이 아니라면 실감 나게 보여주기 어려웠을 환상적인 소재다. 악하고 선한 반쪼가리 자작은 배우들의 섬세한 움직임으로 생명력을 얻는다.

 

 

 

3. 메다르도 자작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두 반쪼가리 자작은 파멜라의 남편 자리를 두고 결투를 시작한다. 서로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결국 양쪽 모두 큰 부상을 입고 쓰러진다. 환호하는 마을 사람들 몰래 파멜라는 두 반쪼가리 자작의 신체를 들고 사라진다.


순진한 소녀로만 보였던 파멜라는 자신의 완벽한 남편을 만들기 위해서 둘을 합쳐버리자고 생각한다. 반쪼가리 자작은 파멜라에 의해 온전한 사람으로 거듭난다. 마침내 선과 악을 모두 겸비한 메다르도 자작은 공명정대한 영주로서 마을을 위해 일하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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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반쪼가리 자작'ⓒ극단 프로젝트하다

 

 

정말 이것으로 해피엔딩인 걸까?


원작과 달리 광대를 활용해 이야기를 진행하는 이 극은, 광대가 이야기에 의문이 드는 순간 극에서 빠져나와 물음표를 던지기 시작한다. 온전하지 못한 반쪼가리 자작의 공포와 자비가 온전한 사람들을 괴롭게 한다라고?


 
"온전하다는 건, 완벽하다는 거지? 근데....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존재하나?"
 


연극이 끝난 후 마주하는 고민은 결국 광대가 물었던 이 대사를 상기시킨다. 온전하다는 것은 과연 뭘까? 선과 악으로 분열되었던 반쪼가리 메다르도는 온전하지 못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온전하고 완벽한 사람들이었을까? 질풍노도의 시기 청년 메다르도 자작은 자신이 온전한 두 눈으로 모든 것을 알고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수와 무지와 들끓는 감정으로 행동한 결과는 분열된 자신의 모습이었다.


자기가 온전하다고 생각했던 마을 사람들 역시 자기의 이익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반쪼가리 자작의 외면만 보고 그를 혐오하기 시작한 마을 사람들, 비싼 값에 작물을 팔며 가난을 외면하는 위그노들, 쾌락만을 추구하는 문둥병 환자들, 살기 위해 폭력을 정당화하는 사람들. 이 이야기의 시작이 이교도들과의 전쟁이었다는 사실과 그곳에서의 선악은 무엇이었는지도 눈 여겨볼 만하다.

 

 

 

4. 메다르도 자작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자작이 아무리 현명해져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동화 같은 Happily ever after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선과 악의 붕괴를 극복해 균형을 찾은 메다르도를 제외하고 아무도 바뀌지 않은 채 끝나는 이 극은 꽤 찝찝한 현실로 다가온다.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공연을 안내하는 곳 어디에서도 배우들의 배역을 확인할 수 없다. 모두가 메다르도이자 마을 사람들을 연기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메다르도라는 독특한 인물의 경험은 인간 본연의 것으로 그 의미를 확장한다.

 

연극에서 악한 메다르도와 선한 메다르도는 서로에게 "들끓는 욕망을 억제하고 있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처럼 절대적인 악도, 절대적인 선도 인생의 정답이 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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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여분의 짧은 시간 동안 가장 극단적으로 분열된 인간의 두 자아를 마주하고, 텅 빈 무대를 떠나 다시 현실로 돌아간다. 어쩌면 연극 속의 마을 사람 1이었을 나의 모습들. 겉보기에 온전하지 못한 메다르도 자작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온전한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는 매일같이 폭력적이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 단순히 이 일들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공명정대한 메다르도 자작 한 명으로 세상이 변할 수 없다는 것은 더 많은 메다르도가 필요함을 의미한다.

 

선과 악이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쳐 균형을 찾아 온전함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 긴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이 과정을 경험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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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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