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벌새'가 내 마음에 가닿을 때까지 [사람]

글 입력 2020.11.13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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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

선생님, 제가 불쌍해서

잘해 주시는 건 아니죠?

 

영지, 그 물음이 너무 아파서

은희를 바라만 본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영지:

바보 같은 질문에는, 답 안 해도 되지?

 

 

검은 바탕에 '서울, 1994'라는 자막과 함께 '딩-동' 초인종 누르는 소리, 영화는 시작한다. 2019년에 개봉하고 1년이 넘어서 올해 11월에야 <벌새>를 보며,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는 난 처음부터 움츠러들었다.

 

뒷모습만 보이던 단발머리의 아이는 초인종 소리에 반응이 없는 현관문을 향해 소리치고, 화를 냈다. 아이는 이내 자신의 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위층 자신의 집으로 올라간다. 집의 초인종을 누르자 곧바로 문이 열린다. 손에 들고 있던 검은색 비닐봉지를 엄마에게 전하는 아이의 눈은 왠지 슬픔을 담고 있는 듯 흔들린다.

 

영화 <벌새>는 시작부터 나에게 어려웠다.

 

 

어디봐.jpg

 

 

<벌새>는 2019년을 대표하는 영화 중 하나로 선정될 만큼 화제의 영화였고, 같은 해 개봉한 <항거: 유관순 이야기>로 강한 인상을 남긴 김새벽 배우가 참여한 작품이라 늘 보고 싶다,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난 추석 연휴 때 EBS에서 상영한 이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을 줄 알았는데, 감사하게도 독립예술영화 온라인 상영회 상영작 중에 <벌새>가 있어서 천천히 마음에 담으며 감상할 수 있었다.

 

플랫폼에 업로드된 작품을 감상했기에 장면이 이해가 안 되면 재생할 수 있는 환경이었음에도 영화는 나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보편적으로 갖고 있던 중학생 소녀의 이야기라는 틀에 갇혀있었기 때문일까, 예상하지 못했던 폭력적인 장면에 몸이 긴장하기도 하고,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기 어려운 순간도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이해도 마음도 어려웠던 한 소녀의 이야기는 동명의 책을 읽으며 너무도 평범한 아이로 나에게 다가왔다.

 

만약 영화관에서 <벌새>를 보고 영화가 인상적으로 남지 않았다면 책 <벌새>를 꼭 대여해서 읽어보길 제안한다. 영화 시나리오가 책의 반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굳이 짧지도 않은 내용을 텍스트 형태로 다시 봐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책 표지를 넘겨서 시나리오 첫 문단을 읽으면 이 작품을 새로운 눈으로 다시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내가 그랬다.

 

*

 

영화 '벌새'는 나에게 친절하지 않았지만, 인상 깊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폭력적인 장면에서 긴장한 것은 1994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마음 깊이 옳지 않다는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기 어려웠던 큰 이유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느꼈던 감정, 생각을 벌써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영화는 시대적 배경이나, 인물의 감정을 친절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대사와 연기로 담담히 전할 뿐이다.

 

학원에서 선생님 안 볼 때 노트로 친구랑 잡담하고, 온 가족이 나서서 일할 때는 작은 몸으로 기꺼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배고파서 감자전을 빨리 먹기 위해 젓가락이 아닌 손을 이용하는 은희. 아이는 누구보다 평범한 학생이었고 누구나처럼 사랑과 관심이 필요했다.

 

영화는 주인공 은희와 관계가 있는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 가족, 친구(남자친구, 학원 친구, 후배), 선생님(학원, 병원)의 모습을 통해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의 방법과 태도를 보여준다. 은희를 제외한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은희에게 관심을 보인다. 관심은 사랑의 형태로 등장하기도, 사랑일까 의심되는 형태로 등장하기도 한다. 여기서 사랑인지 의심되는 형태, 이 부분이 날 불편하게 했다.

 

과연 '사랑'일까. 담임 선생님의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라는 외침은, 아들은 과외까지 하며 교육하는 것에 반해 문구점에서 물건을 훔쳐 경찰서를 갈 수도 있는 딸에게조차 무신경한 아빠는, 가정의 유일한 아들인 은희 친오빠 대훈의 은희를 향한 폭력은...

 

소리 없는 폭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행사한 일이든 은희는 분명 상처를 받았고, 죽음까지 생각했다. 영화 보면서 난 계속 기다렸던 것 같다. 이들 마음속 어딘가 자리 잡은 은희를 향한 사랑이 은희에게 용서를 구하고 사랑으로 은희를 보듬어 주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절망적이게도 영화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촬영중(흑백).jpg

 

 

반면, '사랑'을 가르쳐주는 방식으로 은희에게 관심을 준 인물은 영지이다. 은희의 새 한문 학원 선생님인 영지는 사람이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랑을 그녀에게 직접 보여주었다. 누군가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했던 중학생 은희에게는 무척 필요한 마음이었다. 영지가 은희에게 보여준 마음은 가볍지 않게 솔직하고 친밀했다. 영화를 다시 볼 수 있다면 나는 먼저 영지와 은희, 두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을 볼 것이다.

 

학원 단짝 친구인 지숙과 갈등이 생긴 날의 한문 수업 시간, 말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남자친구에게 실망한 은희가 영지를 만나러 학원으로 찾아온 날, 귀밑 이물감을 걷어내고 회복 중인 은희를 찾아 병원에 온 영지의 모습을 돌려 볼 것이다. 선생님은 은희에게 어른스러운 단단한 모습만 보여주지 않았다. 상처를 받으면 똑같이 아파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일을 은희처럼 어려워하는 진실한 모습으로 상처 입은 은희의 마음을 알아주었으며, 힘이 되었다.

 

영화는 흘러가는 장면을 따라가기만 해도 내용 흐름이 머릿속에 어렵지 않게 들어왔지만, 인물의 감정이 중간 없이 튀는 느낌이 들거나 인물의 역할을 명확히 알기 어려운 경우가 있었다. 나에게는 아빠의 눈물, 지완과의 관계 변화 등과 수희가 그랬다. 퍼즐처럼 맞춰지지 않는 장면들을 이해하기 위해 영화를 본 그날 바로 책을 펼쳤다.

 

*


도서 '벌새'는 영화보다 나(독자)의 활동 영역이 넓었다. 영화는 일방적으로 발맞춰 따라가야 하는 입장이었다면, 도서는 내가 장면을 주체적으로 상상하며 그려나갈 수 있었다. 시나리오는 영화 속 인물들의 행동 뒤편에 있던 세세한 감정과 생각을 지문으로 독자에게 오롯이 전달했다. 영상으로 자세히 드러나지 않았던 인물들의 숨은 감정을 문장들로 알아가는 일은 작가가 특정 인물을 이야기에 등장시킴으로써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뭔지 생각하게 했다.

 

은희의 사랑이 그랬다. 지완과 유리, 둘 다 은희가 좋아한 사람이다. 은희는 지완이 처음 자신에게 실망을 줬음에도 짧은 변명 한마디만으로 그를 다시 받아주었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울먹이며 마음을 고백하는 유리를 은희는 수줍게 바라봤다.

 

부모님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사랑하며 사랑을 배우던 은희였다. 대치동에서 혼자 행당동까지 병원을 가고, 부모님 없이 긴 회복 시간을 병원에서 홀로 보낼 만큼 독립적인 아이였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과정에서 혼자 마음 쓰고 상처받는 모습은 영락없는 중학생이었다.

 

 

지완.jpg

 

 

사랑을 하며 문제 상황에 부딪히던 은희가, 영지를 만나면서 결핍했던 보살핌을 받게 되면서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다. 은희가 사랑을 알아가는 장면 중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은희는 자신이 좋아했던 지완에게, 유리에게 각각 다른 시점에 같은 질문을 한다. "너는 내가 왜 좋아?"

 

지완의 경우 "네가 대청중에서 제일 예쁘잖아"라고 답을 했는데, 이때 은희의 얼굴에는 쓸쓸함이 지나간다. 유리의 경우 "그냥 언니가 좋아요. 그러면 안 돼요?"라는 답을 했고, 은희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밝게 웃는다. 은희는 자신도 모르게 알았다. 이유 없이 자신을 좋아하는, 겉모습과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사람을 좋아해 주는 유리가 자신에게 더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

 

<벌새> 작품을 두 가지 예술 형태로 경험해보면 내용이 잘 정리되어 머리에 저장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복잡하게 매듭처럼 얽혀있는 은희를 둘러싼 관계들과 감정들이 영화를 보고, 책으로 다시 읽으면 한순간 풀어질 것이라고.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벌새>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수록 김보라 감독님이 짜놓은 끈끈한 거미줄에 완전히 묶여버리는 기분이었다. 작품을 읽을수록 더 빠져나가기 힘들 것을 알면서도 난 계속 발버둥 치며 '벌새'에 더 가까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김보라 감독님은 굉장히 오랜 시간에 걸쳐서 <벌새>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2013년 초고를 쓰고 2017년 촬영을 하기까지, 감독님은 미국, 유럽부터 아시아까지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중학생부터 70대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에게 시나리오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감독님은 그렇게 가장 보편적인 중학생 은희를 탄생시켰고, 박지후라는 배우로 스크린에서 살아 움직이게 했다.

 

<벌새>는 소란한 나의 글에 담기에는 너무 깊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 시작부터 어려웠던 '벌새'가 나에게 의미를 주기까지, 인물들의 말을 통해 나 자신을 들여다본 시간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은희에게 따뜻한 우롱차 한 잔을 건네는 사람을 나로 그려보고 있었다.

 

 

우롱차.jpg

 

 

[정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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