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상과 현실 사이, 소설이라는 얇은 막 - 단 하나의 문장 [도서]

글 입력 2020.11.0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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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문학동네, 2018)

 

 

이 소설집, 너무 현실적이지 않냐고 물으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도 많이 있을 것 같다.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들이 매번 그럴 듯 하긴 했어도,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이 소설이 주는 불편함이, 때로는 공포가 너무 현실적이고 생생하게 느껴졌다. 현대 사회 안에서 꿀 수 있는 악몽들을 몰아서 꾸는 것 같기도 했고, 어떤 꿈들은 깨어나도 지워지지 않는 찝찝함을 남기기도 했다.

 

 

 

가상과 현실 사이, 소설이라는 얇은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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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백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한다. 예전에는 창작자가 자신의 창작물을 내놓으면 사람들은 구매행동을 통해 동의와 거부의 의사를 표명했다. 시장경제의 논리 아래에 어떠한 작품과 가치들은 살아남았다.

 

요즘은 다르다. 이전 방식의 피드백이 예 혹은 아니오라는 단 두 가지 방식의 입장표명이었다면, 요즘은 더 자세하고 분화된 의견들이 시시각각 온라인으로 날아들어 창작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창작과 피드백의 경계는 이미 물통 속 물감처럼 섞여 들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소설은 현실과 가상이라는 영역 사이에 양쪽의 입김으로 끊임없이 펄럭대는 얇은 막처럼 느껴졌다.

 

이 소설집의 첫 소설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가 이러한 상황을 그려내는 방식은 무척 사실적이어서, 이미 있었던 일을 옮기기만 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저마다 입에 칼을 물고 손에 도끼를 들었는데도 구체적인 형태가 없는 전기적 신호의 공간에서 최상의 포지션은 구경꾼이었다.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 P33>

 

 

이 소설은 가급적 목소리가 없는 작가를 대상으로 내세워 상황을 부각시키고, 철저히 관찰자 입장을 고수하는 ‚나‘를 작품의 화자로 선택한다. SNS에서 일어나는 설전을 강 건너 불구경 마냥 둘러보고, 다음부턴 저 작가의 책을 선물하기 어렵겠다 정도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는 소설 속 ‚나‘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었다. 그렇다. 최상의 포지션은 구경꾼이고, 어떠한 공격과 비난도 피할 수 있는 안전지대는 그렇게 스스로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냉소적인 척 형성한 안전지대 안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사실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걸은 셈이었다. 소설은 단 한마디 비판의 목소리도 없이 내 스스로의 포지션을 돌아보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공감하고 싶지 않지만 공감이 되는 불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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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에서는 시대착오적 가치관이 묻은 호의로 내 삶에 마음대로 거리를 좁혀 들어오는 시골 마을에 대한 환멸감에 동감했다. 허락도 없이 멋대로 임신한 배를 만지는 옆집 할머니의 손길에 대해선 흠칫 소름이 돋았다. 어떠한 나쁜 의도도 없어서 더욱 그랬다. 모두가 알아서 서로에게 거리를 유지하는 도시의 질서와 그곳 사회에 통용되는 질서가 서로 다른 것이라고 머릿속으로 이해하면서도 도저히 불편하고 불쾌한 마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지속되는 호의>에서는 고작 어린 아이에게 나와 내 아이를 방해한다는 핑계로 미움과 원망을 쏟아내고 있었다. 상대는 멋모르고 어른들의 관심과 사랑이 부족할 뿐인 어린 아이일 뿐인데, 그런 아이가 다가오는 것이 거슬렸다. 그 아이가 내 연약한 내 아이와 함께 순진무구한 악의로 내 눈앞에서 사라졌을 땐 원망이 극에 달했고, 발이 모래에 푹푹 빠지는 휴가지에서 꿀 수 있는 최악의 악몽이 상상 되었다.

 

악의 없는 상대를 미워하는 감정은 끔찍하다. 나 자신의 밑바닥을 내보이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치껏 통용되는 예의와 질서는 악의 없이도 손쉽게 훼손된다. 예의의 일종으로 우리들 사이에 거리가 필요하다. 인간적인 처사는 아니더라도, 남들과 내가 편안하게 공존하기 위해선 거리는 지켜져야 한다. 거리가 지켜지지 않는 사회, 어쩌면 보다 순수하고 인간적인 사회 안에서 내가 이입한 소설 속 '나'는 불쾌함을 표현하는 악인처럼 느껴졌다.

 

불편한 감정은 그 자체로 악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더라도 누군가를 미워하는 나를 정당화할 수는 있을까. 숨기고 싶은 감정을 수면 위로 떠올려서 바라볼 때, 비로소 객관적인 판단을 개입시켜보게 된다. 공감하고 싶지 않지만 공감이 가는, 악인이 되고 싶지 않지만 악함을 발견하는 과정을 경험해볼 수 있었다. 소설의 사건보다도 이러한 과정이 더 무섭고 불편한 감정을 남겼다.

 

 

 

별반 다를 것 없어 암울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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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큰>에서는 발달한 기술이 인간을 위험에 빠뜨렸을 때, 철저하게 영웅화 된 희생에 기대는 게 고작인 사회가 묘사된다. 그것도 힘없는 약자에게, 영웅의 프레임을 씌워서, 희생에 기꺼이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서 문제를 해결한다. 이 소설집에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도 등장한다. 소설의 배경은 묘사되는 기술로 보나 소재로 보나 미래가 확실하지만, 여전히 소설의 암울함은 현실의 경종을 울린다.

 

소설의 묘사는 전혀 다른 배경의 오늘날의 사건들을 떠오르게 한다. 현실의 문제가 현실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과, 미래에 마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주는 파괴력은 확실히 다른 것 같다. 우리가 그렇게 목메어 마지않는 기술의 발전으로 꿈꿀 수 있는 미래가 현대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답습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을 수 없다. 현대 사회의 속도전은 이를테면 보호장비 하나 없이 내달리는 속도전인 셈이다.

 

어딘 가에 부딪히기에 임박했을 때가 되어서야 힘 약한 누군가가 몸바쳐 살려내야 하는 달리기라면, 왜 달려야 하는지, 이렇게 달리는 게 맞는지, 혹은 최소한 달리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갖추어 진 건 맞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매번 누군가의 희생 이후 반성만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별반 다를 것 없는 미래를 맞이할 것인지에 대한 키를 여전히 손에 쥐고 모른 체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집 <단 하나의 문장>에는 언급한 이야기 말고도 다양한 소재의 글들이 더 실려 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를 철저히 지금 당장, 현재에 기반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독자로서 일종의 혜택이라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와 불편함에 진정한 공감을 경험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 당장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과 소설은 긴말한 관계를 형성하며 몰입하게 한다. 현실과 소설의 경계를 느끼며,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감각을 느끼게 해주는 소설이었다고 생각한다.

    


[박경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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