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별헤는 밤에 생각나는 영화 '동주' [영화]

글 입력 2020.11.06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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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목록에는 있지만 막상 손이 가지 않는 영화, ‘동주’는 내게 그런 영화였다. 흑백영화가 주는 묘한 거리감과 무거울 것만 같은 주제. 그러던 어느 날 여행을 떠났고, 하룻밤을 묵게 된 숙소의 이름이 ‘동주’였다. 이름이 같은 건 그저 우연의 일치일 거라 생각했던 숙소에는 윤동주 시인에 대한 호스트의 애정이 곳곳에 묻어나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시집이나 시의 구절 등 그를 떠올릴 만한 것들이 내부를 멋스럽게 장식하고 있었다. 그곳에 머물며 자연스레 영화 ‘동주’가 떠올랐다. 오늘을 위해 이 영화를 아껴왔구나. 내 손은 무언가에 홀린 듯 영화를 재생하고 있었다. 그의 시, 그의 인생이 생생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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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와 함께한 일생, 그리고 송몽규



영화 동주는 흑백영화로, 죄수복을 입은 윤동주가 교도관에게 심문을 받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일본인 교도관의 질문이 과거와 현재를 전환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송몽규와 언제부터 알고 지냈는지 묻는 말에 영화는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다. 교회가 인민학교로 바뀐다며 술렁이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청년 송몽규는 시대의 변화에 따를 줄 알아야 한다고 연설한다.


“너 급시리 사람들 앞에서 연설은 왜 한거이가”

“아이, 세상이 변하고 있잖아”

“세상이 변해도 신앙은 변하지 않아”


송몽규와 윤동주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송몽규는 시대의 변화를 빠르게 감지하고, 그에 맞추어 자신의 행동도 바꿀 줄 아는 인물이다. 쓸모없는 신앙보다 현실적으로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공산주의를 꿈꾸었던 송몽규. 하지만 학교 선생님과의 대화로 삶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 주권이 있어야 이상향을 말할 수 있다며, 우선은 주권을 찾는 것이 먼저라고 말하는 선생님. 그 말을 듣고 송몽규는 본격적으로 주권을 찾기 위한 무력 항쟁을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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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윤동주는 어렸을 때부터 시 하나만 바라보았다. 가족들한테도 그의 진심이 느껴질 정도로, 방에 앉아 시집을 필사하고 자신의 글을 쓴다. 글은 나중에 써도 늦지 않다며, 차라리 의사가 된 후에 시를 쓰면 어떻겠냐는 아버지의 반대와 권유에도 펜을 놓지 않는다. 시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관계없이 외곬으로 시에 몰두하는 모습은 고지식해 보이기도 하다.


“그,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할 거면 문학이 무슨 소용이 있니? 뭐, 글 쓰는 게 뭐, 권력이니? 시, 그거이 아무나 쓰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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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문학을 대하는 자세는 조금 다르다. 송몽규에게 문학이란 그 자체의 가치, 예술성보다도 이념과 관습을 타파하기 위해 생각을 전개하는 수단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주권을 찾기 위해 무력 항쟁까지 마다치 않는 송몽규의 가치관을 고려해보자면 어떤 연유로 이러한 말이 나왔는지 알 것도 같다. 하지만 문학, 특히 시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고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믿는 윤동주에게 송몽규의 가치관이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듯 문학에 더 진지하게 임하는 사람은 윤동주였지만, 그는 상을 받은 적도 시를 발표한 적도 없었다. 그런 그의 옆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그는 이름난 신문사의 기자들도 붙기 힘들다는 신춘문예에 당당하게 입선할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글 실력을 자랑했다. 가족들이 봐도 더 책을 끼고 사는 건 그인데 송몽규가 입선을 해버렸으니, 진심으로 축하하지만 동시에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후 일본 제국대학의 입학시험에서도 송몽규는 합격하지만, 윤동주는 떨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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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뛰어난 실력을 가졌음에도 송몽규는 무장 항쟁을 통해 일제에 저항한다. 주권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투쟁하는 모습에 비하면 방에 앉아 글을 쓰는 자신이 언뜻 초라하게 느껴진다. 글쓰기에 대한 무수한 노력과 열정을 보답 받지 못하는 허무함, 그리고 무장 투쟁을 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곁에 송몽규가 있음으로써 이러한 감정은 더욱 극대화되었을 것이다. 누구보다 가깝지만 동시에 멀기도 했던 애매한 사이, 송몽규와 윤동주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관계였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윤동주는 교도관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서명을 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러나 서명을 거부하는 윤동주.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대답한다.


“이 시대에 태어나 시인이 되기를 꿈꾼 것이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워 서명을 하는 것조차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윤동주. 그의 시는 특히 자아 성찰, 부끄러움의 정서가 두드러진다고 한다. 그렇게 부끄러워하면서도,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면서도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윤동주. 결국, 시에 대한 그의 열정은 힘든 상황에서도 시를 계속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고 그가 쓴 시는 세상에 발표되어 지금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그의 시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쉽게 쓰여진 시’의 몇 구절을 가져와 보았다.


 

<쉽게 쓰여진 시>


                                                 윤동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2. 일본의 백일몽 : 대동아공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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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공상, 실현될 수 없는 꿈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 백일몽.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되었던 일본의 야욕은 결국 백일몽과 같은 허상에 불과했다. 영화 속에서도 자주 등장했던 단어 ‘대동아공영권’. 세계2차대전 당시 일본이 내세운 슬로건으로,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일본을 주도로 한 아시아 국가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를 명목으로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국가를 점령하고 그들의 주권을 빼앗아 강제적으로 징집, 징용하고 물자를 수탈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인이 겪은 고통을 영화의 인물들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결국 윤동주와 송몽규는 일본의 생체실험에 동원되어 생을 마감한다.


또한 영화에 나온 내용은 아니지만 일본은 조선인 등의 식민지 국민뿐만 아니라 자국민도 보호하지 않았다. 국가 존속을 위해서 개인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영화에서는 승산이 없는 전투를 앞두고 미군의 포로가 될 바에야 천황 폐하를 위해 자결하라는 명을 내려 수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끊는다. 실제로도 자결한 군인의 수가 전투로 인한 사망자 수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고 한다. 피해자는 군인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키나와 자마미섬에 미군이 오자 주민들에게도 자결을 강요했다. 죽지 않고 도망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죽이도록 했다. 자국인을 보호하기는커녕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은 개인을 국가를 위한 도구로 이용한 것이지 한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결국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대동아공영권은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영화 동주에서는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예로 들며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서구 열강을 비난하는 동시에 서구 문명이 정한 국제법을 따르는 자신들을 문명국이라 칭한다. 그야말로 모순 그 자체다. 대동아공영권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허울 좋은 핑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 일본의 백일몽에 휘말려 피해를 입은 여러 국가와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실제로 일본 오키나와의 주민들 중 일부는 일본 본토의 당시 행동을 좋게 보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일본의 피해국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말해도 좋을 한국의 경우,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등 이때 생겼던 문제들이 지금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가벼운 계기로 보기 시작한 영화였지만, 전해지는 메시지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어 시를 쓴다는 고독한 길을 택한 윤동주와 신념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던 송몽규. 잔혹한 시대에 태어나 고뇌하며 살아가야 했던 두 사람의 청춘이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잔잔하게 흘러가면서도 묵직한 여운을 주는 영화 동주. 윤동주 시인이 떠오르는 공간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어 행운이었다. 당분간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애잔한 두 청춘이 떠오를 것 같다.

 

 

[최예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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