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시대 時代의 무덤 - 연극, '새들의 무덤' [공연]

얼마간 앓으면 잊힐 것이냐. 잊힐 리야.
글 입력 2020.10.24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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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소리가 들린다. 무대는 별 치장도 없이 거무튀튀하니 하냥 투박한데, 여기 바닷소리를 풀어 놓았다. 이 소리를 기억으로 붙잡고서, 이제 따라 나아갈 바다는 어디이냐. 150분은 너무도 긴 항행, 출항을 위해 미리 나는 눈감아 바다를 떠올린다. 곧 불이 꺼지고, 캄캄한 파도 소리는 더욱 커졌다. 아아, 그제야 이 파도란 폭풍우가 찾은 바다의 울음소리임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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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민 연출의 ‘새들의 무덤’을 보고 왔다. 저번에 보고 온 연극 ‘찰칵’의 연출이셨다고. 오늘 볼 ‘새들의 무덤’이 펼쳐질 동양예술극장을 찾으며, 아무래도 나는 연극 ‘찰칵’의 기억을 안고서 길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면 ‘찰칵’에서 새는 어떻게 다루어졌던지…… 그때 새는 ‘버려진 존재’인 딸과 엄마를 표상했다. 다리를 다친 채 버려진 새처럼, 둘은 묘사되었다. 날 수 있는 존재이나, 지금 날지를 못해 지상을 기어 다니는, 그런 애절한 새 같이. (지난 리뷰, ‘태어나려고 하는 새’ 참조) 오늘, 하수민 연출이 포착한 새의 면모는 어떠할 것인지, 혹 그와 같을지 하는 자연스런 생각을 안아본다.


티켓을 수령하고 열 체크를 한 다음 객석에 도착하니, 위의 파도 소리가 먼저 와 있었다. 무대의 아직 텅 빈 공간에 그 아찔하고 시원하며 텅 빈 소리가 쏴아-쏴아 맺힌다. 그를 들으며 비바람이 치는 바다를, 나는 상기시키기 시작한다. 아마 내 곧 따라서 갈 어느 바닷가에 미리 가 있는 것이다. 이내 때를 맞아 극장을 삼킨 어둠 위로, 커지는 볼륨에 맞추어 파도 소리는 전횡하고, 그에 잔뜩 휩싸인 채 나는 연극으로 인도된다.


파도가 멎고, 조명이 찾은 무대에는 누런 삼베 옷을 입은 치들이 엎드려 있다. 상을 당한 것일까. 삼베 입은 무리는 데굴데굴 굴러 한 데 뭉치더니 무대 좌측 구석, 벽을 바라보는 뒷모습으로 영영 멈추어 있을 것처럼 자리한다. 그러자, 혼자 일상복을 입은 사내가 무대로 나와선 객석 너머를 우두커니, 그리고 망연히 치어다본다. 때는 2020년, 사내는 고향 바닷가를 찾아왔단다.


그 삼베 입은 무리 틈에서 갑자기 비단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튀어나와, 새의 몸짓을 보인다. 쪼그린 채, 잔걸음 세 번씩 딛고선 머리를 갸웃, 좌우로 흔드는 모습이 영락없는 새다. 소매는 장삼 같아 날개처럼 흐늘거리고, 종종걸음 가끔 쩔뚝이며 비틀거리니 아기새구나. 갸웃거리는 고개로 두리번거림을 보아하니, 주변이 낯선 듯 보인다.


사내는 새를 만나고, 어여쁘다는 듯 손을 내밀고, 새는 경계를 하며 맴돌다간 느닷 사내 품에 안긴다. 갑자기 치는 커다란 천둥소리, 구석에 모여 정지한 삼베 입은 치들은 활개를 치며 무대를 빙빙 돌다가 날아간다, 팔을 퍼덕이면서. 삼베 입은 치들은 새의 무리. 새 무리가 떠나고, 아기새만 남았다. 날아가지 못한 채 무대를 빙글빙글 도는 새, 그리고 그를 따라 좇는 사내, 그런 중에 막의 시공간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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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베들은 이런 형상으로 뭉쳐 있다.



막은 1968년으로 변했다. 사내의 어린 시절, 부모의 장례식이 있던 때이다. 새는 구석에서 사내를 바라본다. 이제 5살 된 아이는 영문을 몰라 하고, 몇 안 되는 동네 사람들만 분주하다. 그들은 장례식에 올릴 돼지를 잡는가 보다. 생포한 돼지를 매달고는, 누가 그를 찔러 죽일 것이냐 의논하는 그네 모습이 한편 수상하다. 다들 두려워 피하고 미루는 눈치. 그러나 돼지를 찔러 피를 마신 다음에나 상여가 나갈 수 있다 하니, 뜸은 한없이 길어진다.


돼지에 귀신이 쓰였다고, 그들은 여기고 있다. 작은 어촌 마을인 이곳에는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으니,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마을에 내린 뿌리 깊은 저주라고 믿는 모양이다. 해방 무렵, 선조들이 죽인 지주의 악귀가 그가 소유한 돼지에 쓰였고, 그 돼지가 씨를 퍼뜨려 이적지 재앙을 불러왔다는 것. 그때 지주와 함께 죽이려 했던 큼직하고 흉폭한 돼지는, 하필 씨가 좋아 마을 사람이 몰래 빼내 접을 붙였다는 게다. 그리고 그 돼지의 씨에 연관된 마을 주민은 하나같이, 배 타고 나가선 돌아오지 못했다.


“배 타고 나가서 죄다 새섬에 먹혀부렀어.” 바로 어제 뱃길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주인공 사내의 부모이다. 이제 마을의 액운을 씻기 위해, 이 돼지를 찔러 상주에게 그 피를 먹이고서야 상여를 내겠단다. 그러나 다들 돼지와 엮이기는 싫은 눈치다. 고기잡이로 연명하는 이 작은 어촌 마을에서 배 띄우지 않을 사람, 그리고 마을에 유일하게 남은 노인은 주인공의 할아버지. 그러나 그는 한사코 칼을 쥐려 하지 않는다. 실랑이는 한참을 계속되고, 갈등은 험악해지는 가운데, 말릴 새도 없이 5살 배기 주인공이 돼지를 찔러 그 피를 마셔 버린다. “아잇, 나 배고픈디, 밥 주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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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돼지가 죽었고 상주가 그 피를 마셨으니, 상여가 나간다. 흥겨운 박자의 발놀림. 저놈이야 불쌍하지만, 어쨌든 이제 다 되었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일까. 아이의 부모를 위한 장례식은 사실 마을 사람들을 위한 액막이 의식, 상여꾼들이 무대 밖으로 나가고 주인공의 시점은 현재로 돌아온다. 새는 종종걸음을 그만두고 이제 일어나, 나는 시늉을 한다. 날려고 애를 쓰고 있다.


곧 일전의 마을 주민 하나가 뛰듯이 무대 위로 등장했다. 조금 전에 돼지 칼을 잡고서 노인과 목소리를 높이던 사내, 주인공은 그를 판수 삼촌이라 부른다. 때는 1976년이다. 그를 뒤따라 ‘정숙이 누나’와 서울 청년이 뛰어들어온다. 파도 소리가 퍽 거친데, 판수 삼촌에게 배 띄워달란다. 사랑의 도피일까 궁금해 보니, 과연 그렇다. 배 띄워 저기 건너 ‘새섬’으로 가야 쓰겠다는디, 까닭인즉 서울 청년이 ‘빨갱이’로 몰려 경찰에 쫓기고 있다고. 그런데 파도가 너무 세다. 지금 사람 잡아먹는 저 바다 위론, 판수 삼촌이 배 띄울 수야 없을 노릇이다.


실랑이가 계속되던 중에 수필 삼촌이 어슬렁 무대에 들어온다. 일전의 노인은 죽었고, 수필은 그의 재산을 전부 물려받았다. 그는 이 어촌에서 배를 가진 유일한 사람, 선주이다. 선주인 수필을 내세워 부리는 떼질도 안 먹히자, 속이 상한 청춘 남녀는 바다로 뛰어든다. 그러나 두 삼촌은 시큰둥하다. “허메, 빠져부렀네. 거, 할머니가 슬퍼하겄네.” 하곤 곧잘 생계 이야기를 나눈다. 태풍 때문에 배를 못 띄웠으니, 받을 돈은 3달만 미뤄달라는 판수 삼촌. 수필 삼촌은 대답을 피하고는 슬쩍 돌려서, 곧 여기 항구가 들어오니 땅을 사두란다. 아무래도 수필은 ‘높으신 분’들과 인맥이 있는가보다.


바다에 뛰어든 청춘 남녀를 주인공 사내 ‘오루’가 건지고, 그들에 오루까지 합세해 노 저어 저기 ‘새섬’으로 가려 한다. 청춘 남녀는 도피를 위해, 오루는 ‘새섬’에 얽힌 마을의 미신을 밝히기 위해. 그러나 정숙과 청년은 파도에 휩쓸리고 오루도 곧 휩쓸렸으나, 오루 홀로 백사장에 도착한다. 그리고 ‘새섬’에 과연, 유년 때 죽은 엄마 아버지는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뱃길에서 돌아오지 못한 주민들이 ‘새섬’에 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이 어린아이한테 해왔던 것이다. 자신들도 그리 믿음으로써, 위안 삼았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너무 어린 때 부모를 여읜 이 아이에게 그런 이야기란, 너무도 애닯은 거짓말이다. 저기 건너 보이는 곳에 있는 제 부모를 어찌 만나고 싶지 않으랴.


*


이거 원, 줄거리를 다 읊을 생각인가 보다 나는. 뭐 하나 줄여보자니, 뒤에 있을 장면들에 설명이 어려워 결국 전부 다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150분짜리 연극을 전부 토해낼 수도 없는 노릇, 연극은 보는 예술이기에 그저 글로 풀어내는 일은 지루한 일에 불과할 것이다.


보시다시피, 극은 주인공 사내 ‘오루’의 서사를 통해 옛이야기를 풀어낸다. 지금에야 애틋하기만 한 멀고도 낯선 이야기들, 말하자면 작은 마을 공동체, 마을에 얽힌 액운이라는 미신, 살풀이, 상여, 죽은 자들의 땅과 같은. 또 본 적 없는 이야기들, 말하자면 해방과 지주와 타도와 땅 분배와 이내 몰수됨과 팍팍해 가는 생계와 그 따라 팍팍해가는 인심과 도시 개발과 보상금 같은.


연극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옛이야기들을 풀어내고, 나는 그러한 ‘본 적 없는’ 것들을 멀찌감치서 겪는다. 우리의 옛이야기들, 1900년대의 서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소재, 비극성과 해학성을 고루 갖춘 ‘잘 된’ 소재이다. 그래서인지 여러 문예를 통해 그것은 거듭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겪은 적 없는 것들의 앞에서, 내 견해는 자취를 감춘다. 감상쯤이야 있지만, 그것은 ‘어딘가 먹먹하고, 쓸쓸하며, 애잔하다’와 같이 한없이 가벼운 낱말들, 견해는 묘연하다. 견해는 진득허니 깊어야 하는 것, 또한 단단히 자신에게 소유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기에.


충분한 깊이와 타당성을 가져야 옳을 견해, 내 여기서 그것을 모색해보기란 어려울 일이다. 이 서사는 일어난 일, 그리고 지나가 버린 일들. 나는 다만, 잊혀가는 이 ‘일어난’ 일들에 대해 어딘가 ‘먹먹하고 쓸쓸하며 애틋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따름이다. 또한 즐거워하고, 또 기억해 보고자 할 뿐이다. 지금, ‘과거의 일’에 대해 한바탕 논해보기엔, 내 삶에 스며든 ‘고난과 애닯음’이 너무 적어 그렇다.


*


‘새섬’의 미신이 깨지고, 막의 시간은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새는 이제 잘도 노닌다. “너 진짜 뭐야? 널 따라가고부터 자꾸만 옛날 모습이 보여.” 사내는 이 궁금한 새를 잡으려 하고, 새는 자유로이 날아 자꾸만 빠져나간다. 시나브로 막 전환, 청춘남녀의 일로부터 4년이 지난 80년이다.


어촌 주민들은 한자리에 모여 있다. 행사를 하는가 본데, 이것은 또 무슨 행사인고… 아, 무당굿이구나. 다들 흰 모시옷을 입고 자리해 있는데 수필 삼촌만 재킷까지 갖춰 잡은 ‘양복’ 인걸로 보아-하니, 그도 나름 이 쬐깐한 마을에서는 유지 有志인 듯하다. 앞서 수필 삼촌은 판수 삼촌한테 땅 마지기나 사두라 했었지. 과연 무언가 들어오긴 들어왔나 보다.


고대하던 관광특구가 들어서고 항구도 곧 들어올 것이니, 그들로선 이 마을과 새섬에 얽힌 질긴 미신을 걷어야 쓰겠다. 무당굿은 저주 풀고 액운 빼는 의식, 새섬과 마을 앞바다에 삼키인 망자들의 혼을 기리기 시작한다. 의식은 망자를 겨누지만, 실상 산자를 위하는 것. 무당은 오루의 부모를 두고 달래기를 시작하고, 마을 사람들은 굿이 잘 들기를 손 모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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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씻김굿



어째 굿이 시워언하니 끝날 기미일랑 보이지 않고 무당이 자꾸만 뜸을 들이니, 마을 주민들은 그를 보채다간 ‘복채’깨나 두둑이 채워 쑤-욱허니 밀어 넣는다. 무당이란 이것으로 밥 지어 먹는 자이라, 아 글쎄, 옛날에는 이런 일이 비재했다는 것이다. 굿은 죽은 자를 겨누어 산 자를 위하는 하나의 의식, 아니 행사. 복채 넣는 그들의 손엔 어서 빨리 의식을 마치곤 아주 편안해지고자 하는, 그런 인간적인 바람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무당의 뜸질이 복채를 위한 쇼는 아니었던 것이, 곧 큰 바람이 사람들을 이리저리 휩쓸더라는 것이다. 불경함을 꾸짖는 저승의 일갈 같이 말이다. 무당은 안 되겠는지 강신을 하고, 그 몸에 주인공 ‘오루’의 어머니가 들어차고, 마을 사람들과 수필 삼촌을 꾸짖는다. “혼도 안 건지고 씻김을 하는 게 워디 있는 일인가.” 수필은 어땠든 빨리 해치워 버리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안 될 일이제, 안 될 일이야 하며 대립한다.


그러니까, 여태 주민들의 장례 때마다 꼬박 상여가 나갔지만, 전부 다 빈 상여였고 육신은 바다에 아직껏 있었다는 말. 그렇담 무덤은 누구를 위한 무덤인가. 이제라도 혼나마 건지기 위해 무당과 주민들은 ‘천에 매단 밥그릇’을 바다 중간에 던지곤 잡아당긴다. 그러면서 망자의 이름을 세 번 부르니, 이는 혼 건지기 의식인 셈이다.


*


굿이라. 그러고 보면 내가 굿을 실제로 본 일이 있었던가 싶다. 농촌에 살던 아주 어릴 적, 마을에선 집을 새로 다 짓고 난 때 돼지 머리 놓고 기원하는 것이야 몇 보았지, 기껏해야 90년대 초엽인 당시 마을에 신당수가 어디 있고 성황당이 어디 있으며, 그때까지 연명한 무당은 그 어디 있기나 했겠는가.


내 고을에 전해 내려오는 액운과 미신 따위 들은 바 없다. 따지고 보면, 그런 것들이 구전될 수 있을 만큼 마을 주민들이 자주 왕래하지도 않았구나. 인심이나 박해져 가는 그때, 얼만큼 자란 뒤 듣기론 마을 사람들 대개가 생계에 허덕이느라 그렇노라 하시는 것이였다, 내 할아버님께선. 팍팍한 논에도 인심은 피는 법이랬지만 그것도 다 옛말이라고, 문자 그대로 쌀독이 비어, 당장 다음 주 자식 먹일 쌀을 궁리하는 인간의 고뇌에 인심이 웬 말이겠는가.


덮친 격으로 이 작은 농촌 마을에 고속도로 인터체인지가 들어오려니, 그 토지 보상 문제로 서로 눈알깨나 굴리고 길가변 땅을 갖지 못한 사람들로부터는 소리 소문 없이 질투도 오가더라는 것이였다. 아 글쎄, 고속도로 인터체인지가 들어오자면은 당시 마을버스 겨우 지나다니던 왕복 1.5차선 본도로를 확장해야 할 것인디, 토지보상금도 그 길가변 땅 주인한테나 쥐이는 것이렷다. 빈 쌀독에 큰돈이 왈칵 들어오자니, 이렇듯 참 흉흉한 일이다. 팍팍한 논바닥에서 피어나는 함박웃음은, 이렇듯 내겐 ‘아주 없는 신화’다.


그래, 나로서는 이런 다 지난 옛이야기를 접하자면, 그때 내 고장과 어른의 사정과 그때의 삶과 이야기들이 까마득한 전설처럼 흘러 나린다. 그러니까 이제는 아주 잊고 살던, 그 옛날의 이야기들과 이제 없는 내 할아버님과 뭐 그런 것들이 물큰 떠오른다는 말이다. 벼 자라는 모냥새로 계절을 먼저 느끼던, 그 농촌에 넉넉한 미소 같은 건 좀체 없었다. 나야 뭐 어렸으니 그런 것들로부터 멀게 컸다지만, 그래도 고장에 감도는 이 쓸쓸한 분위기는 보고 듣지 않은 채로도 느껴지는 것. 매해 추석 즈음에는 벼만 활짝 피어 저기 머얼리까지 나리는데, 어째 명절날은 고요하고 또 적요하기만 했던 것이었다.


그래, 옛날이야기를 듣자면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나의 서사는 88년으로부터 멀고 97년으로부터도 조금 지난 때부터이니, 그야말로 팍팍하기 그지없는 즈음이렷다. 내 아버지께서도 사업에 큰 사기를 당하시여 생계가 박한 사정은 그리 먼 일이 아니었더랬지. 가압류 딱지의 색은 짙붉은 색이다. 그럼에도 매년 벼는 누렇게 피오르는데, 마을은 적막하기만 하고, 학교에 가면 누구 어머니가 간밤에 야반도주를 했더라는, 그런 한없이 서글프고 파아-란 이야기가 감돌던 시절. 1900년대는 문예에 있어서 참 좋은 소재렷다. 가만 들추어 보기만 해도, 서글픈 비애가 우수수 쏟아지는 그때 그 시절이란.


*


여기까지가 1부의 서사이다. 150분은 긴 시간이라, 인터미션이 마련되어 있었다. 객석은 그래도 퍽 따수워 나는 열이나 식히려고 밖을 나섰다. 추위가 성큼 다가와 있다. 추석이 지났으니 이제 추울 일만 남았겠구나. 나는 이런 생각을 하다간, 이번 추석 명절 때 여전히 거기 피어있던 가득 찬 벼들을 상기해보았다. 지금, 마을에 감도는 비극의 아우라는 자취를 감추었구나. 잊혀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간만 하염없이 흘러오던 중에, 당시의 마을 어른들 중 몇은 부고 소식으로 대신 접하였고, 또 뒷집, 옆집에 있던 이들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 뒷뒷집의 어른은 특히나 무서우셨던 어른, 그러나 얼마 전엔 구급차가 그 집 앞을 서성였다. 그간 이 모든 쓸쓸한 이야기들은, 시간의 책갈피에 끼인 채 콤콤하니 삭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2부의 막이 다시 오른다. 서사는 어디로 갈런가. 응당 88년이지. 그다음은 어디겠는가. 말해 무엇하나, 97년이지. 나는 이런 것들에 퍽 가까이, 그러나 조금은 떨어진 채로 컸다지만, 역시 볼 적마다 가슴 한 켠이 웅웅거린다. 어촌 마을의 보상금을 훔쳐 달아난 ‘판수 삼촌’과 지금까지도 혜화동 성곽 길 너머로 따개비처럼 쓸쓸히 맺혀 있는 창신동 마을과 그 마을에 얽혀 있는 철거의 사건과 또, 또 보상금과 협잡과 누군가의 앞잡이 노릇과 빚쟁이, 그리고 빚쟁이들…


그러면서 아예 잊힌 채 시간의 책갈피에 묻히어 썩어가던, 내 옛날의 파편들이 소생을 하는 것이였다. 보상금은 피와 눈물을 몰고 오는 돈, 대성장시대의 아픈 추억이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따위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이미 불러 있는 배를 두들기며, 자 이제 이 나라도 거뜬 설 때이다 하노라시던 어른들의 말 뒤편에는, 토지보상과 철거와 협잡과 앞잡이 노릇 따위의 것들이 추잡하게 매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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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루는 어느덧 커서 작은 섬유공장을 경영하게 되지만, 아 글쎄 이것도 도대체가 얼마나 갔겠는가. 섬유공장은 내 할아버님이 또한 몸담아 함께 커간 곳, 그때야 나라서 제일 가던 ‘제일모직’이었다지만 지금에는 이름마저 아주 낯설지 않은가. 97년 그때, 뉴스는 연일 파산으로 웅웅댔고, 그 많던 섬유공장들은 스러지고, 뭐 그랬단다. 공장도 쪼개지고, 가족도 반으로 쪼개지고, 뭐 그런 일이 많이도 있었단다.


오루의 공장이 쪼개지는 날, 하필 그날 아내의 부른 배로는 양수가 터져 나왔고 쌍둥이 딸이 첫 숨을 들이켰다. 부부로선 아예 모르고 있던 쌍둥이 둘째, ‘도손이’가 나오자 여태껏 오루의 서사를 함께 지나온 ‘아기새’는 첫 울음소리를 켠다. 이내 다시, 막은 쓸쓸한 소리를 머금은 현재의 바다. 1막에서 날아 떠난, 삼베 옷의 새 무리가 돌아오고 ‘아기새’는 울음소리를 내며 ‘오루’를 재촉한다, 가자고. 다음의 서사로 떠나자고 말이다. 그러나 오루는 이 기억의 여정을 여기, 쌍둥이 딸이 태어난 시점에서 멈추고 싶다.


새 무리는 얼마 안 있다간 다시 파드득 날아가고, ‘아기새’는 무대에 마련된 소주병 앞으로 ‘오루’를 거듭 재촉한다. 버티는 오루, 아기새는 머리로 부딛으며 떠민다. 그때 아내가 소주병 앞으로 와서 앉았다. 2014년, 오루는 소주병 앞에 앉음으로써 여정을 계속한다.


아내가 요즘 어떠냐고 묻는다. 오랜만에 만난듯한 둘. 팍팍한 생계 이야기를 인사처럼 주고받는다. 딸이 곧 온단다. 아내는 남은 일이 있어 먼저 자리를 떠나고, 둘째 딸 ‘도손이’가 드디어 무대에 등장한다. 줄곧 ‘아기새’의 연기를 하던, 그 배우다. ‘오루’도 그를 인지해서인지 멈칫하였으나, 왜 그러냐는 딸의 말에 정신을 차린다.


딸은 ‘천의무공’이었다는 아빠에게 ‘천사의 날개옷’이라는 옷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한때 천의무공, 그러니까 ‘천 개의 옷에도 바늘구멍 하나 내지 않는’ 명장이었던 오루는 이제 그와 상관없는 용접일을 한다지만, 그래도 못내 걸리는 게 있어 그러마 약속을 한다. 까닭인즉, 쌍둥이가 날 줄을 몰라 애기 배냇저고리를 첫째 딸 ‘오손이’의 것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날, ‘도손이’의 선물로 건네주려고 지어온 ‘배냇저고리’를 오루는 다시 들고 돌아온다. 부탁받은 바대로 옷에다가 날개를 덧달아주려 말이다. 비록 마음이 바뀌어 배냇저고리는 첫째 딸 ‘오손이’ 켠으로 전달하고, 날개옷은 다음에 새로 만들어서 주마 하였지만, 그 날이 둘째 딸 도손이와 만난 마지막 날이었다는 것을 오루는 이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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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손이가 입고 있던 교복 위에다가 내내 입고 있던 날개옷을 덧입고서, ‘아기새’는 다시 무대 위로 나타난다. ‘아기새’는 내내 도손이었고, 그 애가 입고 있는 새 같은 날개옷 안에는 오루가 지어준 ‘배냇저고리’가 들어 있었다.


 

“다 본 거야?

반은 죽고 반만 살아있는, 아빠를 다 본 거야?

무덤 속에 살고 있는 아빠를 본 거야?”

 


울먹이는 오루의 곁으로 와서, 새는 생글생글 웃는다. 그리곤 날개옷을 다시 입고서 무대 너머로 날아가 버린다. 어느새 다시 ‘삼베 옷의 새 무리’들은 무대 한구석에 박제된 듯 그 자리 그대로 멈춰 있다. 파도 소리 잔잔히 다시 들리고, 쪼그려 앉은 오루는 멀거니 객석 너머를 바라보다간 일어선다. 도손이 새는 곧 다시 무대로 나와서 다리를 절뚝인다. 첫 장면 그대로 말이다. 오루는 그를 새로이 발견한다. “예쁜 새네?” 그리고 2020년, 암전.


**


딸, ‘도손의 혼’이 다 보았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다 보았다. 반은 죽고 반만 살아간, 무덤 속을 살아간 어느 사내의 이야기를 말이다. 5살에 부모를 여읜, 그 딱한 아이의 앞에서 마을 사람들은 제 욕심에 분분했다. 생계가 팍팍하다는 이유로. 그래도 저어기 ‘새섬’에서 부모가 살아가고 있다며 위로하는, 어른들의 급급한 변명과 얼토당토않은 미신을 그는 당차게 찢어낸다. 산 사람을 억지 위로하고, 체념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구시대의 미신적 사고방식은 그에게 기능하지 못했다. 물론, 그가 저주받은 돼지의 미신과 죽은 자의 땅이라는 환영을 찢음으로부터 더욱 나아가, 완벽히 정복해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완벽히 정복하지는 못했으나, 어땠든 과거의 일은 찢고 잊어냄으로써 ‘거기’ 두었다. 과거를 과거에다가 가만 두고서 그는 삶을 진척시켜 가정을 이루고, 사업을 이루었다. 이제 삶은 개척되는 성질의 것, 그의 삶은 계속이 나아가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또다시 바람이 불어 들었으니, 은행에서 내건 구조조정 조건을 위해서, 공장을 살리기 위해서, 가족 같던 공장 식솔을 자르던 그 순간 그는 선언했다. “지금부터 나는 반은 죽고 반만 살아간다”고. 그걸로도 모자라 운명은 가혹히 그에게서 또 많은 것, 태봉이와 가정과 막내딸까지 빼앗아가는데, 그렇다면 그의 삶은 과연 언제 죽은 것일까?


아무래도 공장이 찢어지기 직전까지, 그의 내면에 벅찬 것들이 적층된 것이겠다. 5살에 부모를 여의고부터 겪어온, 많은 벅찬 것들이 그에게 잊을 수 없되 잊어야 하는 것들로서 쌓여왔고 마침내 해고통보의 순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선언한 것이다. 이것은 모진 자기 삶과 운명에 대한 대결 의지를 끝내 포기하는 행위였을까? 혹은 벅차기만 한 생의 바람 앞에 비로소 꺾여버리는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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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베 입은 새의 무리, 박제된 듯 멈춘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아기새’는 피어났다. 그 삼베 무리는 ‘새들의 무덤’. 무덤이다. 삼베는 초상 初喪의 의복, 삼베 입은 새들의 무덤 안에서 죽은 막내 딸 도손은 환영처럼 피어난 것이다. 이제 기억을 이끌어 과거로부터의 시간을 타고 달려온 그 아기새, 딸의 혼은 아버지의 서사를 다 알까. 안들 무엇할까, 딸이 소생하야 아버지 무릎을 그러잡고 엉엉 울며 이제 다 알았소-, 하지 않는 이상에야 안들 무엇할까. 것도 아니면, 딸에게 한없이 애닯은 어른의 이야기를 다 풀어헤친 다음에 부모 마음이나마 편할까. 편할 리야.


희망.

공보물은 이 이야기가 희망을 꿈꾸는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그럴까, 정말? 마지막 장면은 일종의 ‘루프’, 회귀구간이다. 서사가 진행되어 가면서 다리를 절던 새는 차츰 성장해 마침내 날아갔다. 주인공의 서사가 진척되는 동시에 새의 성장은 진행되었고, 서사가 끝나는 동시에 성장을 마친 새는 훨훨 날아가 오루와 이별한다. 그것을 오루가 딸에 대한 미련, 나아가선 애환으로 점철된 자기 생에 대한 회한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낙관적으로만 해석하기에는 차후의 희망적 대안이나 주인공의 극적 변화가 부재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새는 곧 다시, 다리를 저는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했다. 그리고 처음 새와 만난 그 장면으로 막은 회귀한다. “예쁜 새네?” 오루가 다손이 새를 처음 만났을 때와 꼭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오루가 이 기억의 순환 속에 갇혀 있다고 해석하게 만드는 장면. 이 연극의 서사가 무한회귀하는 것인지, 계속이 나아가는 것인지를 판가름하기 위해 가장 집중한 그 찰나, 눈을 홉뜨고 작은 실마리를 찾으려는 찰나, 그러니까 첫 장면으로의 회귀와 만남의 직후에 막에는 암전이 내린다. A-B-C-A의 구조, 나로서는 이 서사가 닫혔다고,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회한을 가득 안고서 오랜만에 찾아온 저주받은 고향 바다에서, 내 딸 같은 어여쁜 작은 새를 보고서 기억을 더듬어본 것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다시 만난 “예쁜 새”에 대하여 오루에게는 어떤 의식도 태도도 없었다. 마치 일전의 모든 일, 그러니까 도손이 새와 함께 걸어온 가슴 아픈 여정을 아주 망각한 듯 말이다. 막 방금 딸의 환영을 새처럼 날려보낸 이가 딸을 똑 닮은 또 다른 예쁜 새를 보고 덤덤하듯, 또 무감하듯 “예쁜 새네”라고 말을 건네는 일이란 역시 어려울 일이다.


정말이지 그 발언은 1막으로부터 여정을 밀고 나아온 다음, 여태 여정의 기억을 안은 채 담담히 읊조리는 것이라기보단, 아주 망각한 것, 혹은 1막으로의 회귀를 예고한다. 연극은 1막으로 돌아오고, 관객인 나는 ‘여기는 연극의 끝, 그리고 이 서사의 시작’임을 느낀다. 그렇다면 이것이 부르는 것이 희망일까? 차라리 내겐 풀 길이 없어 안아내야만 하는, 숙명 같은 생의 기억과 그에 얽힌 질긴 애환으로만 다가온다. 얼마간 앓으면 잊힐 것이냐. 잊힐 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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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적 관점으로는 위와 같이 읽는다. 한편 외재적 관점으로 바라보자면, 지나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1900년대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기념하고, 박제하는 작업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 소재는 문예에 있어 참 ‘잘 된’ 소재, 또한 참 많은 이들의 애환으로 남은 사건,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시키기가 어려운 소재이기도 하다. 차후 태어나고, 또 계속이 태어날 후대 後代에 대하여 말이다.


이 ‘잘 된’ 소재는 과연 문학에서도, 요즈음엔 연극에서도 자주 접하게 된다. 자칫 몰이해만을 낳고 실패하는 경우를 본 바도, 그러므로 잦다. 그러나 나는 참으로 즐거운 마음만을 가지고서 여기 객석을 떠난다. 짧은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가 그의 운명을 굳게 삼킨 까닭이 아니었던지. 아 글쎄, 내 아버지가 똑 그러시더라는 것이다.


중년의 두 사내는 애닯기만 한 자기 생애와 운명에 대해 침묵했다. 나의 당신께서는 풍파가 다 지나고서, 사업이 다 괜찮아지고서, 그런 와중에 아기새는 장성하여 막 둥지를 떠나려고 할 때, 마침내 그때에나 이 ‘잘 된 서사’를 기쁜 우리 추억처럼 읊으시더란 것이다. 비록 술은 못 자시지만 애환은 안주 같아, 질겅 씹으시며 우화화- 웃어 보이시더란 말이다.


오루 또한 자신의 운명에 대해, 어디 하소연 한번 하지를 않았다. 굳게 잠긴 입속에서 딱딱히 굳어가는 검은 혓바닥은, 그저 무력한 자신에 대한 책망을 머금곤 굳게 잠긴다. ‘내 삶은 왜 이러지?’ 하는 투의 흔한 독백 하나 없이, 자신의 죽음을 툭 내뱉곤 그의 입은 다시금 침묵 속으로 가라앉더라는 것이다. 묵묵히 짊어지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고향 바다가 대신 울고, 또 내가 대신하여 슬플밖에. 슬픈 것이 슬프게 읽히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그 스스로는 슬프지 아니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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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로서는 이런 다 지난 옛이야기를 접하자면, 그때 내 고장과 어른의 사정과 그때의 삶과 이야기들이 까마득한 전설처럼 흘러 나린다. 그러니까 이제는 아주 잊고 살던, 그 옛날의 이야기들과 이제 없는 내 할아버님과 섬유공장, 아부지와 어무니와…… 뭐 그런 것들이 물큰 떠오른다는 말이다.


그래, 옛날이야기를 듣자면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 가압류 딱지의 짙붉은 색과 매년 피오르는 누-런 벼와 한없이 서글프고 파아-란 이야기가 감돌던 시절이. 1900년대는 문예에 있어서 참 좋은 소재렷다. 가만 들추어 보기만 해도, 서글픈 비애가 우수수 쏟아지는 그때 그 시절이란. 가서는 돌아오지 않을 시절, 시대에 슬픔 마르는 날이 오랴마는, 그래도 다시 오지 않을 이 시대는 괜시리 더욱 아련하다. 다만 망각으로 승화되어가는 이 기억이 두려운 일이로되 연극은 이정표라, 오래도록 거기서 추억하기를. 그러면 나는 그를 따라 돌아올 것이다. 망각의 풀이 자라나는, 여기 지나버린 시대 時代의 무덤에 나는 이따금 돌아올 것이다. 새 시대 時代의 손을 잡고서.

 

 

잘 된 연극,

새들의 무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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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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