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노트 Sigak] 부록. 불안과 나 그리고 미술

질문, 그 이후 나만 하던 이야기
글 입력 2020.10.23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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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와이어스, Above the Narrows, 1960

 

: 마음이 헛헛해서 괜히 집에 있는 책들을 뒤적거리다 우연히 그를 '다시' 알게 되었다. 조금의 시간을 내어 그의 작품들을 찾아보았다. 그가 그린 뒷모습들에 시선이 머물렀다. 좋았다는 의미였다. 조금의 시간은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 새롭게 기억된, 좋아하는 작가가 마음 헛헛한 그곳에 스며들었다.

 

 

“요즘의 나는 나를 정의하지 않는다.” 만남을 앞두고 인생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말이었다. 단번에 이해하기에는 모호한 문장. 지금 이 문장을 느슨하게, 그리고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려 한다.


딱 미래가 고민스러운 나이에 이르렀다. 다만 그것이 내가 삶에 있어 필요한 시기라 생각해서 시작한 고민인 건지, 사회가 그렇게 강요해서 시작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우스갯소리로 대학교 ‘死학년’이다. 꽤 최근까지도 머리가 지끈거리도록 진로, 직업, 미래, 계획, 삶의 단계 같은 것을 고민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분명 살아가는 데에 있어 필요한 고민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고민 뒤에 따라오는 더 거대한 것들을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회가 말하는 ‘미래에 도움이 되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이 일이 내 미래에 도움이 될까?”, “이걸 할 바에는 취업에 도움이 되는 걸 더 많이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결국 돈도 못 벌어다 주는 쓸모없는 일이 아닌가?” 내 일상을 견고하게 지탱해온, 좋아한다고 믿어온 익숙한 일들이 쏟아지는 의심에 멈춰 섰다. 고민은 기계처럼 ‘미래에 도움이 되는 무엇인가’만을 막연하게 반복하다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과로사했다. ‘미래에 대한 고민’을 그만두었다. 그러다간 정말 내가 해온 모든 것들이 무용지물이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의 삶이 멈출 것만 같았다. 너무도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오예찬이라는 사람에 대한 실마리 하나를 잡을 수 있다. 그는 ‘불안’이 지나치다. 그 자신은 이 실마리를 이렇게 해석했다. “나는 불안이 습관이구나!” 그때부터 일상 단위의 삶의 화두는 ‘불안’이 되었다. 불안을 떨쳐내 보려 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겨보려 했다. 왜 그토록 불안을 느끼고 통제하지 못하는 건지 파헤쳐보려 했다. 딱히 좋다 할 대답을 얻지 못했다. 나는 정답 하나 얻지 못한 이 여정을 이렇게 해석했다. “그냥 사람 자체가 불안으로 살아가는 게 아닐까.” 그 순간부터 나는 불안과 잘살아 보려는 고민을 시작했다. 운명이라면 운명인 이 삶의 동반자와 잘 살아가고 싶었다.

 

 

“(…) 예찬님의 인생관이 무엇인가요?”


“적어도 최근의 인생관을 요약하자면 ‘안정적인 상태로 살지 말자’는 거에요. 무작정 경제적 수단을 포기하거나 나를 방치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불안이 가진 에너지를 잘 활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러한 성찰 끝에 9월의 어느 날 내가 내린 결론 하나를 나누었다. 불안은 내게 에너지다. 끊임없이 의심하게 하고 성찰하게 한다. 머리 아프고 괴로운 일이지만, 불안이 없다면 이토록 치열하게 몸부림치지 않았을 것이다. 더 공부하지 않았을 것이고, 더 주변을 살펴보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더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대로 불안해서 쉬고 싶다는 마음도 접어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에 가득 차는 사람이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이쯤 되면 나는 불안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

 

“불안”


가끔 미술사는 미술이 미술을 향해 일으킨 끊임없는 극복과 성찰의 역사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가두는 틀을 끊임없이 확장하고 파괴하다, 마침내 모든 새로움을 향해 문을 열어 둔 가능성의 상태에 도달한 역사. 그런 미술사를 살펴보노라면 그 주체인 예술가들만큼 주어진 세상과 자신이 존재하는 시대에 쉽게 안주하지 않는 사람들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예술가들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의미를 소통할 수 있는 경계를 끊임없이 두드리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왔다. 예술의 그러한 특성은 위기에 순간에 더욱 빛을 발하곤 했다. 가령 실제 모습을 그대로 찍어내는 카메라가 등장했을 때다. 카메라로 인해 화가들은 오랜 시간 동안 그림으로써 성취해온 목적과 화가로서의 정체성이 무용해지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때 회화는 그저 카메라보다 비효율적인 것으로 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몇몇 예술가들이 ‘권총으로 물감을 터뜨린 것 같다’라는 등 거친 비판을 받아 가면서까지 기존의 회화가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히려 이를 기점으로 미술은 또 다른 새로움과 가능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미술사에 있어 중요한 변화를 일으킨 미술. 사물 그대로를 재현하는 것에서 벗어나 인간 눈에 비치는 빛의 인상을 함께 담아 그려낸 인상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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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인상 : 해돋이. 1872

 

: ‘인상주의자’라는 명칭이 일어난 계기가 된 작품. 당시 비평가들에게 ‘인상주의’는 '미완성 작품'을 의미하는 것으로 작품을 경멸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였다.

 

 

많은 예술가들이 작품이 만들어진 후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인정받는다. 그런 내용을 볼 때마다 예술가들은 현재를 살며 미래에 가장 가까이 맞닿아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인정받을 수 있는 예술을 해도 되었을 텐데, 그들은 세상에 없던 새로운 예술로의 도전을 자처했다. 자신이 본 세상을 자신의 예술적 언어로 말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소통하고 경험하기를 청했다. 그것을 창조하기 위해 완전한 정착 대신 정답 없이 끊임없이 사유하고 성찰해야 하는 상황에 자신을 스스로 밀어 넣었다.


그런 이들을 통해 태어난 작품들이 시대마다 다른 누군가의 삶을 위로하고 시대에 놓인 세상을 응시한다. 작품 하나로 사회가 들썩이고, 누군가는 감동적인 순간을 경험하며, 누군가는 새로움의 기쁨을 즐기고, 누군가는 전혀 모르던 세상을 마주한다. 그렇게 새로운 소통과 전환이 일어난다. 예술가가 품었던 의미가 세상에 전해지고, 서로 다른 관람객들이 읽어낸 다채로운 의미가 매 순간 일어나며 공존한다.


그래서 지난 미술의 궤적을 살펴볼 때마다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삶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남긴다는 것에 대해서. 정의될 수 없는 불안한 상태에 남아있으며, 그것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움직이고 창조하며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렇게 오늘날 예술은 한 문장으로 결코 정의될 수 없는, 완전한 정착 없이 앞으로도 변화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되었다.


그러기에 “미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막연한 것이다. 미술은 모두에게 다른 의미와 가치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대신 이런 질문이 더 흥미로울지도 모른다. “무엇이 이것을 예술로 만드는가?”


이렇게 쓰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막연한 것이다. 삶은 모두에게 다른 의미와 가치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대신 이런 질문이 더 흥미로울지도 모른다. “무엇이 나의 삶을 만들고 있는가?”


내가 미술을 좋아하는 이유 하나가 지금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말 같지만, 나는 내가 나의 삶과 나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꼭 미술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


“요즘의 나는 나를 정의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데에는 이곳에 쓰인 것보다 분명 더 많은 이유가 얽혀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촘촘한 성찰 아닌 느슨한 성찰이다. 한편 나의 기억을 꺼내 보고 가만히 들여다보며 그 이유를 추적한다는 것에선 조금 더 깊은 성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글은 지금 이 순간에 무엇이 나의 삶을 만들고 있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어떤 가능성을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본다. 이 글은 그 과정의 기록인 동시에 하나의 결과물이다. 또는 작품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이란 명칭은 내가 품고 싶은, 혹은 품고 있는 어떤 가능성을 의미하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내가 쓰는 글은 그런 것이다. 스스로를 의심하고, 불안한 상태에 머물기를 자처하면서까지 계속해서 ‘나’라는 사람을 글로 써내는 이유가 이곳에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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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세르 우리, Woman at writing desk, 1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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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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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kamelo
    • 평소 속독이 습관인 저에게 예찬님의 글은 느리게 흘러갑니다. 글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곱씹고 싶어서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불안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죽지 않기 위한 불안, 남들과 달라지지 않기 위한 불안, 좀 더 행복하기 위한 불안, 좀 더 우월해지기 위한 불안, 나의 존재가 지워지지 않기 위한 불안까지, 다양한 불안이 사람들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불안에 기인한 행동은 다양합니다. 취업을 준비하는 이들은 경쟁을 준비하고, 각종 자격증과 시험을 준비합니다. 또한, 누군가의 불안은 애착 대상을 찾도록 움직이게 만들죠. 예술가도 마찬가지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불안을 해소하면 무엇을 얻을까요? 같은 불안 속에서 움직이는 우리들은 다른 행동으로 다른 결과를 얻어냅니다. 우리는 어떤 불안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지, 삶 속에서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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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삐까쯐
    • 저에게도 불안이 어느새 습관이 된 것 같습니다. 왜 습관이 되었느냐를 돌아보면, 예전부터 경쟁과 성공, 공급되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수행해나가야 한다는 교육 방식에서 비롯되기도 한 듯합니다.

      그러면서도 불안을 어떻게하면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을지에 대해, 예찬님의 글을 읽으며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항상 불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데 예찬님 글을 읽고 이와 공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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