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보다 조금 더 먼

내가 미워하는 <단지 세상의 끝>에 관하여
글 입력 2020.10.22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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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예술은 이해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자살을 모른다>의 저자 임민경은 다자이오사무의 <인간실격>을 통해 자살을 설명하며 이렇게 썼다.


이 책의 원고를 준비하던 중 마침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낭독회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는데, 낭독회가 끝난 뒤 질문 시간에 “사실, 읽으면서 주인공이 정말 답답했다”고 고백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번역가 선생님께서는 “만약 책의 주인공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지금 인생을 정말 잘 살고 계신 것”이라고 답하셨고, 이에 모두 함께 크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다자이 오사무의 글이 고통스럽거나 혼란스러운 처지에 있는 사람의 마음에 와닿는 글이라는 뜻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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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자비에 돌란의 영화를 통해 <단지 세상의 끝>을 처음 접했다. 당시 스물 한 살이었던 나는 명색이 불문과임에도 역시 프랑스 영화는 나와 안맞는다며 명쾌한 결론을 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3년 후인 2019년, 스물 네 살이 된 나는 극단 프랑코포니의 공연으로 다시 <단지 세상의 끝>을 접했다.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가족 구성원들의 이야기, 가족들에게 끝까지 이해받지 못하는 이야기가 눈에 보였다. 그게 무슨 감정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불문과 동기들과 왁자지껄하게 극장을 나서며 금방 잊어버렸다. 그리고 저번주, 희곡 낭독 모임에서 <단지 세상의 끝>을 다시 읽었다. 정신없고 말많은 텍스트에서 내가 보였다. 동생이 보였다. 애인이 보였다. 친구가 보였다. 나는 그 텍스트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게 된 내가 싫었다.


주인공 루이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10년 동안 방문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집에 방문한다. 어머니, 어머니와 살고 있는 여동생 쉬잔, 형의 방문을 듣고 집을 찾은 남동생 앙투안과 거의 얼굴을 보지 못한 앙투안의 아내 카트린이 루이를 맞는다. 너무 오랜만에 루이를 본 네 식구는 루이에게 그간 못다한 말을 쏟아낸다. 루이는 자신의 불치병을 고백하지 못하고 다시 가족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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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세상의 끝>은 작가 장 뤼크 라갸르스의 자전적 희곡이라 평가받는다. 극 중 주인공 ‘루이’는 불치병을 앓는 작가로 등장하는데, 장 뤼크 라갸르스 또한 배우이자 작가로, 37의 나이에 에이즈로 요절한다. ‘루이’는 명백히 작가 자신을 투영한 주인공 임에도 그를 묘사하는 작가의 태도에는 담백한 지점이 있다. 루이는 주인공이지만, 루이의 대사 비중은 다른 가족들에 비해 적다. 독백이 10장이나 이어지는 가족들과 달리 등장 독백 이후 루이의 심정은 가족을 통해 묘사되는 루이의 모습, 말없는 루이가 간간히 뱉는 대사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자기연민은 찾아볼 수 없다.

 

작가가 텍스트를 절제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어머니, 쉬잔, 앙투안, 카드린이 루이에게 뱉는 요구사항, 루이에게 뱉는 불만을 가장해 사실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뱉는 불만은 각 인물마다 10장에서 최대 15장에 이르는 독백으로 표현된다. 인물마다 이어지는 이 독백은 <단지 세상의 끝>의 형식적 특징이다. 서사를 뒷받침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는 모두 이런 독백을 누군가 앞에서 해보았기 때문이다. 이해받고자 하는 사람, 그런데 나에게 통 관심이 없는 것 같은 사람 앞에서 우린 누구든 이런 정신없고 한심한 독백을 한다.


쉬잔은 작가이자, 자신과는 다르게 일찍 집을 떠나 도시에서 사는 오빠 루이를 동경한다. 루이가 자신과 가족을 얕보진 않을까 걱정하고, 루이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려 노력하면서도, 한편으로 가족과 가까워지려 노력하지 않는 루이를 책망한다. 문제는 쉬잔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딱 한번 뿐이라는 점이다. 쉬잔은 동경, 인정욕구, 불안, 책망, 사랑을 마구 섞어 루이에게 10장짜리 독백으로 쏟아낸다. 그러니까 이 독백은 형식이면서 서사를 위한 장치다. 쉬잔을 비롯한 가족들이 얼마나 루이를 사랑하면서 증오하는지, 그 감정이 얼마나 복합적인지 보여준다. 그저 지루한 동어 반복이 아니다.


이런 애증의 감정을 나도 겪었다. 내가 첫째 딸로서 성인이 됐을 때, 부모님은 나에게 동생들과 당신들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장녀로서 내가 마땅히 그래야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부모와 동생 사이에 섰고, 결국 대차게 실패했다. 그리고 루이만큼 길진 않지만 한참을 본가에 내려가지 않았다. 내가 가족을 사랑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만큼 거북한 마음도 컸다. 난 내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본가로 내려가는 횟수가 적어질수록 가족들의 나에 대한 기대와 동경은 커져갔다. 난 처음으로 가족들과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별다른 노력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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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난 내가 좋아하거나 인정하거나 인정받고 싶은 사람들을 모아 서울 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최대한 가까이 가려고 노력했다. ‘서울 가족’ 앞에서 난 무엇이든 말할 수 있었고, 말할 수 있어야만 했다. 가족은 그래야하니까. 그들 앞에서 이해받기 위해 쉬잔만큼 독백이 길어진 날도 있었다. 가장 외로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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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는 결국 3시간만에 집을 떠난다. 그리고 죽는다. 가족들에게 자신의 시한부 인생을 밝히지 않은 채로. 작가는 루이를 통한 자기연민 없이 주인공과 가족들 사이의 일을 사실대로 서술한다. 난 영화를 다시 보며 루이에게 화가 날 지경이었다. 자신을 이해시킬 노력을 저렇게도 하지 않다니. 저렇게 여유롭고 과묵할 수 있다니. 한편으로 쉬잔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왜 그렇게 이해받고 싶어? 왜 그렇게 인정받고 싶어? 저 사람이 뭐라고? 둘 다 내 모습이어서 그랬다.

 

가끔 그런 예술을 마주친다. 이 예술을 이해할만한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예술이다. 이렇게 정확히 나를 간파해서 미워할 정도의 예술을 당신도 만나길 바란다.

 

 

[유보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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