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영화가 사랑한 얼굴들

이태경, 한혜지, 김예은, 강길우 배우에 대한 단상
글 입력 2020.10.22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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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OTT의 문턱에서 매번 고민한다. 영화냐 드라마냐 그것이 문제다. 하지만 그 무엇도 당기지 않을 때, 호흡이 긴 영화도 싫고 여러 회차가 있는 드라마도 싫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단편영화를 찾는다. 기본 20~30분 정도로 만들어지는 단편 영화의 매력은 짧은 호흡이다. 대중 교통을 이용하며 잠깐씩 보기도 적절하다. 한정된 예산과 공간으로 제작해야 하는 터라, 볼거리가 화려한 장편 영화들보다는 배우의 얼굴에 집중하는 것이 단편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다. 이제 화면 위에 펼쳐지는 단편 영화 배우들의 얼굴을 살펴보자.

 



탱탱볼 같은 얼굴, 이태경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탱탱볼처럼 이 배우의 얼굴과 연기는 어디를 향할지 모르겠다. <신기록>에서는 경찰공무원 준비생,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는다>에서는 동성 애인과의 풋풋하고 귀여운 사랑을 하는 윤성, <드라이빙 스쿨>에서는 거짓말을 수습하기 위해 꼭 운전 면허를 따야 하는 도로 주행 7수생 선, <육체의 고백>에서는 사랑하는 남자친구에게 가학적인 벌을 내리는 이나로 변신한다. 카멜레온처럼 전혀 다른 스타일의 역할도 이질감 없이 척척 소화해낸다. 때론 진지하게, 어쩔 때는 가볍게, 가끔은 코믹하게 풀어내며 말이다. 그의 얼굴은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예측이 불가능하기에 다음 동작, 다음 행보를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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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경 배우의 이색적인 매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는 <육체의 고백>이다. 이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기두는 자신이 잘못을 할 때마다 고통을 주라고 한다. 이나는 매일 고해성사 시간을 갖고 그 말을 충실히 지킨다. 어느 날 기두의 송곳니가 없어지자 이나는 다른 여자와 키스하다가 빠진 게 아니냐며 송곳니를 찾아 헤맨다. 송곳니를 찾은 곳은 자연사 박물관. 기두를 바람을 의심하며 엽기적으로 고문한다. 코믹한 소재를 허투루 다루지 않고 끝까지 파고 들어가 처음엔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신선함으로 바뀌었다. <육체의 고백>에서는 배우 이태경의 진지하면서도 장난스러운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실타래 같은 얼굴, 한혜지


 

엉킨 실타래를 풀며 속시원하게 끝나는 영화가 있는 반면, 엉킨 실타래를 직시하며 끝을 맺는 영화도 있다. 한혜지 배우의 얼굴은 후자에 가깝다. <면도>에서 남자 동료에게 소개팅 상대의 인중이 거뭇했다는 농담을 들은 민희는 자신의 인중도 신경 쓰여 면도를 하다 상처가 난다. 상처난 곳에 밴드를 붙인 채 동료를 바라보는 민희. 왠지 모르게 씁쓸하다. 김현정 감독의 <입문반>에서는 그보다 더 복잡하다. 의성에서 서울까지 먼 거리를 오가며 시나리오 수업을 듣는 가영은 익숙하지 않은 공간과 사람들에 흡수되려고 무던히 노력한다. 자신의 자존심이 짓밟히고 있는 줄도 모르고. 영화 말미에서 가영은 고민이 새까맣게 모여 있는 얼굴을 하고 직설을 토해낸다. 배우 한혜지의 얼굴은 섬세하게 얽혀 있는 실타래를 바라보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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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복잡 미묘한 매력을 극대화한 영화는 <수작>이다. 능숙한 사이비 전도사와 초보 설문조사 알바생의 밀당을 볼 수 있다. 이야기의 주도권을 잡아가던 현지는 극 후반 남자에게 역전당한다. 능숙한 그의 상담실력과 입담에 넘어가 자신도 모르게 과거사를 털어놓는다. 사람들에게 다가가느라 늘 웃고 있던 현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는다. 카메라는 꽤 오랜 시간 현지의 모습을 비추며 서서히 클로즈업한다. 그의 얼굴은 밝음과 어두움, 그 사이를 정확하게 집어낸다. 감정을 터지지 않게 꾹꾹 담아내 얼굴에 드러낸다. 한 마디로 정의하긴 어렵다. 그가 던져준 실을 테세우스처럼 따라가다 보면 어딘 가에 닿게 될 것이다.

 

 

 

‘내게 무해한’ 얼굴, 김예은


 

마음이 시끄러울 때 강물을 찾는 것처럼, 가끔 쏟아지는 이미지에 지칠 때 김예은의 얼굴을 찾는다. 투명하고 맑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면 내 마음까지 맑아지는 느낌이다. 이미 헤어진 부부가 완벽하게 관계를 청산하러 법원에 가는 길을 그린 <구의역 3번 출구>도 그렇다. 자칫하면 감상적이고 무거워질 수 있는 이야기를 술 한 잔과 함께 귀여운 티키타카로 풀어낸다. 보는 내내 미소를 띄게 되고, 질척거리는 술주정도 용서가 된다. <말하지 않으면>에서는 깨지기 쉬운 유리구슬처럼 예민한 표정을, <야간 근무>에서는 외국인 근로자와 격없이 어울리는 천진한 표정을 볼 수 있다. 배우 김예은의 얼굴은 상처를 줘도 상처로 다가오지 않을 것 같은 무해한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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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무해한 영화는 김현정 감독의 <은하 비디오>다. 비디오 가게를 운영하는 은하는 가게 처분을 앞두고 있다. 그는 옛 연인에게 연체된 비디오를 반납해달라는 구실로 연락을 시도한다. 200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한 영화 덕에 비디오에 실컷 둘러 쌓인 김예은의 얼굴. 그 공간과 얼굴이 주는 사실감으로 나도 함께 그곳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시절을 제대로 만끽하지는 못했지만 분위기에 취해 “그땐 그랬지”라 중얼거리게 될 것 같은 느낌. 시골 배경과 이태리의 얼굴이 잘 어우러졌던 <리틀 포레스트>처럼 2000년대 배경과 김예은이 얼굴이 착 붙어 평온함을 가져다준다.

 

 

 

도화지 같은 얼굴, 강길우


 

인상이 강하진 않는데 기억에 오래 남는 얼굴이 있다. 강길우 배우의 얼굴이다. 물론 그가 다작을 해서이기도 하지만, 그의 도화지 같은 얼굴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밋밋한 도화지에 눈빛으로 붓칠하고 새로운 색을 입혀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한다. <명태>에서는 한글 교실 선생님에게 고마움을 보답하는 조선족 김수의 순수한 얼굴을, <시체들의 아침>에서는 어린 학생과 티격태격하는 새침한 표정을, <소풍같이>에서는 엄마에게 무심한 아들의 재수없는 눈빛을 볼 수 있다. 특히 <소풍같이>의 후반에는 착잡한 표정의 얼굴에 빠져들게 된다. 배우 강길우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30분짜리 단편 영화를 보면서도 팔레트에 늘어진 다양한 색을 경험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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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새처럼 다양한 색을 가진 그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고려해야 할 작품은 <시체들의 아침>이다. 성재는 1000편 이상 소중히 모은 DVD를 일괄판매 하려 글을 올린다. 10대 영화광 민지는 글을 보고 잽싸게 반응한다. 한 영화만 콕 집어서 팔아 달라는 민지와 일괄 판매만 가능하다는 성재. 못 이기는 척 져줄 수도 있지만 절대 안 된다며 단호하게 째려보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영화는 같이 영화를 보자는 민지의 권유에도 할 일이 있다며 거절했다가 이내 힐끔거리며 영화를 보는 순수함에 이어, 자신의 꿈을 이어받아 성장하길 바라며 응원하는 눈빛으로 마무리한다. 29분의 상영시간이 빈틈없이 알차게 채워진다.

 

*

 

단편 영화 세 편을 모은 <마음 울적한 날엔>에서는 김예은, 강길우, 이태경 배우의 얼굴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이들이 더 많은 단편을 찍을지 아니면 장편 영화로 저변을 넓혀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나 그 얼굴들을 기억하고 응원할 것이다.

 

 



[임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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