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허물어진 경계 사이에 총을 내려 놓으며 - 웃기는 어둠 [연극]

글 입력 2020.10.24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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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질적인 것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아도 분명한 경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더라도, 양면성의 전제에는 어떠한 경계가 존재한다. 그 경계를 기준으로 자신을 위치시키고, 타자를 판단하고, 상황을 분류한다. 나 역시도 흐릿한 경계들 사이 내 좌표를 찍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 경계라는 것이, 정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연극 <웃기는 어둠>은 한 곳에 공존하기 어려운 것들을 무대 위에 모아 놓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형태의 공연이었다. 경계를 허물고 침범하는 것을 넘어, 질문을 던졌다. 과연 이것을 떼어서 분리하는 것이 유의미한 일인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연극은 아주 직설적인 언어를 사용했지만, 상당히 은유적이었다. 대놓고 현실의 말을 하고 있으나, 현실적이지 않은, 그 애매한 줄타기를 공연 내내 이어갔다. 애초에 연극 <웃기는 어둠>은 무언가를 대놓고 던져주지 않았다. 느낌을 잡으려 하면 모순점이 드러났고, 흐름을 이해하려 하면 균열이 나타났다.


어느 것 하나 완벽히 공감하지 못하고 막을 내렸지만, 내 관극은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다. 연극 <웃기는 어둠>은 극의 모든 요소를 동원해 내 세계 안의 경계를 허물었다. 공연이 끝나고 난 후, 뭔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찝찝함보다 파괴에 대한 후련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어딘가 절대 갈 수 없는 곳에 다녀온 느낌이었다.


 

포스터_웃기는 어둠.jpg

 

 

 

타인(자신) 안의 낯선 자신(타인)



연극의 시작 부분에서, 현실로부터 밀림으로 점차 항해한다는 설정은 나에게 어느 정도 방향성을 제시했다. 문명과 밀림, 그 차이를 부각할 거라 생각했고, 나름대로 쌓아온 기억을 기반으로 나만의 사고방식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오히려 연극은 그 둘 사이의 끊어지지 않는 연결성을 강조하였다. 자연 안의 현실 안의 자연 안의 현실. 반복되는 뫼비우스의 띠에서 점점 그 경계는 흐릿해져 갔다. 당연히 현실과는 다를 줄 알았던 밀림 안에는, 가장 현실적인 것들이 있었다. 어쩌면 현실을 향해 항해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별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다. “문명”이 가진 대단함도, “자연”이 가진 대단함도, 결국 그 규정 안에서 만들어진 것들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였으나 문명의 경계 밖으로 밀어내 자연의 순수를 보장해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작품의 끝에 등장한 소말리아 해적은, 지금까지의 밀림이 실은 자신의 창자 속이었다고 말한다. 창자가 은유였는지, 밀림이 은유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자연과 문명, 그 뒤엉킨 것들이 사실 우리들 창자 안, 즉 인간의 본질이라는 사실만은 느낄 수 있었다.


관극 중 자신을 현실과 밀림, 여성과 남성, 대중과 소수자, 그 어느 쪽에 위치시키든 결국 연극의 끝은 자신의 창자가 될 것이다. 흐름에 몸을 맡길수록 더더욱 끝은 자신의 본질을 꿰뚫을 것이고, 어쩌면 그곳에서 낯선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무대(현실) 위의 현실(무대)



연극 <웃기는 어둠>은 관객에게 현실을 자각시켜주는 것보단, 현실과 극을 그저 한 무대에 올려놓고 자유롭게 오가며 그 경계를 흐렸다. 때때로 연극에서는 이것이 연극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기 위해 여러 장치를 넣긴 하지만, 이 연극에서의 현실은 그것보다 조금 더 짙고, 조금 더 어색했다.


어디까지 현실이고 어디까지 연극인지에 대한 구분이 없었다. 뜬금없이 등장한 작가는 자신의 현실 가족과 대화하는 동시에 극 안의 인물과도 대화하였다. 극이 진행되는 데는 오히려 방해 요소였다. 그는 내가 상사와 하사의 이야기에 감정을 이입할 즈음, 등장하여 감상을 파괴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나의 좌표를 찍는 것이 작가의 등장으로 완벽히 차단당하였다. 나름의 감정선을 갖고 극에 집중하고 있었고, 하사는 이렇고 상사는 저렇다는 식으로 나는 입장 정리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이들의 맥락을 가장 잘 이해하고 파악하였을 때에 작가가 등장하였다. 당장 그 몰입을 멈추라는 듯이 말이다.


 

 

의미(무의미)의 의미(무의미)



나는 연극을 볼 때 항상 입장 정리를 하며 본다. 초반부터 흐름을 잡고, 어떤 방향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따라갈지 계속해 생각한다. 당연히 연극 <웃기는 어둠>을 볼 때도 그 방향성을 열심히 잡았었다. 1막까지만 해도, 나는 상당히 소말리아 해적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고, 두 해적의 마음에 공감, 연민, 안타까움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2막에 들어서서, 옴니버스 형식인가 싶은 마음으로 다시 집중하였고, 점점 진행될수록 나의 흐름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연극 <웃기는 어둠> 속 모든 장치가 적극적으로 내가 가진 생각들의 경계와 위치를 무너뜨렸고, 흐름을 끊었다.


그런데도 내가 이 관극을 성공적 관극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그 자체가 이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는 생각 때문이다. “웃기는 어둠”, 제목부터 역설적인 이 연극이, 나의 모순을 지적하고, 나의 본질을 드러냈다.

 

*


관극에 있어서도 나는 이토록 많은 의미부여와 가치판단을 하는데, 삶을 대하는 태도 역시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하지만, 그 객관성에도 어느 정도의 무게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갑자기 연극에 현실요소가 들어온다고 그 판단에 금이 간다면, 이 역시 완벽한 판단이 아니란 뜻일 테다.


극 중 가장 공감이 가던 하사의 사고방식에도 분명한 모순점들이 존재했고, “3+24-3=24”라는 식에 정답을 외치는 중령의 모습도 썩 똑똑해 보이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상사의 말엔 사실은 틀린 점이 없었으며, 가장 현실적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생각들은 내가 기존에 부여한 의미들을 퇴색시켰다. 이미 우리의 현실엔 너무 많은 모순점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우린 자주 길을 잃는다. 경계를 쌓아봐야 애초에 본질은 자신에게서 찾아야 할 점일지 모른다. 현실의 어둠, 타인의 어둠, 당신의 어둠 이전에, 내 안의 어둠부터 마주해야 한다.


 

웃기는 어둠 이미지3.JPG

 


이제는 어둠이 우스운 지경이 되었다는 상사는, 밝은 조명과 함께 순수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해적에게 “이곳엔 네가 찾을 게 없어”라며 떠나길 당부하고, 그를 살해했다. 어둠이 익숙한 자는 순수를 저 멀리의 경계로 분류하고, 그것이 자신의 영역으로 침범하는 것을 겁낸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 경계는 익숙함에 비롯된 것 같다. 상사의 삶의 태도, 그것이 어둠과 너무 익숙했기 때문에 희망과 순수에 대한 적대감이 생기고, 자신과 해적이 한 무대에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테다. 마치 현실과 연극이 공존하는 <웃기는 어둠>의 무대 위에서 연극을 방해하는 작가를 끌어내고 싶었던 내 마음처럼 말이다.


뒤엉키기 어려운 모든 것들을 한 곳에 올려 두고, 억지로 흐름을 부여했을 때 느껴지는 그 이질감. 내가 지금껏 살면서 쌓아온 수많은 데이터와 눈앞에 보이는 것이 일치하지 않을 때 생기는 어색함. 자꾸 익숙하지 않은 것은 틀렸다고 치부하고 무대 밖으로 밀어내려는 나의 사고방식. 그 모든 것을 다시 바라볼 수 있었다.


내 삶을 무대 위에 세팅했을 때, 내가 설정한 경계 밖의 낯선 것들이 내 무대를 침범한다면, 나는 상사가 그랬듯 그것을 향해 총을 쏘았을 수도 있다.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순전히 내가 축적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판단했을 뿐이다. 시작부터 내 사고를 허물던 연극은, 결말에서 완전히 그 틀을 부수었다.

 

*

 

웃기는 어둠. 그 웃음이 조소일지, 역설일지, 해학일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웃음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무언가를 또다시 무대 밖으로 밀어내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 안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저 내가 내 삶을 기반으로 정의를 내려 하는 거라면, 나는 총을 내려놓고 의미부여를 포기하고 싶다. 왠지 이 연극에 대해서는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생각이 꽤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 보면, 나는 그동안의 총질에 지쳐있었나 보다.


때로는 경계 너머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그저 두는 것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

 

 

 

최은희.jpg


 

[최은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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