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무미건조한 현대인들에게 [문학]

은희경 소설가 '새의 선물'을 읽고
글 입력 2020.10.16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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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 물론 그중에서 진짜 나는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바라보는 나'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 나'이므로 '바라보는'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킴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 p.23

 

 

연극은 생각보다 철저하다. 관객들이 학교, 회사, 사교 모임을 포함한 곳곳에서 ‘보여지는 나’를 물어뜯을 동안, ‘바라보는 나’는 끊임없이 디렉팅을 내린다. “조금 더 웃어, 동요하지 마, 곤란한 티를 내!” 이보다 열정적인 감독이자 배우가 있을까? TV 드라마를 볼 때 사람들은 배우를 비난하지 말고 배역을 욕하라고 말한다.

 

그들은 연기와 현실의 분간이 어려울수록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다. 연극에 지친 배우들은 아무도 없는 빈 방에 들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바라보는 나’를 끄집어낸다. 대부분이 찢기고 헤진 ‘보여지는 나’에게 삼겹살에 소주를 사주거나 책을 읽히는 등 위로를 전하지만, 그마저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소위 자아를 분리하는 일에 능숙하다. ‘보여지는 나’는 말 그대로 꼭두각시이기 때문에 그 몸이 느끼는 감정들은 진짜 ‘바라보는 나’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 생활을 조금 해 본 사람들은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종종 “눈물 흘리는 법마저 잊었다”고 답한다.

 

어쩌면 그들도 진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망각했을지도 모른다. 보여지는 모습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혼자 있는 순간에조차 ’바라보는 나’를 불러내는 방법을 잊었을 수도 있다. 가슴은 답답한데 이유를 찾지 못해 응어리를 안고 살아간다. 그렇게 현대인의 연극은 지속된다.

 

 


 

건조한 성격으로 살아왔지만 사실 나는 다혈질인지도 모른다. 집착 없이 살아오긴 했지만사실은 집착으로써 얻지 못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짐짓 한 걸음 비껴서 걸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고통받지 않으려고 주변적인 고통을 견뎌왔으며 사랑하지 않으려고 내게 오는 사랑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정열을 다 바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 p.433

 

 

무던하다는 것은 열정을 동반하는 일이다. 그것은 주변 것들이 자신을 망가뜨리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갈고 닦는 과정이다. 상처받기 두려워하는 사람일수록 체념이 빠르다. 이들은 감정에 대한 주도권을 타인에게 허락하느니 차라리 고요함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최근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던 글귀가 있다.

 

 

아빠는 말씀하셨다. 너무 작은 것들까지 사랑하진 말라고, 작은 것들은 하도 많아서 네가 사랑한 그 많은 것들이 언젠간 모두 널 울게 할 테니까.

나는 나쁜 아이였나 보다. 난 아빠가 그렇게 말씀하셨음에도 나는 빨간 꼬리가 예쁜 플라밍고 구피를 사랑했고, 비 오는 날 무작정 날 따라왔던 하얀 강아지를 사랑했고, 분홍색 끈이 예뻤던 내 여름 샌들을 사랑했으며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갈색 긴 머리 인형을 사랑했었고, 내 머리를 쓱쓱 문질러대던 아빠의 커다란 손을 사랑했었다.

그래서 구피가 죽었을 때, 강아지를 잃어버렸을 때, 샌들이 낡아 버려야 했을 때, 이사를 오며 인형을 버렸을 때 그리고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그때마다 난 울어야 했다.

아빠 말씀이 옳았다.

내가 사랑한 것들은 언젠간 날 울게 만든다.

 

- 신지상, 지오 '베리베리 다이스키' 중

 

 

솔직한 감정들은 어느 순간부터 두려운 것들이 되어버렸다. 하루 살아가기도 벅찬 세상에 감성적이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으니까. 사랑과 따뜻함, 믿음에 대한 갈망이 강할수록 개인은 포기를 빨리 배운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느니, 차라리 누가 상처를 주더라도 동요하지 않을 만큼 단단한 보호막을 만드는 것이다. 그 안에 감춰진 당신은 진정 고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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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 p.251

 

 

기대감은 사람을 주저하게 만든다. 현실적이라는 말은 때로 도전을 미연에 방지하여 삶에 대한 집착을 멈추게 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언제부터 그것이 꿈이 될 만큼 거창한 일이었을까.

 

수많은 이들이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한다. 굳이 화려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원하는 이유는 이전 날의 끝없는 좌절과 실패에 지쳐서일지도 모른다. 인생은 개인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냉소적인 사람들은 잃어버릴 것들을 굳이 만들지 않는다. 성실하게, 누구보다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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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삶이 이어진다.

 

- p.426

 

 

“지금 나의 감정이 정당한가?” 나 자신에게 매 순간 습관처럼 던지는 질문이다. 조금이라도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순간이 오면, 나는 내 감정을 들여다보기 전에 타인의 시선에서 먼저 묻는다. 덕분에 스스로조차 이것이 상처가 될 만한 일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넘어갈 때가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분명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사람은 상처를 잊어가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데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허향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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