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통의 순간에 신은 어디 계시는가? [문학]

신의 침묵에 질문을 던지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
글 입력 2020.10.0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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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순간에 신은 어디 계시는가?'

 

신을 믿는 유신론자도, 믿지 않는 무신론자도 아마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고통스러운 순간에 이런 질문을 던져봤을 것이다. 나의 경험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서는 옳지 않음이 옳은 것을 이기는 일들이 다반사고 약하고 선한 것이 패배하는 불공정한 광경을 마주할 때가 그렇지 않은 일보다 더 많다.

 

일본의 가톨릭 작가 ‘엔도 슈사쿠’ 역시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의 몸이 아파 병실에 누워있을 때는 생기지 않았던 의문들이, 그 옆 병실 그가 아끼던 착하고 순수한 소녀가 죽음으로 신음할 때 그는 신의 침묵에 고통스러워했다.

 

 

 

1. ‘엔도 슈사쿠’의 가톨릭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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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1923-1996)

  

 

작가 엔도 슈사쿠(1923-1996)는 열 살 무렵 가톨릭 신자였던 모친에 의해 세례를 받는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세례를 받은 그에게 기독교란 몸에 “맞지 않는 양복”이었다. 그는 양복을 벗어버릴까도 생각하지만, 벗는 순간 알몸뚱이가 될 것을 알았기에 그냥 입고 있기로 결심한다. 대신 그는 이 헐렁한 서양 옷을 일본인의 몸에 맞는 사이즈로 ‘재단’하기로 한다.

 

많이들 알다시피 일본은 다신교로, 현재 일본 내 기독교 신자 수는 1%도 되지 않는다. 유일신 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기독교 교리는 범신론적 일본의 세계관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엔도의 문학은 일본의 범신론과 서구적 유일신론 사이에서 방황하기도 하며 그 양립을 위한 진지한 고민을 바탕으로 한다.

 

소설 <침묵>에서 그 고민의 흔적이 드러나는데,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소설은 ‘늪지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어떤 묘목을 심어도 뿌리가 썩어버리는 늪지대. 유일신 사상이 자라날 수 없는, 설령 자라나도 일본 풍토에 맞는 새로운 형태로 변질되어 자라나는 이 일본 땅의 기독교를 바라보면서 엔도가 제시한 ‘재단 방식’은 모성적 그리스도의 이미지였다. 그래서 엔도의 기독교 문학은 엄격한 부성적 그리스도가 아니라 무한한 용서와 사랑을 베푸는 모성적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그의 단편 <어머니이신神>의 신의 사랑이 곧 ‘어머니’의 사랑으로 받아들여지며 <침묵>에서 배교하는 자를 향해 그리스도는 너그러운 용서와 위로를 건넨다. “밟으라. 네 발의 아픔을 내가 가장 잘 안다. 밟으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왔고, 너희와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졌도다.”

 

엔도의 작품 세계와 앞으로 소개할 소설 <침묵>이 기독교적 가치관을 지녔다 해서 비기독교인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꺼려 할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위대한 예술은 취향과 장르를 초월한다고 믿는 쪽이다. 엔도 슈사쿠의 문학은, 특히나 그를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침묵>은 단순히 기독교적 가치관을 강요하는 종교소설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침묵>은 빼어난 문학이 으레 그러하듯, 인간의 삶과 내면을 보편성이란 바늘로 날카롭게 관통하고 질문을 던진다.

 

 

 

2. 신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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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일런스' 스틸컷

  

 

소설은 어떤 고문이나 협박에도 불굴의 의지를 꺾지 않던 한 포르투갈 선교사 ‘페레이라’ 신부가 결국 일본에서 배교(기독교 교리를 부정하는 것) 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으로 시작한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굳은 선교 의지를 보이던 페레이라의 배교에 큰 충격을 받은 젊은 사제들은 그 상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자 일본에 상륙한다.

 

1637년 ‘시마바라의 난’ 이후 기독교 박해가 심해진 상황에서 외국 선교사들이 일본에 들어오는 것은 당시 ‘불법’이었다. 관리의 눈을 피해 도망을 다니던 로드리고는 결국 붙잡히게 되고, 그곳에서 선교사들을 줄줄이 배교시키기로 악명 높은 ‘이노우에’에게 배교를 권면 받는다. 계속되는 정신적 고문과 협박 끝에 이노우에의 계략으로 로드리고는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페레이라 신부까지 만나게 되면서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굳건한 신앙을 갖고 있던 신부 ‘로드리고’는 눈앞에서 선하고 신실한 신도들이 순교를 당하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고통스러운 질문과 번뇌에 빠진다. 왜 신을 위해서만 살았던 착하고 신실한 이들이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고문의 현장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의 ‘침묵’이었다. 로드리고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동판화)를 밟음으로써 배교하라는 협박을 수차례 강요받는다.

 

작품은 배교와 순교의 갈림길에 선 극단의 상황까지 인물들을 밀어붙이면서 이 상황까지 놓이게 된 근본적인 요인, 즉 신과 인간 존재에 질문을 던진다. 신은 정말 계시는가? 이 무서운 질문과 내내 싸우는 것은 신을 믿지 않는 이들도 신의 존재를, 만약 그 신이 있다면 혹은 없다면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 존재와 삶을 생각하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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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일런스' 스틸컷

 

 

예수를 고발한 유다처럼 ‘기치지로’의 배신을 겪는 등 예수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두려움과 굶주림의 한 가운데에서 로드리고는 예수의 얼굴을 이전보다 더 마음속으로 그리게 된다. 그리고 그리움이 쌓여 만들어진 예수의 얼굴은 소설 말미에 이미 수많은 사람들에게 밟혀 로드리고가 상상한 아름다움과 위엄은 사라진 얼굴, 지치고 슬퍼 보이는 남자의 얼굴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로드리고는 왜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침묵하시느냐 물어보자 예수의 얼굴은 침묵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나누고 있었노라 말하며 밟아도 좋다 대답한다.

 

 
“밟으라. 네 발의 아픔을 내가 가장 잘 안다. 밟으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왔고, 너희와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졌도다.”
 

 

그리고 신부는 성화를 밟는다.

 

외면상으로는 배교를 한 것이지만, 속으로 그리던 예수는 여전히 로드리고의 마음속 ‘믿음’의 형태로 남아있으니 그는 배교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신의 침묵은, 존재의 없음에 의한 침묵이 아닌, 그 침묵의 주체인 신의 존재를 느끼게끔 한다.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성화’는 기독교인에게는 예수의 얼굴이겠지만 비기독교인에게는 다양한 형태, 한 인간이 그려내는 가장 아름답고 성스러운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만의 ‘성화’를 밟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게 되고 그 성화는 가장 볼품없고 낡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밟아도 좋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리 말할 수 있는 근간은 성화에 발을 내미는 대상을 향한 조건 없는 사랑일 것이다.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밟아야 살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 누구라도 ‘밟아도 좋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 말속에 조건 없는 깊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실 작품은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결말의 내용이 나름대로의 결론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다지 명확하지 않으며 혹자에 따라서는 주장이 갈릴 수도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갑론을박에 대해서 작가 엔도 슈사쿠는, 이 혼돈의 세상에서 답을 찾아 더듬어 가는 것이 소설가의 역할이라 말한다. 이 세상이 정답으로 가득 차 있다면 소설이 존재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침묵> 속, 답을 주지 않는 신의 침묵에 로드리고의 질문은 여전히 안갯속에서 더듬더듬 답을 찾아가는 형식을 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이라는 것, 소설이 할 수 있는 해결 방안임을 말해준다.


*

 

질문과 번뇌로 작품 전체를 끌고 가는 이 내면 드라마가 현재까지 꾸준히 읽히며 비기독교인들에게도 ‘걸작’으로 인정받는 이유 중 하나는 작품이 가진 ‘진정성’과 흡입력 있는 묘사로 독자를 몰입시키는 문학적 힘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전혀 다른 시대를 산 외국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작가에게 큰 모험이었다. 여러 가지 페널티에도 불구하고 크게 어색하지 않았으며 작품의 몰입이 가능했던 이유는, 작가 엔도 슈사쿠와 주인공이 동일하게 공유한 종교적 고민과 경험 덕분이었을 것이다. 신앙을 가지고 삶과 인간을 바라본 작가는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이 세상과 자신이 가진 가치관(가톨릭 신앙)을 위해 번뇌하고 싸워낸 사람이었다.

 

엔도의 문학관에 서 있는 비문에 적힌 글귀는 그가 해온 한평생의 싸움과 이 세상을 향한 연민 어린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 엔도 슈사쿠

 

 

 

*

참고 문헌

 

엔도 슈사쿠, 『침묵』, 공문혜 옮김, 홍성사, 2003.

엔도 슈사쿠, 『깊은 강』, 유숙자 옮김, 민음사, 2009.

엔도 슈사쿠 외 지음, 『일본 기독교 문학선』,노영희 옮김, 川花, 2006.

엔도 슈사쿠, 『엔도 슈사쿠의 문학강의』, 송태욱 옮김, 포이에마,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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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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