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 여자와 나란히 걷는 오르페우스 신화 산책길 [영화]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셸린 샴마, 2020)
글 입력 2020.09.2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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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보게 된 영화. 내가 탄 택시가 나도 모르는 사이 불법 끼어들기를 하다가 교통경찰에게 잡히는 바람에(!) 20분의 실랑이를 마친 후 죄지은 사람 마냥 고개를 수그리며 살금살금 영화관 구석 끄트머리에 들어가 앉았다. 내가 이런 고생까지 하면서 영화를 봐야 하나, 싶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소감으로는, 그랬다. 더한 고생을 하더라도 기꺼이 봐야 하는 영화였다.
 
 

 

영화의 흐름

 

작은 독립 영화관을 꽉 메운 소리는 다름 아닌 ‘붓질’ 소리였다. 뭐야, 이거 요즘 유행한다는 ASMR인가? 열심히 누군가를 그리는 것 같은 모양새…. 급히 자리에 앉아 파악한 영화의 흐름은 영화의 흐름은 결혼을 원치 않는 귀족 엘로이즈와 엘로이즈의 결혼을 위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줘야 하는 임무를 안은 화가 마리안느의 이야기를 위주로 한다.

 
당시 결혼 상대에게는 반드시 초상화를 보내야 하는 모양인데 -오늘날의 프로필 사진 같은 개념일 듯하다.- 원치 않는 결혼으로 자살한 언니 대신 결혼해야 하는 전직 수녀 엘로이즈는 그 사실이 영 탐탁지 않은 모양이다. 엘로이즈는 자신을 그리려한 초상화가들을 전부 거절하며 결혼에 대해 완강한 거부의 의사를 보였다. 그러나 엘로이즈는 어머니의 특명을 받고 온 최후의 수단인 화가 마리안느에게만큼은 묘한 기류를 느끼며 난생처음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사랑인가…?’ 생각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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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부터는 영화 내용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여행 간 틈을 타 본격적으로 둘은 사랑을 나누게 된다. 영화에는 엘로이즈와 마리안느 외에 또 한 명의 핵심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엘로이즈의 하녀 소피이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어머니가 여행 간 틈을 타 사랑을 나누는 동시에 소피의 불법 낙태 시술을 돕게 된다. -영화를 볼 땐 왜 소피의 다리 사이로 풀을 버무린 진흙을 넣는 것인지 의아했는데 영화를 본 후 찾아보니 고대 이집트에선 약초를 섞은 악어 똥을 질 속에 넣는 피임법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와 비슷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됐다.- 소피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어머니가 돌아오기 전까지 카드놀이도 하고 오르페우스 신화를 낭독하고 초상화를 완성해가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행복하던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돌아오며 어쩔 수 없이 두 사랑하는 연인이자 여인들은 이별하게 된다. 몇 년 후 마리안느가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열게 된 전시회, 그리고 두 사람이 공유했던 음악이 연주되는 음악회에서 둘은 간접적으로나마 재회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나란히 걷는 세 여인

 

신분도 성격도 전혀 다른 세 여자이지만, 어머니의 여행으로 자유가 된 시간 동안만큼은 끊임없이 서로를 돕고 함께 카드게임을 하고 오르페우스 신화를 낭독하며 의견을 나누고 돌아가며 요리를 하는 등 동일선상에 그려짐으로써 신분의 차이가 있는 관계가 아니라 자매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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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화면 속에 그 세 여자들을 일직선상에 둔 장면을 유독 자주 보여준 이유도 그들이 서로 위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평등하다는 것을 아주 직관적으로 드러내게 하려는 장치였을 것이다. 다른 이들의 방해가 전혀 없이 오로지 세 여자만이 그려나가는 수평선이 아름다웠다. 세 여자들은 서로가 일직선으로 있어주는 것만으로 치유되었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관계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묘하게 연상시킨다. 처음에는 하녀로 들어온 수직적인 관계의 숙희와 아가씨가 사랑에 빠짐으로 인해 수평적인 관계가 된다는 부분이 닮아 있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오르페우스 신화의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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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ts - Orpheus and Eurydice, 1869]
 
 
... 그런데 오르페우스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에우리디케를 뒤따라가게 할 텐데, 그녀가 저승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 오르페우스가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르페우스가 앞서 가고 에우리디케가 뒤따르는 저승 이탈 행렬이 시작된다. 오르페우스는 인내심을 가지고 어두운 저승길을 묵묵히 앞장서 걷는다. 그러나 저승 세계를 벗어나기 직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고 만다. 그 순간 에우리디케는 애처로운 눈빛을 남기며 저승 세계로 다시 끌려 들어간다. 오르페우스가 사라져 가는 아내를 잡으려고 안타까이 팔을 내밀었으나 캄캄한 허공만 잡힐 따름이었다. [오르페우스 신화 중]
 
 
영화에서는 ‘오르페우스 신화’가 아주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한다. 세 여자는 모여 오르페우스 신화의 마지막 장면을 읽고 왜 오르페우스가 결정적인 순간에 뒤를 돌아보았는가에 대한 열정적인 토론을 한다. 소피는 오르페우스를 비난하며 격분하고 마리안느는 그가 결국 남편이 아닌 시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원했기 때문에 오르페우스가 그녀를 돌아본 것이라고 주장한다. 돌아보는 선택, 즉 이별을 선택하는 주체를 오르페우스가 아닌 에우리디케라고 본 것이다.
 
이 장면은 사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사랑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 태도를 대놓고 암시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녀들이 이별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한다. 마치 에우로디케가 이별을 선택했듯이. 엘로이즈가 생각하는 사랑은 ‘배려’였기 때문이다. 즉 엘로이즈가 선택한 이별은 결코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오르페우스(마리안느)를 위한 진정한 희생의 자발적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마리안느는 어떻게든 엘로이즈와의 관계를 이어가려고 한다. 마리안느에게 사랑은 열정과 노력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사랑을 배려라고 여기는 엘로이즈의 선택을 존중해 마리안느는 끝내 돌아보고 만다. 그리고 ‘시인이 되는 것’을 선택한 오르페우스처럼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떠나 화가로서의 삶을 지속한다.

 

 

영화계의 ASMR

 

앞서 말했다시피 영화에는 ASMR(‘자율감각쾌락반응(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을 의미하는 신조어)를 방불케 할 감각적인 요소가 많이 자리하고 있었다. 엘로이즈가 입은 원색의 드레스들이나 타오르는 불꽃 등 강렬한 색채 대비는 시각적인 자극을 주었고 바닷바람과 파도의 쓸쓸한 아우성과 불어의 속삭이는 듯한 억양, 캔버스 위의 붓질 소리 등 오감을 자극하는 청각적인 요소들은 듣다 보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황홀했다.
 
영화는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와 많이 닮았지만 감각적인 면도 닮아있었다. 마리안느의 ‘아가씨’인 엘로이즈의 초상을 그릴 때 사각사각하고 들렸던 연필의 소리는, 욕조에서 숙희가 아가씨의 어금니를 갈아주던 소리와 같이 성적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느낌이었다.
 
 
 
꼬지 않아 편했던, 그래서 더 울렸던

 

영화가 과하게 현학적이거나 끝나고 몇 편의 리뷰를 봐야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이고 쉽고 명쾌하면서도 세련되어서 더 좋았다. 화면 속 세 여자를 일직선상에 세워놓아 그들의 관계를 한눈에 알게 한다거나 대놓고 오르페우스 신화와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상황 속 대응되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용감하고 과감하게 느껴졌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음악회 장면에서 굳이 엘로이즈가 오열하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심지어는 클로즈업까지 해서!) 잡았던 것에 있어서는 조금의 덜어냄이 있었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콜미바이유어네임>의 마지막 장면과 닮아 있는 그 장면은, 물론 그녀의 내적 요동침을 전달하는 효과적인, 그리고 꼭 필요한 장치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에 비추어보자면 화면 속 엘로이즈는 생략하고 음악만을 남겨놓음으로써 관객이 직접 엘로이즈의 심경을 느껴보게 하는 것은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어쨌든 용감하고 과감한 영화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만큼 울림도 컸다. 예술성과 대중성 모두 100% 충족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영화의 울림은 꽤 커서 몇 주 내내 검색창에 '타여초'를 치는 나날을 보내야했다. 다만 상영하는 영화관의 개수가 너무 적어 아쉬웠다. 이토록 훌륭한 영화가 이렇게 적은 상영관에만 올라오다니… 하는 놀라움이 들었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 영화계가 예술영화를 배척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아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택시 속 20분의 사투가 아깝지 않은 영화였다. 더한 고생을 했더라도 영화관을 나설 때쯤이면, 잘 보러 왔다! 뿌듯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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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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