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이토록 평화로운 멸망 - ROBOT

책 'ROBOT' 리뷰
글 입력 2020.09.2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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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이라는 단어는 2020년에 좀 더 가깝게 다가온다. 아직 올해가 몇 달 더 남았지만, 2020년을 지나는 동안 이러다 정말 세상이 망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 적이 많았다.

 

멸망에 대해서 생각할 때 쉽게 간과하는 것 중 하나는 인간의 절멸이 곧 이 세상의 멸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전 지구적으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사실 지구의 입장에서 인간은 작디 작은 존재다.

 

한 다큐멘터리에서 인류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지구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시뮬레이션을 했던 게 떠오른다. 인류가 오랫동안 발전시킨 문명은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무너졌다. 그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지구의 역사를 24시간으로 볼 때 인류가 머문 시간은 고작 30초 정도뿐이라고 한다.

 

ROBOT은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해봤을 인류 멸망 후 세계를 그린다. 인간이 사라진 세상에는 인간이 만들었을, 인간을 닮은 로봇들이 있다. 로봇들은 성벽 안에서 자신들의 문명을 이루고 살아간다.

 

로봇들은 그들의 도시를 둘러싼 성벽을 한 번도 넘어가본 적이 없다. 어느 날, 과학자 로봇인 윌리엄은 다른 로봇 메리웨더와 함께 성벽 너머를 탐사하도록 파견된다. 그들의 목적은 성벽 너머에서 그들이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지 기원을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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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두 로봇의 단출한 모험이 시작된다. 성벽 바깥의 세상은 넓다. 인간은 찾아볼 수 없는 세상에 산이 솟아있고 강물이 흐른다. 로봇들은 의외로 자연스럽게 풍경에 녹아든다.

 

처음부터 인간 같은 건 이 세상에 없었던 것 같다. 큰 판형의 책과 장마다 가득 채운 그림이 오랜만에 책을 '보는'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푸른색과 노란색으로 이루어진 그림들이 무척 아름답기에, 두 로봇이 자연 속을 헤매는 장면들은 사진으로가 아니라 직접 책으로 봤으면 한다.


바깥 세상으로 새로운 걸음을 내딛은 두 명의 로봇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이다. 그들이 길에서 발견해 표본으로 수집하는 물건들은 슬리퍼나 이어폰, 리모컨 같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지겨울 만큼 익숙한 것들이다. 그러나 정작 그것들을 늘상 보고 사용하는 '우리'가 없는 세상에서 모든 것은 새롭고 경이롭다. 인간이 남긴 것은 정교한 도시나 세상의 진리를 담고 있으리라 여겨지는 학문 따위가 아니라 이렇든 맥락을 알 수 없는 사소한 것들 뿐이다.


몇 차례의 헤맴 끝에 두 로봇은 뜻밖의 장소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조상'을 발견한다. 그 조상이란 다름 아닌 전시장의 마네킹들이다. 로봇들은 목표하던 걸 발견했다는 기쁨에 흥분하며 자신들의 공동체로 돌아간다. 그들은 자신의 인식을 뛰어넘는 어떤 존재가 그들이 발견한 조상까지 포함해 이 모든 것을 만들지 않았을까 잠깐 상상하지만 끝내 구체적인 인간의 존재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로봇들이 있는 곳이 줌아웃되며 독자의 눈에 보이는 것은 '내일의 세계'라는 박람회 간판과 '우리의 미래'라고 쓰인 현수막이다. 의욕 넘치는 이 문구들은 쓸쓸해 보인다. 인간은 당연히 내일의 세계에 인간이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풍경은 우리가 이해하는 세상이란 얼마나 일방적이고 협소한지 보여준다. 동시에 무언가를 다 알려 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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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재미있는 존재인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멸망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멸망을 다루는 이야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류가 멸망하는 이야기를 보는 까닭은 어떤 면에서 공포 영화를 보는 마음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이야기 속 망해버린 세상을 보며 실제 자신이 있는 세상이 형편없을지언정 어쨌거나 돌아가고 있고 또 내일이 온다는 사실에 안도하곤 한다.

 

ROBOT은 그런 류의 수요를 충족시켜주지는 않는다. 이 이야기는 몹시 평화롭다. 인류가 사라진 세상은 마치 악당이 사라진 풍경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인류의 멸망이 그런 모습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오늘날 인류가 너무 해롭기 때문일 거다.


존재가 끝나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 같지만 생각보다 세상은 넓고,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 그다지 큰 일은 생기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히려 꽤 자주 피곤한 일이다. 현실의 삶이 막막하고 지겹게 느껴지면 나는 멸망을 생각한다. 아무도 없는 세상을 생각한다. ROBOT은 그런 휴식의 시간을 주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한 개체로서는 물론이고 한 종으로서도. 그 뒤에도 계속될 세상을 생각하면 모든 게 덧없고, 덧없어서 또 아름답다. 우리는 가끔 인류의 멸망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 현실의 삶에 안도하고 감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 현실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고 흘려보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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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체코의 젊은 시나리오 작가 타탸나 루바쇼바와 출판과 광고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일러스트레이터 인드르지흐 야니체크가 협업하여 만든 책이다. 독일에서 주최한 2018 The White Raven Catalogue 청소년 문학상 수상, 2018년 IBBY 주관 골든 리본상 후보에 오르는 등 대중성과 작품성을 두루 인정받았다. 로봇이 멸망한 인류의 유산을 찾아 탐험을 떠난다는 기발한 설정에, 실크 스크린 기법을 응용한 감각적인 그림체가 더해져 독특하고 매력적인 SF 그래픽 노블이 탄생하였다.

 

또한 ‘로봇’이란 단어는 체코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다.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의 희곡 ‘로섬의 유니버셜 로봇(R.U.R)’에서 노동을 뜻하는 체코어인 ‘ROBOTA’에서 파생하였다. 그 때문에 엣눈북스에서 소개하는 첫 체코 책이 ‘로봇’을 주제로 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를 가진다.

 

인류 멸망이라는 어두운 세계관과 달리 인간의 흔적을 탐사하는 로봇의 모험은 시종일관 유쾌하게 이어진다. 그들이 인류에 대해 제멋대로 추측하고 판단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어쩌면, 지금 우리도 지난 역사를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찔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기상천외한 로봇의 탐험을 통해 다가올 미래를 상상해 보는 즐거움 덕에 섣부른 의심이 금세 잊힌다.

 

딱딱한 기계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사랑스러운 캐릭터와 재치 넘치는 대사. 그리고 장면마다 작가가 심어 둔 단서를 바탕으로 보물찾기하듯 인류의 비밀을 파헤치는, 숨은 재미가 가득한 SF 그래픽 노블이다.

 

 

++

 

몇 해 전 체코 프라하를 여행하던 도중 한 서점에서 이 책을 만났고 얼마 후 나는 우연히도 프라하에 살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샀던 서점의 주인이자, 작가인 인드리히의 작품 ‘로봇’의 한국어판을 출간하기로 결정했다. 지금에 와 생각하면 이 모든 과정이 운명처럼 느껴진다.

 

그 운명의 기운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짙어졌는데, 바로 ‘로봇’을 편집하는 동안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겪어보지 못한 위기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 혼란한 시국에 프라하의 작은 아파트에 갇혀 ‘로봇’을 만들며 나는 내내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인류가 멸망한 뒤 그 흔적을 좇는 로봇의 이야기에서 어떠한 기시감이 느껴져서이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 상상하던 일들이 눈앞에 펼쳐진 지금, 어쩌면 ‘로봇’의 세계가 현실이 될 날도 멀지 않았다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다행히 격리 기간 동안 느낀 불안은 두 로봇과 여행을 함께 하며 점점 옅어졌다. 그들이 벌이는 흥미진진한 모험 속에서 인간이 사라진 지구의 모습이 마냥 어둡게만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탐험에 동참해 인류의 발자취를 쫓다 보니 문득 연이은 질문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남길 것인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남기지 않아야 그리 나쁘지 않은 선조로 후세에 기록될 수 있을까. 더불어 질 나쁜 농담 같은 이 시간들 또한, 훗날 어떤 모습과 의미로 기록될까.

 

 

작업이 끝날 때까지 질문의 답을 쉽사리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로봇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무거운 고민은 뒤로하고 애써 마음을 밝게 바꾸어 본다. 인류에게 그 어떤 미래가 도래한다고 해도, 윌리엄과 메리웨더 두 로봇처럼 고난을 헤쳐 나가는 지혜와 용기가 있다면 그리 두렵지만은 않을 거라고.

 

- 편집자 후기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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