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말함'은 우리의 연대다 - 아버지의 사과 편지 [도서]

이브 엔슬러 <아버지의 사과 편지>
글 입력 2020.09.19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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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엔슬러는 아버지에게 다섯 살 때부터 성폭력을 당했다. 10대 이후에는 학대, 폭행, 가스라이팅 등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폭력의 희생자가 아닌 생존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극작가로서 여성의 몸에 대해 숨김없이 이야기하고 사회운동가로서 각종 폭력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 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절대 흐려지지 않는 과거의 상흔이 여전히 그의 삶에 남아 있었다. 가해자는 죽었지만, 이브 엔슬러는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시간의 흔적들을 짊어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과 편지>는 여기서 시작한다. 이브 엔슬러는 자신을 나락으로 몰아넣은 잔혹한 기억에서 한 발짝 더 벗어나기 위해, 본래 누려야 했던 온전한 삶을 되찾기 위해 두렵지만 있는 힘을 다해 고통의 기억을 꺼내놓는다.

 

 


가해자의 사과



‘가해자의 사과’. 가해와 피해의 관계에서 궁금해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대목이다. 진정성이 담긴 가해자의 사과를 거의 보지 못했고, 그런 ‘사과’에는 늘 끝없는 자기 연민과 합리화가 담겨 있었다. 가해자의 사과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믿어왔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사과 편지>를 읽는 내내 충격의 연속이었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자신의 이야기를 넘어, 어떻게 가해자의 목소리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편지를 읽는 내내 화가 났다. 왜 끔찍한 일을 저지른 가해자는 침묵하고, 피해자이자 생존자가 그 목소리를 빌려 가해자의 사과를 불러내는 걸까. 그리고 동시에 경이로웠다. 어떻게 이브 엔슬러는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이 편지를 쓰는 과정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까.

 

내가 이브 엔슬러였다면 어땠을까. 책장을 덮고 잠깐이나마 그려봤다. 그 고통의 크기나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지만, 내가 만약 이브 엔슬러였다면 절대 이런 글을 쓸 수 없었을 거다. 나는 버틸 수 없었을 거다. 생존자가 가해자의 입장이 되어 써 내려가는 편지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글에서 마주한 이브 엔슬러의 용기는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어떤 것이었다.


 
"이제 기다림은 끝내기로 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오래다. 그는 결코 내게 그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일에 대해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상상해야만 한다. 상상 속에서라면 경계를 넘어 꿈을 꿀 수 있고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 현실과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이 편지는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나의 의지와 그에 필요한 말을 아버지에게 부여하고 사과의 언어로 표현하게 해 마침내 나를 자유롭게 만들려는 노력이다."
 


<아버지의 사과 편지>는 이브 엔슬러가 진정으로 갈망했던, 진심으로 듣고 싶었던 말을 담아낸다. 아버지를 용서하거나 이해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한 편지다. 읽는 입장에서도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글이었는데, 이브 엔슬러는 직접 자신을 옭아매던 시간의 상흔을 들추고, 매만진다. 그것도 가해자의 목소리로.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거다.

 

딸의 펜대를 빌린 아버지는 말한다. 자신의 외로웠던 유년시절, 매력적인 남성으로서의 청년 시절, 자신보다 훨씬 어린 상대와의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결혼, 자신의 딸 이브를 보며 느꼈던 기쁨과 사랑스러움, 그로 인해 파생된 욕망, 딸에게 저지른 성적 착취, 그 외의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폭력, 가장으로서의 권위와 남자다움, 자기 합리화와 계속되는 거짓말 등. 눈 앞에 펼쳐진 적나라한 '진실'은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가해자는 당시의 폭력을 날 것 그대로 증언하고, 왜 그랬는지, 자신이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에 대해 써 내려간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자신이 딸의 삶과 영혼을 어떻게 빼앗고 파괴했는지 직시한다. 자신이 저지른 폭력의 진실을 갈라 헤치고, 그 속에서 딸의 고통과 슬픔을 느낀다.


 

 

말해내기


 

솔직히 가해자의 이야기는 전혀 듣고 싶지 않다. 만약 실제로 가해자가 이 글을 썼다면, 나는 이 편지를 절대 읽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이 글은 생존자가 쓴 편지다. 생존자는 가해자의 편지를 상상하고 써 내려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생존자인 이브 엔슬러는 간절하게, 가해자인 아버지의 사과를 원했다.

 

사과는 기억하는 것이다. 사과는 일어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걸 얘기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해자는 무책임하게도 아무 말 없이 죽어버렸고, 이브 엔슬러는 죽은 아버지의 편지를 상상하고 말해낸다.

 

글에서 가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침묵은 우리의 연대야. 이야기하지 않는 것, 밝히지 않는 것은 우리의 무기고에 있는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무기지.” 그렇다. 가해자들은 침묵한다. 사과하지 않는다. 사실을 은폐한다. 기억하지 않는다. 인정하지 않고 부인한다. 모함하고 도망친다. 많은 피해자, 생존자들은 듣고 싶은 말을 듣지 못한다.

 

그러므로 '말함'은 우리의 연대다. 우리 스스로 이야기하는 것, 밝히는 것은 침묵을 깨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말함'이고, 이브 엔슬러처럼 가해자의 목소리를 상상해 내는 것도 '말함'이다.

 

이 '말해내기'의 여정에는 말함을 들어주고, 같이 말해주는 이들이 필요하다. 저편에서 침묵하고 그에 동조하는 이들이 있다면, 우리는 말함을 지지하고,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귀 기울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가해자에게 '진실을 말해, 사실을 인정해'라고 함께 말해야 한다. <아버지의 사과 편지>는 이에 대한 지침서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무엇을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지 알려주면서, 피해자가 어떤 식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브 엔슬러는 말해냄으로써, 가해자가 피해자와 생존자에게 진정한 사과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냈다. 차마 상상하지 못했고, 믿지 못했던 '가해자의 사과'를 이브 엔슬러의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엿보았다. 그렇기에 상처와 진물로 가득한 이 글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생존자 이브 엔슬러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나는 기꺼이, 이 '말해내기'의 여정에 몸을 싣고 싶다.

 

 

*

 

아버지의 사과 편지

- 딸아 미안하다. 그건 강간이었다. -

 


지은이 : 이브 엔슬러


옮긴이 : 김은령


출판사 : 심심


분야

외국 에세이 / 여성학


규격

133*193


쪽 수 : 208쪽


발행일

2020년 08월 14일


정가 : 15,000원


ISBN

979-11-5675-835-8 (0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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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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