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 아버지의 사과편지 [도서]

나에게 들려주어야 할 사과의 말
글 입력 2020.09.17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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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분류를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소설이라기엔 실제를 바탕에 둔 이야기이고, 편지글이라기엔 독백에 가깝다.


 
이제 기다림은 끝내기로 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오래다. 그는 결코 내게 그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일에 대해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상상해야만 한다. 상상 속에서라면 경계를 넘어 꿈을 꿀 수 있고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 현실과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저자 이브 엔슬러는 사과는커녕 잘못의 인정조차 하지 않고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자신이 그인 것처럼 가정하여 자기 자신에게 사과 편지를 쓴다. 이브는 다섯 살 때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다. 이를 기점으로 가스라이팅, 폭행, 언어폭력, 이간질 등 온갖 종류의 폭력이 이브에게 쏟아졌다. 가족들은 아버지의 행태를 알고서도 침묵했다. 몇 발짝 뒤로 물러나 눈치만 볼 뿐, 누구 하나 이브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이브는 의지, 믿음, 신뢰, 확신이 무엇인지 몰랐다. 결국 사람 대신 위험하고도 손쉬운 것들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편지의 출발점은 아버지가 자라온 환경을 서술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의 집안 환경과 다르다. 폭력, 억압, 가스라이팅, 세뇌를 통해 정해진 틀에 아이를 욱여넣는 방식이었다. 어머니는 그를 떠받아 들이고, 아버지는 그를 깎아내렸다. 정반대의 모순 속에서 아버지는 자신을 정의한다. 겉으로는 칭송받고 있으나 본질은 추악하고 못났다고.


엄격한 훈육이 아이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높여줄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은 결과적으론 성공한 셈이다. 아버지는 '그림자 인간'을 거짓으로 치장한다. 여기에 영화배우의 손짓, 말, 여유 등에 흥미를 느끼고, 자신의 의지로 연기한다. 더 완벽하게 겉모습이 꾸며졌다. 텅 빈 알맹이에게 환호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브의 아버지는 자신보다 훨씬 어린 이브의 어머니와 결혼한다.


이브의 탄생. 이제부터 역겨운 대목이 이어진다. 자신의 딸, 아이에게 아버지는 욕정 한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의도를 왜곡하여 제멋대로 가공한다. 아버지의 뇌는 한참 덜 자랐다. 원하는 정보를 만들기 위해 자신만의 필터링을 만들어야 했고, 그것을 다섯 살 남짓한 어린아이를 합리화하려고 사용했다. 우매하고도 멍청함. 아버지의 껍떼기를 열어 보면 나오는 알맹이다. 이쯤에서 어렴풋이 느꼈다. 왜 아버지의 성장배경을-물론 잘 모르는 부분은 이브의 상상이 더해졌다- 상세히 서술했는지.


자신이 아버지라고 생각하며 사과편지를 적어 내려간 이브. 그런데 그가 서술한 아버지의 이야기는 꼭 아버지 또한 피해자였다고 말하는 듯했다. 가해자의 성장 배경이나 환경 따위를 길게 말하다 보면, 원하든 원치 않든 그에게 그럴 만한 이유를 쥐여준다. 성범죄가 공론화되었을 때, 가해자의 배경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뭇 기자들을 비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이 글과 기사의 차이가 있다면, 감정의 여부다. 가해자를 악마화하는 기사들은 감정적이다. 파렴치하고, 못났고, 그래서 되려 무섭기까지 한 가해자를 기자 입맛대로 가공한다. 그러나 이브가 서술한 글은 침착하다. 연민, 동정, 분노, 슬픔 따위가 배제되었다. 아버지가 제 잘못을 참회하고자 적은 글이기 때문에 감정표현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기계처럼 딱딱한 글은 이브가 의도한 바가 아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아버지를 대단한 악마로 표현하지도, 이브를 가엾고 여린 피해자로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발화자는 가해자다. 사과가 기저에 깔려있어도 아버지가 딸에게 '경탄'의 의미로 꾸며댄 표현들은 역겹기 짝이 없다. 그러면서도 새삼 깨달았다. 가해자의 항변을 세상이 듣지 않아야 하는 이유, 아니, 발언권을 쥐어주지 말아야 할 이유를. 가해자가 자신을 감싸는 말은 피해자에게 2차가해가 된다. 피해자가 사건 진술을 반복하는 것 또한 피해자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가. 피해자를 연약하고 가냘픈 존재로 보자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의 회복을 존중해주자는 거다.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로, 생존자에서 또 다른 존재로 자라날 이들을 위해.


 
아마 너에겐 이런 생각뿐이었겠지. 아빠가 또 때리면 어떻게 방어해야 할까? 그냥 죽어버릴까? 너는 끊임없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았고 이런 감정들은 결국 네 성격의 신경증적인 요소가 되었다. (네가 나중에 술을 많이 마시고 마약을 하게 된 것도 분명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였을 거야.) 이런 스트레스 때문에 너는 생각하고 공부하고 놀고 꿈꾸는 것, 혹은 무언가 배우고 집중하고 기억하는 것이 불가능했어. 너는 맘 편히 쉴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없었지.
 
 
침몰하는 삶에 대한 무력감, 스스로를 향한 미움, 나와 네 엄마를 비롯한 가족 모두에 대한, 더하여 너를 이곳에 있게 만든 무정한 세상에 대한 숨 막히는 분노. 온몸이 마비되는 듯한 두려움. 돌아갈 곳 없는 상황.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외로움. 넌 아무런 희망이 없는 폐소공포증의 감옥 속에 갇힌 처지였어. 나를 내보내줘. 여기서, 여기서 내보내줘. 이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숨을 쉴 수 있었니? 어떻게 살아남았니?
 

 

언젠가 그런 말을 들었다.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싶을 때 '나'라고 쓰는 것보다 '너'라고 쓰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하는 기분이 들어서 큰 힘이 된다고. 이브 엔슬러를 과거에 두고, '브이'라는 이름으로 미래를 향하는 저자도 그 힘을 알고 있었을 거다. 특히 자신을 괴롭게 한 가해자가 되어 자기 자신에게 사과를 말하는 건 고통스럽지만, 의미 있는 회복이다. 상처는 지울 수 없다고 단정할 게 아니라 치료해야 한다. 그 일을 어떤 식으로 기억하는지, 그 후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로 향하고 싶은지.


이 책은 끊임없는 고찰이 만든 치열한 생존기다. 피해자의 상처는 유감스럽게도 가해자가 치료할 수 없다. 가해자에게 처벌을 내리고 사과를 받는 것이 도움은 될 것이다. 하지만 상처 입은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내가 나를 알아주어야 한다. 나 자신에게 어떤 말을, 어떤 생각을, 어떤 방향을, 어떤 목적을 주어야 하는지. 지난한 과정을 '수도 없이 쏟아지는 흔하고도 안타까운 일'로 치부할 게 아니라, 'With You'를 외치며 지지하는 것이 제삼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끝으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자세를 전하며 글을 마친다.

 

 

소화되지 않는 폭력의 기억을 소화시키느라 애쓰는 그들 곁에서 나도 안간힘을 썼다. 그 노력이란,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일이었다. '집은 편안하고 안전하다', '가족은 나를 보호해줄 최후의 보루다', '성폭력은 길 가는 괴한에게나 당하는 일이다', '평소 일찍 다니고 짧은 치마를 입지 않고 '처신'을 잘해 스스로를 보호하면 피할 수 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 '엄마는 딸 편이다' 등등 내 상식의 목록을 낱낱이 의심하고 해체했다. 그럴 때라야 타인의 말이 온전히 들렸다. 지금, 여기 존재를 걸고 말하는 진실의 목소리가.

 

해제ㅡ기록할 수 없는 상처는 없다

 

 


 

 

아버지의 사과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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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이브 엔슬러


옮긴이

김은령


해제

은유


규격

133*193


쪽수

208쪽


가격

15,000원


ISBN

979-11-5675-835-8 (03300)


발행일

2020년 8월 14일


펴낸곳

심심-푸른숲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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