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기록할 수 없는 상처는 없다 - 아버지의 사과 편지

글 입력 2020.09.1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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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라 할 지라도, 우리는 상처받은 마음을 추스르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살아가고 있다. 인생의 종착지에 도달하여 주마등처럼 인생을 돌이켜본다면, 인생은 상처투성이였던 길 위에 피어난 꽃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생은 상처받기 쉬운 순간들의 연속인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상처가 평생을 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상처받는 시련을 겪어내다보면, 사람은 내적으로 단단해지게 되기도 하고 더욱 성장하는 계기로 삼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상흔이 인생에 새겨지는 순간도 있다. 그렇게 큰 상흔은 직시하는 데에만 해도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상흔 그 자체가 한 인생의 경로를 완전히 뒤바꿔놓을 만큼, 무겁고 고통스러운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큰 상처를 직시하고 이를 극복해내는 사람들은 그 존재 자체가 경이롭게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도서 "아버지의 사과 편지"의 표지에 쓰인 '기록할 수 없는 상처는 없다'라는 문구에 내 마음이 속수무책으로 끌려버렸다.

 

저자 이브 엔슬러가 쓴 말인지, 역자인 김은령이 넣은 부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정체성을 그 이상으로 집약해서 표현할 수 있는 한 문장이 있을까? 기록할 수 없는 상처는 없다는 이 한 문장에, 역설적으로 그만큼 크고 힘들었던 아픔을 직시하고 극복해낸 저자의 위대함이 녹아있다. 이는 비단 저자 개인에게 국한되는 위대함이 아니다. 가해자로부터 고통받았으나 진정으로 사과받지 못했던 모든 피해자들이 가질, 그 위대함인 것이다.


 


 

<책 소개>

 

세상은 다른 범죄보다 유독 성폭력 범죄에서 피해자의 목소리에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사건을 밝힌 의도'를 의심한다. 이러한 억압은 오랜 시간 여러 사회‧문화 조건 속에서 용인되어 왔다. 하지만 2017년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미투 운동 이후 자신이 당한 피해를 세상에 적극적으로 알리고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들은 침묵을 거부하고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싸운다.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를,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있는 힘을 다해 세상의 부조리와 폭력에 맞선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이자 세계적인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작가 이브 엔슬러 역시 침묵을 거부한다. 그는 성폭력 생존자로서 피해 내용을 낱낱이 밝히고 가해자인 아버지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가 심판대에 세워야 하는 가해자는 이미 31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사과 편지(심심 刊, 원제 : The Apology)》는 책임을 회피한 채 세상을 떠난 가해자, 더 이상 어떤 법적 처벌도 할 수 없고, 사과조차 기대할 수 없는 아버지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피해자인 자신 앞에 세운다.

 

저자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식의 치열하고도 독특한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고통으로 내몬 사건을 들여다보고 당시의 상처와 마주한다. 폭력의 시간을 견디고 진정한 사과를 기다리며 온몸을 다해 세상과 싸워온 엔슬러의 글은 잔혹한 폭력의 실상을 복원해낸 고통의 기록이자, 남성 권력을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제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폭력을 고발하는 증언이며,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무엇을 사과해야 하고, 어떻게 사죄의 말을 건네야 하는지 안내하는 지도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의 표지 문구에 홀려 이 책을 봐야겠다는 결심을 했으면서도 막상 책을 받아서 펴기까지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책이나 영화 속의 이야기를 통한 간접경험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녹아있는 감정에 동화되는 편인지라, 피해자였던 저자가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가해자의 시선으로 풀어내는 것을 보는 것이 독자인 나로서는 역겨울 것이라는 게 자명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과 편지" 내용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친족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을 되짚어 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속이 메슥거리는 이 책을 끝내 읽어야겠다고 다짐한 것은,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선 저자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더 많아져야 한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원하는 경우를 우리는 지금까지도 보고 있다.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밝혔어도 이에 대해 공감하고, 지지하고, 함께 분노하며 대책을 모색하는 경우보다는 피해자가 진정한 피해자인지, 피해자답지 못하게(?) 나서는 게 의심스러워 보인다든지 하는 비난들이 쏟아지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한국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례가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일 것이다. 반세기도 전에 벌어졌던 악행은, 아직까지도 진실된 사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어디 그 과거에만 이런 일이 있었던가.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클럽 버닝썬으로부터 불거진 연예인들의 성폭행과 불법촬영, 불법촬영과 디지털 성착취로 국민의 공분을 샀던 n번방 사건, 아동 성착취물을 제작하여 미국이 범죄자 인도를 요청했으나 한국 법원이 송환을 불허하는 언어도단의 사태가 벌어졌던 손정우 사건 그리고 죽음으로 공소권 없음을 만들어버린 고 박원순의 성추행 사건까지. 이 모든 사건들 또한 피해자가 진실된 사죄와 반성을 가해자로부터 받는 모습을 우리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기록을 통해 모든 상처를 극복해내고 진정한 사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이브 엔슬러, 아니, 옛 이름을 버리고 브이(V)라는 이름을 택한 저자의 분투를 기억하는 것은 참으로 값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만을 생각하며, 걱정을 억누르고 책을 펼쳤다. 그리고 나서 바라본 저자의 세계는 말문을 잃게 만드는 것이었다.


*


이 책은 성폭행 가해자인 아버지가 그 딸인 저자에게 쓰는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 저자의 아버지가 작고하기 전에 남긴 편지가 아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딸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한 적이 없으며 이 편지는 모두 저자가 써내려간 것이었다. 모든 과거의 발자취들을 되짚어가며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생생하게 떠올려야만 했다는 점에서 너무나 자기파괴적이지만, 동시에 그 모든 상처를 직시하여 피해자를 그 상흔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자기치유적이기도 하다. 너무나 역설적인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책의 초반부부터 중반부까지, 역설적이게도 자기치유적이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을 거의 철회할 수준이었다. 어째서 가해자는 피해자가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고통을 감내하게 만들어놓았단 말인가. 저자는 자신이 겪었던 그 모든 것들을, 가해자의 시선에서 풀어내야만 했다. 그래서 너무 가슴 아프게도, 그리고 역겹게도, 책의 초반부에서는 가해자에게 일종의 서사를 부여해주었다. 강압적인 부모 밑에서 자라 욕망을 억누르고 권위와 남자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성공한 삶을 살아온 자신의 아버지이자 가해자가, 삶의 기쁨을 느끼게 해 준 딸에게 내면의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쏟아내버렸다고 말이다. 그 시선 속에서 묻어나는 것은 가해자의 자기합리화였다. 모든 문장 한 마디 한 마디 속에 피해자에게 귀책하는 표현들을 써가며 자신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더더욱 최악인 것은, 그런 딸이 자신을 피하기 시작하자 그것이 성적 착취에서 신체적 폭력으로 돌변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 가해자는 자신의 딸인 저자를 두고 소유물 취급을 하며,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규율대로 처벌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바라고 항변했다. 물론 이 글은 저자가 상상 속에서 쓴 것이다. 그러나 그 표현에서, 정말로 가해자가 자신을 그렇게 변호하며 항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폭력적인 가장이었던 가해자는 나머지 가족으로부터도 저자를 고립시켜가며 철저히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그렇게 내몰린 피해자는 자신을 더 이상 돌보지 않는 수준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자살을 시도하거나, 마구잡이로 살거나 하며 완전히 인생의 바닥을 제대로 찍은 듯했다. 그러나 저자는 언제까지나 받은 상처에 괴로워하는 소녀가 아니었다. 가해자의 시선에서 풀어졌기에 저자 스스로가 어떤 생각으로 일어섰는지에 대해서는 세부적인 언급까지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자가 점차 자아를 찾아갔고 이를 통해 자신이 더 이상 가해자의 그늘에 숨어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끝내 그 세상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자신만의 삶을 쟁취해냈다는 점이다.


*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스스로를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진심으로 와닿았다. 성폭력, 그것도 친족 간에 발생한 성폭력은 한 사람의 세계를 완전히 파괴해버리는 행위임을 저자는 담담하게 그러나 처절하게 보여주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마치 집권하는 듯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저자는 피해를 당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 분위기를 흐리는 돌연변이 같은 존재로 치부당했다. 피해자에게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고 친밀한 존재들이, 저자를 가장 철저히 외면했던 것이다. 그랬던 저자가 자신의 오빠와 함께 과거를 되짚어가며 이 책을 끝내 써냈다는 것은, 길고 긴 시간이 지난 지금에라도 가족 간에 외면했던 과거를 직시하는 시간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사과 편지"는 분명 독자들에게 고통스러운 책이 될 것이다. 그 누가 겪었더라도 괴로울 수밖에 없는 진실을, 가해자의 입을 통해서 듣는 것이 얼마나 더 가슴 아픈 일인지 이 책을 보기 전에는 결코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가해자가 스스로에게 서사를 부여하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피해자를 탓하며,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일련의 행위 속에 드러나는 진실은 더욱 몸서리칠 정도로 뼈아프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이 책의 말미에 이르러 가해자의 입을 통해 나온 사과는 더욱 절절했다. 은연 중에 하던 합리화도 멈추고, 구구절절한 변명도 제쳐놓고, 사실은 자신도 피해자의 귀책 사유로 인간 말종의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님을 시인하면서 사죄했다. 사과란 그런 것이다. 구구절절 늘어놓는 변명은 피해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피해자다움을 논하는 세상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구차한 자기변명은 사죄해야 하는 가해자의 올바른 자세가 결단코 아니라는 점이다. 변명하는 것조차 가해자답다고 하면 그제서야 알 텐가? 진정한 사과는 결국, 자신이 했던 행위를 온전히 직시하고 그것이 피해자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인지한 뒤에 재발 방지를 약속하며 고개를 숙이고, 무릎 꿇고 엎드리는 것이다.


물론 진정한 사과를 하는 장면에서도, 내심 가슴이 아팠다. 이 사과를 어째서 진짜 가해자가 하지 않고 피해자였던, 아니, 생존자인 저자가 하고 있는가. 가해자는 어떻게 죽어도 사과하지 않고, 생존자인 저자의 손끝을 통해서야 비로소 사죄하는가. 그야말로 가해자답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모든 과정은, 기록하는 행위를 통해 저자 스스로 상처를 승화시키는 행위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처의 승화는, "아버지의 사과 편지"를 읽는 독자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와 닿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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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가 죽기를 바랐고, 감옥에 가길 원했다. 그가 변하길, 진정으로 뉘우치고 사과하기를 바랐다. 사과는 기억하는 것이다. 사과는 일어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걸 얘기하는 것이다. 사과는 우리가 대면한 지금의 문제에서 앞으로 나아갈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19년 TED우먼 강의에서, 저자는 위의 말을 남겼다.

 

그렇다. 사과는 기억하는 것이다. 성폭행으로 상처입은 수많은 생존자들의 아픔을 기억하면서, 가해자들이 가해자다움을 벗고 자신을 성찰하며 사죄할 줄 아는 세상이 도래하기를.


 


 

 

아버지의 사과 편지

- 딸아 미안하다. 그건 강간이었다. -

 

 

지은이 : 이브 엔슬러

 

옮긴이 : 김은령


출판사 : 심심


분야 : 외국 에세이 / 여성학


규격 :133*193


쪽 수 : 208쪽


발행일 : 2020년 08월 14일


정가 : 15,000원


ISBN : 979-11-5675-835-8 (03300)

 

 


 

 



[석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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