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꽃처럼 곱디고운 우리 할머니를 소개합니다 - VOGUE KOREA 9월호 [사람]

글 입력 2020.09.1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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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절실한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마음 따뜻한 일은 힘든 상황 속 차갑게 돌아서 버리려 했던 내면의 한구석을 따스하게 해준다. 타인이 겪은 일인데도 마치 내게 다가온 기쁨처럼 저절로 깊은 웃음을 짓게 되는 나를 발견하면 그렇다는 증거일 것이다.

 

세상은 여전히 각박하고 무섭지만, 그만큼 소통과 나눔을 통함으로써 긍정적인 삶의 방향을 추구해 가려 하는 사람 역시 많고 많다. 최근, 여성 패션 잡지 '보그'의 9월호를 보고 그런 생각이 마구 들었다. 힘이 필요한 시기, 가장 본질적인 힘의 실체를 드러내 보여 줬달까. 순수하면서도 닮고 싶은, 앞으로 닮아가게 될 '그들'의 이야기를 보그가 담아낸 것이었다.

 

 

 

꽃처럼 곱디고운 우리 할머니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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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세 신현효 할머니

 

 

지난달, 전 세계 26개국 <보그>는 9월호의 주제인 '희망'(HOPE)을 테마로 잡지를 꾸몄다. 그중에서도 단연 이목을 끈 건, 고운 한복을 입고 환한 미소를 띤 채 포즈를 취한 할머니들의 사진 모음이다. 추상적 키워드인 '희망'의 깊숙한 의미를 간파하지 않았거나 정확한 설명이 덧붙여지지 않았음에도, 사진을 마주하면 금세 각자가 생각해왔던 희망의 형상을 끝도 없이 그려나가기 시작할 것만 같은 이미지들의 향연. 그렇게 세월의 깊이가 묻어나는 얼굴을 마주할 때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할머니'와의 추억이 어느덧 나를 감싼다.

 

사실, '그들'은 전문 모델도 아닌 순창, 구례, 곡성, 담양에 거주하시는 100세 전후의 지역민분들이다. 할머니들의 거주지인 네 지역은 실제 대한민국의 장수 지역으로 대표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보그는 전문적인 사진이라곤 한 번도 찍어본 적이 없는 8명의 할머니를 섭외해 '희망'의 현장을 만들고, 그 결과 의미 있는 삶의 메시지를 전하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보그는 왜 희망을 주제로 한 잡지에 100세 전후의 시니어들을 섭외했을까. 실현 단계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우연적이며 필연적이었다.

 

보그는 '희망'이라는 키워드를 설정한 뒤, 추상적인 이미지를 구체화하려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다 문득 서영희 비주얼 크리에이터가 보낸 '꽃을 품에 안고 향을 맡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희망의 이미지를 발견했다. 그게 바로 상징적인 9월호의 시작인 셈이었다.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데 있어 할머니 모델이 아닌 '시골에 사시는 100세 전후의 할머니'를 찍기로 결정한 것 역시, 보다 가치 있는 희망의 울림을 전할 수 있었던 탁월한 결정이었다. 비록 꽃 같은 세월은 아니지만, 꽃처럼 환히 피어 계신 할머니들에게도 삶의 희망을 전해드리게 된 것이다.

 

 

할머니 모델이 아니라 시골에 사시는 100세 전후 할머니를 촬영하기로 했다. 할머니의 시골집에서 고운 한복을 입혀 모양도 내고 꽃과 함께 촬영해 잡지에 싣고 액자로 만들어 기념 선물로 전달하고 싶었다. 할머니 집에는 본인의 예쁜 사진이 별로 없다. 자식 결혼식이나 환갑잔치의 단체 사진 혹은 영정 사진으로 찍어둔 것이 전부다. 할머니는 가끔 물으셨다. "우리 같은 늙은이를 왜 찍을라구 그랴." 우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할머니 얼굴이 제일 예쁘니까요. 젊은 것들이 할머니 얼굴을 보면요, 마음이 좋아져요."

 

- <보그> 9월호 잡지의 내용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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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세 하남순 할머니

 

 

<보그>는 할머니들의 섭외를 위해 장수촌 탐방을 시작했다. 그러다 관련 다큐멘터리를 다룬, 노화 연구 학자이기도 한 전남대학교 박상철 연구 석좌교수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 덕분에 순창군 건강 장수사업소와 연결돼 할머니 여덟 분을 섭외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10대 장수 군 중 지리산권에 속하는 네 지역의 할머니들을 우연한 기회와 만남을 통해 예상보다 빨리 만나 뵐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섭외가 이루어진 후, 지난 7월 <보그>는 여덟 분의 집을 사전 답사했다. 미리 인사도 드리고 입혀드릴 한복의 치수도 재며 이야기꽃을 피웠고, 그들로 하여금 평생 잊지 못할 새로운 경험과 그로 인한 행복감도 안겨주었다. 보그 측에서는 몇 달간에 걸친 수많은 회의와 시뮬레이션으로부터 추진된 기획의 수행이었으나 정작 주인공인 할머니들에겐 깜짝 선물로 다가왔을 것이다. 갑작스레 찾아온 인연, 왠지 모르게 기분 좋은 특별함을 지닌 이벤트가 눈앞에 펼쳐져 그들의 온몸을 설레이게 만들어주었을 듯하다.

 

 

93세 하남순

 

곡성군 석곡면에 사시는 하남순 할머니네는 그야말로 꽃 잔치다. 마당에는 만개한 화분이 그득하고 빨간 고추가 장미처럼 피어 있다. 방에는 손주가 준 카네이션을 말려 걸어두셨고 달력 그림마저 분재다. “할머니는 꽃이 왜 좋으세요?”

 

“시상에 꽃만큼 좋은 게 워디 있어.” 할머니에게 꽃반지를 만들어 끼워드렸더니 헤어질 때까지도 빼지 않으신다. “꽃만큼 좋은 게 또 뭐가 있어요?” “젊은 시절은 다 좋제. 농사짓고 애들 키우는 거 다 좋았어.”

 


한편, 사진을 찍고 끝나는 것이 아닌 해당 화보에 담긴 할머니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 및 짤막한 인터뷰를 적어놓은 글에서는 희망의 이미지를 구체화해나가는 보그의 진심 어린 시선이 돋보였다. 정감 넘치는 할머니의 집 전경을 돌아본 뒤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았던 그때의 장면을 글감으로 다루었을 뿐인데도, 묘사로밖에 떠올려볼 수 없는 말과 행동에선 새어 나오는 입김을 금방이라도 데워줄 것만 같은 따듯한 온기가 넘쳐흐르는 듯했다.

 

짧지만 깊은 인상을 주었던 대화에선 누군가의 자랑스러운 딸이자 아내, 자식들이 존경하는 어머니로서 살아온 한 사람의 고귀한 인생이 형형색색으로 그려졌다. 그 순간, 여성 패션 잡지의 한 호를 그저 성공적으로 꾸리기 위한 하나의 이벤트성으로만 그치지 않은 채, 기획에 참여한 모두가 짧은 시간 동안 뭉클한 정을 공유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사람과 사람 간의 끈끈한 정이 모여 연대한 순간, 새로운 희망이 꽃피우는 것처럼 말이다.

 

더하여 사전 답사를 마친 보그 측이 호남 지역에 불어온 세찬 장마로 약속된 촬영지로 떠나지 못해 할머니들께 전화를 드려 안위를 여쭙고 걱정을 한 모습에서도, 잡지에 수록되지 않은 진솔한 감정과 희망의 여정에 점차 물들어가는 진심을 볼 수 있었다. 결코, 일회적인 비즈니스로만 남을 수 없는, 말로 다 설명 불가한 무수한 감정이 그들 사이에 수십 번, 아니 수천 번 넘게 오갔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한 감정이 오간 결과, 사진에 나온 할머니들의 얼굴에는 자연스레 새어 나온 웃음이 묻어있다.

 

 

 

희망은 어디에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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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세 조옥순 할머니

 

 

희망을 주제로 한 <보그>의 9월호는 '진정한 희망의 원형'을 시각화했다. 특히, 시각화의 과정에 있어 9월호에 담길 사진의 주인공이 각자의 아름다움을 오랜 세월 가꾸어온 지역의 할머니들이라는 점에서 모두의 심금을 울렸을 것이다. 이상적이고 정형화된 미(美)보다는, 소박함과 잔잔함으로 삶을 물들인 채 누군가를 계속해서 사랑하고 돌보며 아껴왔던 한 사람의 발자취를 여과 없이 마주한 기분이었다.

 

<보그>는 이번 기획을 추진하며 한 가지의 기준을 정했다. 바로, 할머니와의 인터뷰에서 그들의 고단한 인생사나 슬픈 기억을 최대한 떠올리지 않게끔 하는 것이었다. 할머니께 좋은 추억을 물어보고, 지금 기분이 어떠신지 혹은 해주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지 등 그들의 현재를 담으려 노력했다. 그런 보그 측의 세심한 배려는 할머니들의 아름다운 현재와 울컥한 진심을 세상에 전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그래서인지 머리에 화관을 쓰고, 꽃 한 송이를 든 채 브이 자를 그리거나 연잎을 우산처럼 쓰기도 한 여덟 분의 할머니는 모두 소녀 같은 명랑한 미소를 짓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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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양분녀 할머니의 손

 

 

희망의 주체로서의 할머니들이 건네준 메시지는 '희망은 어디에나 있다'라고 말하는 듯한 그들의 표정으로부터 저절로 읽혔고, 사실 그들의 존재가 희망 그 자체이기도 했다. 코로나 블루를 겪는 젊은 세대들에게 보그가 전하고자 한 '희망'의 참된 이미지였던 것이다. 그런 참된 이미지, 즉 카메라가 담아낸 할머니의 주름 잡힌 손은 들려있는 꽃과 어우러져 잔잔히 빛난다.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아픔과 고단함은 잊은 채 평온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카메라가 피사체인 할머니들을 프레임 안에 구성한 방식 또한 보편적인 이미지의 변화를 이끌었다. 사진 안 곱고 맑은 할머니들의 모습은 '노인'이라는 단어가 내포한 죽음, 아픔 등의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드러났다. 그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느릴지라도 규칙적인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의미 있는 삶을 있는 그대로 조명한 것이었다. 그렇게, <보그>는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어디에서든 희망을 찾아내 왔고, 찾아 나가고 있는 아름다운 존재들인 '노인'을 다채로운 시선으로 시각화했다. 다채로운 시선의 지점을 찬찬히 짚어가 보며 되돌릴 수 없는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리라 다짐하게 된, 소중한 <보그>의 기획이었다.

 

젊은 세대들에게 '힐링'으로 다가왔던 보그의 9월호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선한 동시대의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평소에 잊고 살았던, 어쩌면 앞으로도 잊고 살았을지 모르는 본질적인 희망을 한 번에 쏟아내 품에 안겨준 호였다. 한편으로는, 개개인이 어느 정도 마음에 품어왔던 노인의 이미지를 새로이 변화시켜주기도 했다. 어쩌다 발견한 하루처럼, 보그가 100세 할머니들에게서 발견한 희망의 원형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 앞으로의 삶의 터전을 지속해나갈 원동력으로써 작용될 것이다.

 

희망이 있는 곳에 반드시 절망이 있듯, 시련과 고통이 자리한 곳에도 그것에 견줄만한 크나큰 희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감당치 못할 시련을 맞닥뜨려도 단 하나의 희망이라도 존재한다면 삶은 또다시 지속되기에, 자그마해 보일지라도 그것을 지탱한 채로 모든 이들이 꿋꿋이 살아갔으면 좋겠다. 이런 맥락으로 보았을 때 여덟 명의 할머니 개개인이 정의한 '희망'의 형태를 정감있게 수록한 9월호를 통해 보그가 전해주고자 한 메시지는,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의 기억과 마음 한편에 남아 긍정적인 희망의 언어를 발할 것이다.

  

 

사진 출처 : VOGU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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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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