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키치와 캠프에 대하여 [시각예술]

대중의 감수성을 대변하는 존재는 무엇일까
글 입력 2020.09.15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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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키치'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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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파티걸 컨셉으로 컴백했던

가수 유빈의 티저 이미지

 

 

'키치(kitsch)'라는 용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상업예술에 있어 '키치'는 무척 가까운 말이 되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상품들이 '키치한 감성'이라는 말을 자연스러운 마케팅 슬로건으로 내건다. 키치는 이처럼 작은 다이어리 소품이나 문구 잡화들부터 시작해, 일명 'mood'라고 지칭되는 대중 군상의 감성부터 개인의 애호까지 큰 부분을 일컫는다.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키치란, 어떤 '힙'하고 유니크한 추상의 무언가를 지칭할 수 있는 유일한 용어처럼 삼아진다.

 

흥미로운 것은, 현대 대중들이 쓰고있는 키치의 뉘앙스와 실제 미술사적 용법은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그린버그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키치란 엘리티시즘의 순수예술과는 상이한 격의 '대중의 저급한 예술'을 지칭한다는 하대와 조롱조를 내포한다.

 

미국의 평론가 그린버그는 1961년 『예술과 문화』(Art and Culture)를 통해 미술계에 커다란 영향을 가지며 현대예술 전반의 이론적 지주로 여겨진 인물이다. 키치는 1860년대에서 1870년대 사이에 뮌헨의 화가와 화상의 속어로 사용되었던 용어로, 하찮은 예술품을 지칭하는 말이었고, 이후 1910년대에 이르러 느슨하고 널리 유통되는 호칭이자 국제적인 용어로 사용된다.

 

키치는 어려운 예술이 아니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예술이었다. 마치 대량생산 공정처럼 예술품이 상품처럼 찍어져 나왔고, 일상의 사물들이 조형 작품이 되었다. 항상 보던 익숙한 것들이 예술이 된 것에 큰 흥미를 느낀 대중들은 쉽게 매료되었다.

 

그러나 그린버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상황은 매우 탐탁치 못했다. 쉽고 명료하며 유명한 스타들이 대량으로 찍어져 ‘예술’로 칭해지는 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을 강조하던 그린버그에게 예술가와 감상자 모두에게서 고민과 생각을 느끼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는 예술이었다.

 

‘하찮은 예술품’이라는 사전적 용어처럼, 그린버그 또한 키치에 대해 ‘하찮은’이라는 뉘앙스를 많이 드러낸다. 그린버그에게 키치란 이전의 예술을 모방했을 뿐, 전혀 새롭지 않으며 대중 예술을 현혹시키는 저급 예술이었다. 게다가 매우 기계적이고 상업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다.

 

90년대 말 어느 평론기자가 그린버그에게 ‘1960년대 이후 미국의 미술계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무엇이냐.’라고 묻자 그린버그는 ‘60년대 이후 미국 미술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답했다. 60년대는 추상을 주축으로 한 모더니즘 운동이 종식을 고하고, 팝 아트라는 새로운 구상이 부상하던 시기였다는 것으로 볼 때, 그린버그는 앤디워홀의 업적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번 구글에 '키치'를 검색해보자. 방대한 양의 비비드한 이미지들이 눈 앞에 쏟아져 나온다. 다시 한번 살펴보면 대중이 생각하는 키치란 기존의 '팝아트'가 가지고 있던 자유도 높은 대중예술의 속성과, 개인의 취향과 애호가 합쳐진 결산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2. 캠프, 새로운 감수성의 제안


 

키치가 지칭하는 폭은 과거보다 확장되었다. 대량생산, 대중예술 등의 조건을 전제로 했었다면 이제는 거시적으로 볼때 '대중의 미적 감수성'을 지칭하고, 미시적으로는 '개인의 취향과 애호'라는 의미까지 내포한다. 그린버그의 비판적 시각을 배제하고 보아도 기존의 키치는 이 의미를 모두 포괄하기엔 적합하지 않아보인다. 'mood'라는 추상적인 단어 하나에 담긴 수없이 많은 결의 미감들을 단번에 일축시킬 수 있는 용어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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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소설가이자 예술평론가, 문학비평가, 인권운동가로 활동한 수잔 손택은 '캠프(Camp)'가 그 답이 될 것이라고 제안한다. 손택이 1964년 『Parisan Review』 가을호를 통해 발표한 《캠프에 관한 단상》은 ‘캠프’라는 창의적 감수성을 58가지의 단편적인 생각으로 남긴 것이다.

 

이전에 언급한 그린버그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듯, 당시 학계는 고문화만 다루는 풍조가 만연했다. 하지만, 손택은 하위 문화에 대한 분석으로 60년대 미국의 고급 문화와의 경계과 붕괴되는 것을 설명하고, 대중문화시대에서 그에 맞는 감성의 변화와 취향의 확장을 언급했다. 즉,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절대적인 장벽이 존재하던 시절, 캠프를 통해서 손택은 대중문화(pop culture)를 받아드릴 수 있는 토대를 닦아 놓은 것이다.


1909년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등재된 ‘캠프'는 ‘과시하는, 과장된, 영향을 미치는, 연극적인' 그리고 '동성애와 관계된'이라는 형용사다. 정확한 어원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프랑스어 동사 ‘se camper(과장된 방식으로 포즈를 취하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Molière의 소설에서는 캠프를 동사로 사용한다. ’Camping on one leg, like a comedy king’에서 camp는 ‘연극적이고 과장됨’을 내포한다. 형용사로서의 camp는 19세기 중엽 Fanny와 Stella가 주고받은 편지에서 발견되는데, 이들은 여성의 옷을 입는 행위로 충격을 주어 기소되었던 남성들이다.


이처럼 ‘캠프’가 무엇인지 쉽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예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공통된 특징은 인위,과장과 중성성(또는 양성성)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캠프가 어원대로 '과장'이나 '인위'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의 개념을 58가지의 단편적인 생각(단상)으로 정리했다는 것은, 어떤 감수성을 정의하고 논하며 개개인의 취향을 카테고리 안에 범주화 시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반증한다.


손택은 캠프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해 많은 사례의 예시를 들어 설명한다. 아르누보 양식, 베르사유 궁전, 가우디의 파밀리아 성당 등을 캠프로 규정한다. 이러한 탐미주의를 조형적 양식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그 미감에 자연스럽게 끌리는 '취향'과 비슷한 뉘앙스로 정리하고 대변하고자 했다.

 

 

 

3. 캠프: 패션에 관한 단상



'캠프'스러운 것을 가장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례는 2019 Met Gala쇼다. 멧 갈라는 1948년부터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코스튬 인스티튜트에서 개최하는 연간 전시 기금 모금을 위한 갈라행사로서, 패션지 <보그>의 컨설팅이 더해지며 현재 세계적인 파급력을 자랑하는 이벤트로 자리잡았다. 이 쇼의 가장 큰 특징은 매년 특정한 코스튬 테마를 드레스 코드로 선정해 다양한 분야의 셀러브리티의 스타일을 볼 수 있다는 것인데, 2019년 멧 갈라 쇼의 테마는 <캠프: 패션에 관한 단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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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가가, 헤리 스타일스 등 다양한 셀럽들의 코스튬에서 '캠프'스러운 면을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내가 꼽기에 인위, 과장, 중성성이라는 세가지 요소와 탐미주의적 취향이 모두 느껴지는 사례로는 에즈라 밀러가 가장 적합해보였다.

 

얼굴 한가득 잔뜩 풀메이크업을 한 눈을 그려넣고, 손에는 페르소나를 상징하듯 남성의 다부진 얼굴을 한 마스크를 들고, 수트 위에 코르셋을 입는다. 그의 에티튜드는 묘하게 섹시한 분위기를 내포하며, 이 난해하고 난잡한 코스튬 속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에 대한 감상이 슬며시 자리잡는다.

 

꽤나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무엇으로 기인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과하지만 좋아보이고, 눈이 가고, 무의식 중에 마음에 드는 요소를 찾아 탐닉하게 된다. 이런 것, 그리고 이런 심리 등의 모든 것이 바로 캠프에 넓게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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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의상만으로는 크게 와닿지 않는다면, 앞서 언급했던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함께 살펴보자. 사실 성소인 성당 공간이 무려 100년이란 시간을 훨 넘게 지었는데도 완공을 하지 못했을 정도로 크고, 장엄하며, 화려하게 지어져야하는 이유는 없을 것이다. 스테인드 글라스의 유리창 색상부터 내부의 기둥 모양, 천정, 외부의 모습까지 어느 하나 과하지 않은 것이 없다. 모든 것을 아름답게 지으려고 한 건축인 것처럼 공간의 모든 요소가 저마다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강하게 주장한다.

 

스페인 여행 길에 파밀리아 성당을 직접 가봤던 한 지인은 내게 이런 말을 남겼었다. '안 믿는 사람도 그 곳에 들어가면 없던 신앙심이 생기겠다.' 아주 강력한 미적 울림과 엑스터시를 경험한 소감이라 할 수 있겠다. 단순히 어떤 한 부분에서 기인한 것이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무언가'가 마음을 동요하게 했다. 이것이 캠프다.

 

 

 

4. 키치와 캠프, 대중의 감수성



키치는 캠프를 통해서 고급화된 변종으로 지식인들에게 침투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많은 비평가들이 워홀의 팝아트를 소비주의를 부추기고 재현하는 퇴폐 예술이라 비난한 반면, 손택은 이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캠프 개념의 이해를 통해서, 키치를 아방가르드의 부정적인 타자로 이해하는 편협성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캠프를 지성적인 엘리트 집단 사이에서 인식의 한 형태로 바라본 것은 캠프가 온전히 ‘대중친화적’이지는 않다는 캠프의 이면을 반증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수잔 손택은 캠프에 관한 단상 마지막 부분에서 분명하게 ‘팝아트는 캠프와 다르다’는 구분을 짓는다. ‘다소 캠프와 부합되는 면은 있으나, 캠프보다 밋밋하고 건조하며, 진지하고 초연하다. 궁극적으로, 허무하다’는 말을 남기며. 진지한 것을 경박한 것으로 바꿔버리는 캠프는, 일상적 사물을 예술의 컨텍스트로 끌어들이는 팝아트와는 엄연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팝아트가 그야말로 대중적인 이미지인 반면, 캠프는 연극적으로 과장된 경험이자, 캠프 취향 자체가 개인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분류할 때, 키치와 팝아트가 ‘이해하기 쉽고, 즐기기 쉽다.’는 ‘인식’이 먼저 머릿속에 자리잡는 이성적 감상에 가깝다면, 캠프는 비교적 우리에게 감정적으로 다가오며 마음에 깊게 자리잡는 감성적 감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캠프와 키치의 유사점은 많은 이들이 쉽게 접할 수 있고 소수의 엘리트와 상류층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이며, 차이점은 ‘선택의 폭’과 ‘사랑’이다. 키치는 대중이 마다할 이유가 없던 문화였다. 그러나, 캠프는 어떤 개인의 감수성과 취향에 가깝다. 독특한 캠프 취향은 자신이 즐기는 대상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일종의 사랑이라 볼 수 있으며 단순한 애호를 떠나 함께하는 것이다. 캠프에는 키치가 가지는 사회적 환상이라든지 대상에 대한 동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그것의 스타일만을 즐길 뿐이다. 또한, 키치가 가지는 고급문화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절실함, 혹은 가치의 모방이라는 내재적 심리를 읽을 수 없다. 이러한 점들이 키치와 캠프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키치한'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지칭하는 것이 어떤 양식적 특징을 가지는 것인지 혹은 마음 깊은 곳의 내재된 감성과 애호에 관련된 것인지 물어보고 싶다. 지금 '키치하다.'라고 칭하고 있던 것은, 진정으로 키치한 것일까, 혹은 캠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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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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