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모자, 오이, 2 그들의 이야기 - 호텔선인장 [도서]

계절은 아름답게 돌아오고, 재미있고 즐거운 날들은 조금 슬프게 지나간다.
글 입력 2020.09.09 13:1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태풍과 함께 가을이 온 것 같다. 비가 안 오는 날의 낮 하늘은 점점 높아지고 푸르러만 간다. 밤에는 가디건을 입어야 할 정도의 쌀쌀함이 뒤덮인다. 이렇게 날은 좋은데,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친구와 나들이를 못 간다는 게 참 슬프다. 혼자만의 여유로움을 가지며 밖을 감상할 시간도 없다. 개강을 한 이후로 과제가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날이 좋으면 뭐한는가. 집에서 온라인으로 수업 듣고, 쌓이기 시작한 과제를 해야 하는데. 친구와 카페로 가서 같이 과제하는 것만도 좋은데, 그것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에 스트레스만 쌓여간다. 그래서 화풀이나마 날이 좋으면, 왜 날이 좋냐고 괜히 투덜거리는 요즘이다.

 

도서관에 못 간지도 꽤 오래됐다. 그래서 책을 읽으려면 책을 사야만 하는데, 그러기엔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들고 조그마한 단칸방에 더 이상 책을 둘 공간도 없다. 그렇기에 요새는 예전에 읽은 것들을 다시 되짚어 보는 중이다. 오랜만에 읽으니 새롭게 와닿는 소설이 꽤나 많다. 그리고 그러던 중 이번엔 지인의 추천으로 알게 된 《호텔선인장》이 손에 닿았다.

 

 

호텔선인장.jpg


 

어느 시가의 동쪽 변두리에 있는 낡고 허름한 회색의 석조 건물. 아파트인데도 이름이 호텔선인장인 곳. 이곳에서 모자, 오이, 그리고 숫자 2는 처음 만나게 된다.

 

3층의 건물로 이루어진 아파트는 한 층에 4개의 호실이 있다. 그중 3층 한구석에는 '모자', 2층 한구석에는 '오이', 그리고 1층 한구석에는 숫자 '2'가 각각 살고 있었다. 세 사람은 죽이 잘 맞았다. 밤이 되면 오이의 방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시거나 음악을 들으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위스키를 마시는 모자, 맥주를 마시는 오이, 그리고 술을 못 마시기 때문에 자몽 주스를 마시는 숫자 2. 그러나 이들이 처음부터 잘 죽이 잘 맞은 건 아니었다. 세 사람의 성격이 모두 제각각이기 때문이었다.

 

무엇이든 깊이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며 개인적이지만 가족과 친구를 소중히 생각하는 오이. 반면에 무엇이든 분명하지 않은 것을 못 견뎌하는 성실하면서도 고지식한 숫자 2. "나중 일이야 내 알 바 아니지만."이란 말버릇을 달고 다니는 모자. 독특하다면 독특하고,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다면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이들의 첫 만남은 요새의 이웃들 간의 관계처럼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것에서 시작된다. 아파트 최고 고참인 모자는 숫자 2가 이사 왔을 때 관심이 없었고, 숫자 2도 마찬가지였다. 오가며 마주칠 때마다 인사 정도는 했지만 딱 그뿐인 관계였다. 그러던 중 오이가 이사를 오게 된다. 2는 워낙에 의심이 많고 겁이 많기에 이번에도 새로운 이웃에게 말을 걸지 않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오이가 방안에 온갖 운동 기구를 들여놓고 매일 몸을 단련했기 때문이었다. 오이가 줄넘기를 할 때마다 밑에 살던 2의 집 천장에서는 먼지가 떨어졌다. 흔히 있는 층간 소음이었다.

 

다투는 것을 싫어하고 낯을 가리는 2는 오이의 방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소음에 시달리고 있다고 정중하게 말했다. 오이는 2의 말을 듣고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진심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그럼, 앞으로 운동은 그만둬 주시는 겁니까?"라는 2의 말에 놀라며 "운동을? 왜죠?"라고 되물었다. 소음은 소음이고 운동은 운동이다, 라는 이기적인 생각보다는 정말 운동을 왜 그만둬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었다.

 

오이를 설득하기 위해 2는 모자의 방으로 갔다. 모자 또한 오이의 운동 때문에 피해라고 한다면 오이는 분명 운동을 그만둘 터였지만, 2의 예상과 다르게 모자는 상관없다 대답했다. 의기소침해진 2에게 모자는 소음에 대한 조언과 제안을 해줬다. 그리고 세명은 얼떨결에 2의 방으로 가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들이 인연을 이어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그 후 세 사람은 종종 같이 술을 마셨다. 그리고 모자를 따라 경마장에 가기도 했고, 비 오는 날에는 외국을 상상해보는 시간도 가졌다. 아파트에 새로 이사 온 여성을 동시에 사랑하기도 했으며, 비밀을 얘기하는 시간과 우정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그리고 셋이서 함께 여름휴가를 가기도 했다.

 

 

photo-1524601500432-1e1a4c71d692.jpg

 

 

《호텔선인장》은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이다. 저마다의 개성과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 만나 하루하루를 보내는 이야기이다. 모자, 오이, 2가 등장해서 엄청 특별하고 신기한 일들이 일어나는 게 아니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동안 당신은 모자, 오이 2와 비슷한 사람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이 겪은 이야기를 당신도 겪었을지 모른다. 왜냐면 그 정도로 소소하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야기이기니까.

 

그렇다 해서 이들의 추억이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저마다의 개성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이 만나 일어나는 일상 속에서 당신은 분명 무언가를 발견했을 것이다. 성격이 제각각인 사람들이 만났다는 것에서 다양한 만남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며, 세 사람의 따뜻한 우정을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호텔선인장을 떠나는 장면에서 앞으로 이들의 인연은 어떻게 될지, 또한 코로나 때문에 만나지 못하고 있는 친구들과 당신의 관계에 대해 떠올릴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책 서두에 적힌 말이 다시 생각날 것이다.

 

 

계절은 아름답게 돌아오고, 재미있고 즐거운 날들은 조금 슬프게 지나간다.

 

 

책을 읽으니 친구들이 더욱 그립다. 같이 모여 수업을 듣고 카페에서 과제하던 시간들이 자꾸만 생각난다. 하지만 계절이 다시 돌아오듯, 언젠가는 또 함께 카페에 갈 수 있는 때가 올 거라 믿는다. 그때까지 잠시 만남을 미뤄두는 것뿐이다. 재미있고 즐거운 날들은 조금 슬프게 지나간다 했지만, 아직은 지나갈 시기가 아니니까.

 

 

[김승윤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