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독립예술로부터 전해받은 연대의 가치 -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20 온라인

글 입력 2020.09.04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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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지만 잔잔한 페스티벌이 집으로 배송됐다. "현실에서는 관객이었던 내가 이 세계에서 주인공?!"이라는 문구가 나를 웃음 짓게 했다. 엮어진 작은 밧줄을 풀고 상자를 열자 페스티벌의 막이 올랐다.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개막식부터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서약서 작성부터 입장권 팔찌, 그리고 추억이 깃든 맥주 사탕까지. 더하여 정보가 담긴 책자와 게임 설명서를 손에 든 채 축제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나름의 준비를 마쳤다. 앞서 묘사한 준비 과정은 사실 누가 보아도 신박한 방식인데, 방구석에서 소소히 즐기는 소박한 움직임은 어느덧 익숙해져 보편적으로 자리했음을 실감했다. 행하고 있는 움직임에서 시대에 발맞추어 가는 나의 존재가 느껴졌다.

 

한편, 진정한 페스티벌의 세계로 가기 위해선 USB를 연결해야만 했다. 현실과 가상을 연결해주는 연결망 같은 거랄까. 그 순간은 괜히 긴장되기도 했고, 어떠한 콘텐츠들이 '독립예술'이라는 이름하에 끝없이 펼쳐질지 기대감에 부푼 감정이기도 했다.

 

개막식이 열리고, 폐막식을 진행할 때 쯤이면 프린지 페스티벌 측에서 제시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예술가들의 _______ 축제'에 대한 빈칸을 채울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런 생각과 동시에, 비로소 예술가들의 색다른 감각이 묻어난 연대의 장에 접속할 수 있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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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페스티벌의 첫 화면

 

 

세상에 예술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일상에서 전해 받을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보편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전해 받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주고, 현재보다 앞서나가며 꿰뚫어 보는 감각을 일깨워준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프린지 페스티벌은 '예술'이 걸어온 진정성 있는 발자취에 외면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기에, 온라인 페스티벌의 첫 화면을 보자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정식으로 맞대면한 채 최적의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예술계 구성원들의 노력이 묻어나 있는 듯했다. 비록 현장성이 중시되는 콘텐츠에 가까운 페스티벌이 비대면으로 진행되는 데 있어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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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시스템으로 구현한 축제의 현장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한 모습이었고, 가보지 않은 실제의 공간과는 또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관객과 주인공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 또한 가능했다. 낯설었지만 그 낯섦은 긍정적인 방향에 속해있었다.

 

긍정적인 방향에 속해있는 낯섦은 시간이 흐른 뒤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나갈 '혁신'이 되기 마련이다. 그러한 혁신의 현장에 있는 기분이었다. 그곳은 마치 '페스티벌'이라는 네 글자에 담긴 고정관념과 그로 인한 한계의 경계선을 무참히 지워버리려는 듯 보였다. 추상적인 강력한 외침의 물결이 모여 선명한 형상으로써 나타난 변화의 장소였던 것이다.

 

그 장소에서, 자기 자신조차 고립을 자초하게 하는 마스크 한 겹을 벗어던지고 비로소 자유로운 소통의 공간을 마주한 것만 같았다. 사람 대신 가상의 캐릭터를 앞세웠는데도, 페스티벌을 함께하는 모든 캐릭터가 마치 사람인 양 무척이나 반가웠다. 코로나 시대에 직면하면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모두 간절해졌기 때문이었을까. 기쁘면서도 왠지 모를 씁쓸함이 감도는, 복합적인 상태였음은 분명했다.

 

 

 

김규년 - Thing and video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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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페스티벌에 참가한 총 23팀의 예술가들은 각자 다른 표현의 방식으로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독립예술인 만큼, 그들은 신선한 자극을 형성함으로써 환기 작용을 이루어 기분 좋은 충격을 얻어가게끔 관객들을 유도하려 했다. 대사와 몸짓, 심지어는 표정 하나하나까지 몰입감 있는 전율을 발산하며 시대에 무수한 형태의 언어를 던지려는 모습이었다.

 

 

영상과 실제는 어떻게 다른가? 다큐멘터리는 실제인가? 비대면 상황으로 인해 영상을 통해서 작품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발생시킬까? 비디오는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있나? 라는 질문들을 만들어보고 싶다.

 

- 김규년 작가의 "Thing and Video 3" 소개글 중

 

 

이목을 끌게 했던 김규년 작가는 10분간의 영상설치를 통해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Thing and Video 3"을 선보였다. 이는 실제의 선풍기, 녹화된 선풍기, 촬영되고 있는 선풍기, 영상으로 보여지는 선풍기들이 한 공간에 동시에 보여지고, 3명의 비디오 감독들이 하나의 상황을 각기 다른 다큐멘터리로 만든 작업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전 세계가 마주해와서인지, 작가가 건넨 질문들은 직접적으로 다가와 최소 한 번의 고찰을 행하게끔 만들었다. 현재로서는 '본다는 것'의 의미를 정의하는 데 있어 전과는 꽤 다른 차원에서의 해석이 이루어지기에, 마냥 단순히 받아들여질 개념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볼 것인지, 어디서 봐야 하는지에 대한 세분화된 정보가 우리에겐 중요한 논점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김규년 작가의 작업도 그러한 논점으로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보는 것이 중요해진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사물을 그 자체로 보는 것과 덧대어진 사이의 간극에 위치해 대상을 바라보는 행위. 두 행위를 두고 좋다 나쁘다를 분명히 말할 순 없겠지만,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가변성을 두 행위가 내포하고 있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특성을 놓고 보았을 때, 사람들의 대답은 때에 따라 한쪽으로 치우칠 것이라는 결과도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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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 영상과 실제의 간격은 먼발치에서 측정되었다. 그러나 최소한 지금, 현 상태에서의 두 간격은 가깝고도 가깝다. 영상이 실제인지 실제가 영상인지 감히 정의하기 힘든, 혼돈 그 자체인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 상황에 있는 우리는 비대면으로 마주한 사람이 친근하기보다는, 가상의 인물 같기도 한 왠지 모를 이상함을 느낄뿐더러 점차 자신이 보는 모든 현상을 실제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인 꾸밈을 받은 페이크 다큐멘터리처럼 바라보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실제는 곧 다큐멘터리일까?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조차 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답변일 듯하다. 현실조차 마스크 너머에 위치해 하나의 간극을 형성한 채 존재해있듯, 사실 우리의 눈앞에 보이던 실제는 인위적으로 조작된 모습일 수도 있다. 이와는 반대로, 오히려 영상이 실제보다 더 깨끗한 양심을 품고 있을 수도 있다. 이렇듯 답변은 시시각각 변하지만, 그 답변은 지금의 시대상을 정확히 반영한 결과이기에 충분히 고찰해볼 만 하다.

 

10분가량의 영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며 정돈되지 않은 느낌을 주지만, 그 속에서 표출된 메시지는 끝도 없다. 그렇게 끝이 없는데도, 무수한 생각이 최종적으로 가리키는 하나의 결과는 예상외로 정확하다. 그리고 이는 곧 독립예술의 특징을 반영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즉, 한번 보면 이해가 안 되지만 계속 보고 또 보고 곱씹기를 반복한 끝에 무릎을 '탁' 치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 그게 바로 독립예술 장르의 매력이 아닐까 싶었다.

     

 

 

권재헌 - 비움.(Emp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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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내면은 차가우며 뜨겁다. 손으로는 잡을 수 없는 무수한 연기들로 채워 나를 움직인다. 차가움은 발화했으며 뜨거움은 증발했다. 내면이 차가우며 뜨거운데, 차가움이 발화하고 뜨거움이 증발했다면 그의 내면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걸까? 무수한 연기로 자신을 채웠기 때문에 연기가 가득할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내면 또는 연기로 가득 찬 내면. 둘 중 무엇이든 연기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고 그렇다면 텅 비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 "비움.(Empty)" 소개글 중

 

 

'비움'을 얘기하고 싶어 하는 예술가가 있다. 권재헌 작가는 몸의 언어로 시공간을 차지한 채 비움에 관해 이야기한다. 현란하나 절제된 규칙이 자리한 신체적 움직임은 마치 일정한 속도를 지닌 채 스쳐 지나가는 파노라마 같았다. 그와 동시에, 작가의 얼굴에 씌워진 가면은 인간의 안과 밖을 말하려는 듯했다.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우리와 본래의 우리에 대해서 말이다. (현재로선, 마스크가 일종의 가면 역할을 수행해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코로나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외부보다 내면으로 더 파고들게 되었다. 파고들고 또 파고들어 깊은 본인의 내면 끝까지 들어가 혼자만의 시간을 견딘다. 그 시간은 처음엔 달콤하나 지속될수록 외롭고 지치며 고되기도 하다. 복합적인 외로움이 속에서 마구 들끓어 결국 수습할 겨를도 없이 내면을 넘치게 할 때면, 흰 연기는 마침내 바깥으로 내뿜어져 외부를 지배한다. 연기는 곧 사라질 속성을 지녔으나 예술가에겐 그 사실이 중요치 않아 보였다. 예술가는 오롯이 본인을 이루는 신체의 안과 밖에만 집중했다.

 

연기가 퍼진 형태는 예술가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작품에 있어 주요하게 자리했다. 본인만 알고 있던, 혼자 견뎠던 모든 것들이 모두 빠져나와 덮을 수도 없게 마구 퍼진 모습이었다. 예술가는 공간에 퍼져있는 연기의 온도를 온몸으로 느꼈다. 차갑기도 하고 뜨겁기도 한 무수한 연기가 한 사람에게서 벗어나는 순간,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쓸쓸한 존재가 극대화되는 듯했다. 하지만 전자에 더 가까운 해석을 하고 싶었다.

 

비움의 가치를 알아감이 필요해진 시점에, 예술가 권재헌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연기의 속성으로 새로운 '비움'의 정의를 내리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내세운 비움의 가치를 알기 전이었기에 인간의 얼굴에 덧대어진 가면, 즉 페르소나를 내포한 나약한 존재가 내뿜는 연기는 금방 사라져버릴 듯 위태로우며 타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 게 분명해 보였다. 그렇게, 연기로 가득 찼던 내면은 어느덧 아무것도 남지 않은 무(無)의 상태로 변질하여 공허한 상태로의 지속성을 띠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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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긴 서사의 끝에는 결국 사람의 손에 의해 당당하게 들린 페르소나의 가면이 남아 클로즈업됐다. 비움의 가치를 알게 해 준 가면의 존재를 칭송하듯 말이다. 반면, 예술가는 자신의 실제 얼굴을 바닥으로 돌려 밀착시켰다. 마치 쓸모없어 반드시 비워내야만 하는 유(有)의 존재를 비워내고 홀가분한 상태로, 즉 무(無)의 상태로 완벽히 돌아간 것처럼. 그러나 그러한 해석이 옳은 것인지에 관해서는 알 순 없다. 다만, 한 예술가가 던진 물음에 대해 다양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대상은 오직 관중들 뿐이기에 나름의 해석을 내려본 것뿐이었다.

 

무언가를 채우려 하는 욕심보단, '비움'을 지향한 채 비워냄으로써 비로소 빈 상태로 자리하는 연습이 필요한 상태에 우리가 모두 처해있기에 그렇게 해석해보았을지도 모르겠다. 페르소나는 이제껏 상처, 진정한 나를 숨기는 가면으로서 일반적인 정의를 거쳐왔다. 나 역시도 그런 정의를 내렸더랬다. 하지만 작품을 감상한 후, 현재로서는 비워내는 연습을 위하여 하나의 가면쯤은 지니고있어도 될 듯해 보였다.

 

텅 빈 상태로 회귀하려는 마음. 그것은 잔잔하다 격렬해지고 또다시 잔잔해지는, 끝없는 예술가의 몸짓으로부터 내면을 정리하고 다듬어나가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그 과정이 지나면 가면 속에 존재한 나 자신의 모습은 비로소 선명해질 것이다. 다만, 그 결과로의 성취를 위해 잠시나마 가면을 쓴 것뿐이다. 그런 가면은 가끔 필요하지 않을까?

 

예술가는 꾸준한 몸짓을 통해 비워내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순간을 지켜보는 관중들은 비움의 미학을 느끼며 함께 연대해나갔다. 비록, 그는 한 공간에 홀로 자리한 채 작품의 서사를 이끌어 나갔지만 그 서사의 과정과 마무리는 누군가의 시선들로부터 공유되고 또 공유됐다. 그렇기에, 모두가 비슷한 카테고리에서의 감각과 감정을 전달받아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독립' 예술로부터 '연대하는 가치의 미'를 깨닫게 된 아이러니한 순간이었다.

 

시기상 비대면으로 추진됐지만 자유롭게 작품을 시도하고 실험하는, 따라할 수 없는 각자만의 개성을 가진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대면할 수 있었던 2020 프린지. 이번 축제의 모토에 맞게 다양한 예술 활동을 주목하고 지지하는 연대의 마음이 생겼으며, "함께 만드는 독립예술축제"를 이루어나갈 수 있었다. 2021 프린지 역시, 더 큰 자유의 날개를 달고 제약 없는 세계로의 도약을 해나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또다시 마주할 그 날을 고대하며 : 서울프린지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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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서울프린지페스티벌

 

 

다사다난한 올해가 계속되고 있지만,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은 제 할 일을 톡톡히 해냈다. 시도에 시도를 거듭한 축제의 전반은 관객들에게까지 수많은 가치를 전해주었다. 힘든 시기임에도 그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예술가들의 진심 어린 목소리는 문화비축기지에서 온라인으로까지, 상상 이상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은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독립예술축제이자 축제공동체를 지향하는 민간단위 최대 규모의 예술축제이다. 1998년 "한국적 프린지의 실험과 모색"을 모토로 상업적인 대중문화와 권위적인 순수예술의 대안으로 시작한 '독립예술제'를 전신으로 하며, 새로운 문화예술로 활발히 교류하는 장을 만들고자 한다.

 

-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20 기본 소개글 중

 

 

오프라인에서의 상황은 직접 겪어보지 못했으나, 최소 온라인 페스티벌만큼은 축제가 지향하는 기본적인 사안에 도달한 모습이었다. 적극적인 교류에 힘쓰며 예술을 통한 건강하고 풍성한 삶을 끌어낸 프린지. 독립예술로부터 환기될 수 있는 삶을 매 순간 느낄 수 있었던 일주일간의 여정이었다. 관객이자 주인공으로서 활동해보며 나름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볼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프라인만이 지닐 수 있는 특별한 생생함도 언젠가 경험해보고 싶었다. "Thing and Video 3"에서 김규년 작가가 영상과 실제가 지닌 차이에 관한 보다 현실적인 의문을 시사해주었던 것처럼, 예술 작품에 있어 숨소리가 들려오는 현장감은 결코 저버릴 수 없는 특별함을 가져다준다. 모두가 그 현장을 그리워하며 간절히 원하고 있음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감정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에, 작품을 보는 중간중간마다 안타까움과 아쉬움의 감정도 일말의 여운처럼 남아있기도 했다.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던 일주일간의 방구석 페스티벌, 그 서막의 끝이 보였다. 물 흐르듯 유연히 흘러간 7일간의 축제 끝에, 아쉬운 폐막식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자연스레 인지하게 된 순간이었다. 우리의 삶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는 독립예술이 문화의 장에서 활발히 전개됨을 보다 현실감 있게 마주할 수 있는, 간절한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방구석에서 프린지 페스티벌의 폐막을 알렸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21을 고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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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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