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끝이 보이는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영화]

글 입력 2020.08.31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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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지긋지긋한 지금의 상황은 언제 끝날까?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걸까? 그나저나, 끝이 있기는 한가?

 

사람들이 말하던 종말을 떠올려본다. 다시 찾아올 빙하기와 지진, 먼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외계생명체에 대한 이야기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무언가가 끝내는 찾아오고 말 거라는 상상 뒤에 무슨 심리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늘 그런 이야기 하기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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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까지 21일>은 보통의 지구멸망 이야기들과 제법 비슷하게 시작한다. 소행성이 곧 지구에 충돌한다는 뉴스와 함께 인류의 공식적인 종말은 3주 앞으로 다가온다. 종말과 재앙을 다룬 영화라면 으레 대단한 능력을 갖춘 주인공이 지구를 구하거나, 지구까지는 못 구하더라도 소중한 이들만은 어떻게든 구해낸다는 이야기가 주가 되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무미건조하고 의미랄 게 없는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중년 남성 도지는 똑똑하지도 않고,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애초에 영화는 소행성 충돌을 막으려는 시도나,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노력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소행성 충돌을 앞둔 지구의 인간들, 21일 안에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처지의 인간들이다. 어떤 이들은 술과 약에 진탕 취해 낮도 밤도 없이 즐기고, 어떤 이들은 울기만 한다. 회사 동료는 숨 막히는 회의감에 자살하고, 가사도우미는 소행성 충돌이 고작 며칠 남았을 때마저 찾아와 청소를 마친 뒤 ‘다음 주에 보자’고 인사를 건넨다.

 

그 안에서 주인공 도지는 길을 잃은 것처럼 공허하다. 도지가 아내와 결혼한 이유는 홀로 죽고 싶지 않아서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종말이 다가오자 도지의 아내는 도지를 떠난다. 모두가 자신의 욕망, 그리고 신념을 좇아 얼마 남지 않은 삶에서 의미를 건져 올리는 와중에, 도지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조차 명확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그간 얘기 한번 나눠본 적 없던 옆집의 페니와 우연히 만나게 된 도지는 페니가 보관하던 우편물 뭉치에서 자신의 첫사랑이 보낸 편지를 발견한 뒤, 그를 찾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첫사랑이 연락했었다는 사실을 몇 달이 지나서야 도지에게 알려준 꼴이 된 페니는 미안한 마음에 도지와 함께한다. 이렇게 두 사람의 여행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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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초반부에서 도지는 시종일관 지치고 혼란스러운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물론 삶의 의미나 목적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새기면서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지만, 남은 시간이 3주 밖에 없다는데 도지는 꽤 오랜 시간 갈피를 잡지 못한다. 아내가 떠났음을 알고 있는 도지의 친구가 그를 종말 파티에 초대해서 새로운 여자를 소개해주고, 그 친구의 아내가 자신에게 키스를 시도하기도 하는 모든 상황이 도지에게는 불편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이 지점에서도 <세상의 끝까지 21일>은 그동안 숱하게 봐온 재난 영화와는 차이가 있다. 영화에서 도지는 어린 시절 자신을 떠난 아버지 외에는 별다른 연고가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게다가 그가 첫사랑을 찾아갈 계획을 세우는 것은 첫사랑이 보낸 편지를 읽었기 때문이지, 만약 그가 그 편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면 아마 도지는 끝까지 그를 찾아갈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보통 재난 영화에서 주인공에게는 소중한 가족, 혹은 연인이 있고, 주인공이 그들과의 사랑을 재확인하는 장면 역시 자주 등장한다. 반면 도지에게는 지켜야 할 자식이나 연인, 소중한 친구가 없다. 그래서 도지는 죽음을 앞두고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을 찾지 못한다. 자신이 원하는 바에 대해서는 제대로 생각해본 적도 없고,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곧 세상이 끝난다니? 그가 마주한 막막함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자신이 죽을 때 무엇을 후회하고 그리워하게 될지 알지 못하던 도지는 편지를 읽은 뒤 첫사랑을 만나려고 한다. 말하자면 도지가 첫사랑을 찾아가는 이유는 자신이 진실한 감정을 나누었던 유일한 관계를 죽기 전에 회복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이고, 그 관계가 자기 인생의 마지막 행복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께 인적 드문 도로를 내달리며 도지와 페니는 서로에게 새로운 감정을 가지게 된다. 여러 밤을 함께 보내며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종말이 아니었다면 겪지 못했을 경험들을 공유한다. 후반부에 이르러서 도지는 첫사랑 올리비아의 집에 결국 도착하지만, 그를 만나지 않은 채 문 앞에 편지만 두고 돌아온다. 더는 올리비아를 만나는 일이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페니 역시 영국에 있는 가족을 만나려고 했던 원래의 목적을 두고 다시 도지에게 돌아온다. 두 사람은 과거의 관계와 미래의 삶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지금’의 감정에 집중한다. 가족이나 오래전 헤어진 사랑이 아니라 고작 며칠 전에 만난 낯선 이와 마지막을 함께 하기로 한 두 사람의 결정이 어쩌면 뻔한 로맨스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를 정말로 살게 하는 것이란 결국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와 공유했던 순간의 감정 아닐까? 올리비아와 함께했던 사랑 또한 도지에게 소중했겠지만, 도지가 올리비아와 다시 만나는 대신 페니와 마지막을 함께 하는 것은 페니가 그 순간 그와 진심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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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날이 정해져 있는 인류의 종말이란 상당히 친절하고 현실적인 설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두 어차피 예정된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정확히 며칠 남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는 죽음이 언제쯤 찾아오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다. 세상의 끝까지 21일 남은 것과 죽음까지 몇 년 남았다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불시에 찾아올 개인적 종말 앞에서 나는 어떤 후회도 하고 싶지 않다. 굳이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그 순간의 감정, 행복, 사랑이 과거나 미래의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당연한 말을 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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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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