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태어나려고 하는 새 - 연극, 찰칵 [공연]

그리고 그 새에게 알은 곧 세계이다.
글 입력 2020.08.3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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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무대에 의자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다. 아직 극은 시작되지 않았건마는 무대엔 빗소리와 낮은 천둥소리. 공교로운 그 날 날씨와 꼭 맞다. 무대인 여기는 지하 2층, 나는 아주 잠깐만 바보처럼 바깥에 천둥이 치나 생각을 했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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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월 22일, 토요일. 혜화동 CJ 아지트에서 연극 ‘찰칵’을 보고 왔다. 거리는 비가 치고 번개가 내려 사람이 없다. 이리 스산한 날에 관극은 더욱 좋겠더라. 날씨 같은 심상을 안고 무대로, 지하로 지하로 내려와 나는 앉았다.

 

극이 시작되었다. 2인극이다. 앞서부터 들리오던 낮은 천둥소리가 지하 2층 내리깔리는 완전한 암전 속을 속살거리었다. 나는 그것이 왜 그렇게 아늑하던지, 한 10분만 더 이대로였으면 했다. 아쉬운 조명이 밝고 배우 한 명이 언제부턴가 멀뚱 서 있었고 그곳인 무대는 좁고 소품이 들어설 공간은 없었다.

 

극 뒤편 한 귀퉁이 스크린에 작은 영상을 걸어두는 것으로 배경 설명은 대체된다. 여기 스크린에 걸리는 것은 카메라를 통해 바라본 딸의 시선, 딸이 찍은 사진 그것뿐. 무대 공간은 오직 두 명의 배우와 연기와 그들의 존재감으로만 차차 채워져 간다. 극의 시작, 광화문이다. 무대엔 의자 하나와 배우 한 명과 스크린과 광화문의 영상, 참으로 편안히도 비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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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챡은 일회용 케뭬러(Camera)가,

날 지켜주고 있숴요.”

 


완벽하게(?) 어색한, 외국인의 한국어 발음을 구사하는 낯선 젊은이가 객석을 향해 사진을 찍는다. 엄마를 찾으러 왔단다. 30년, 30년 만에 엄마를 보러 왔단다. 낯선 땅 이곳이 영 두려웠지마는, 그래서 관광객의 모습 뒤, 카메라 셔터 뒤로 피신한 채 엄마를 기다린다. 나와 영영 낯설 내 모국과 나와 같은 ‘찢어진 눈’들과 카메라, 젊은이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두려운 낯섦을 물리치고 있었다. 이렇듯 버림받은 그녀는 입양처 독일에서도 모국 한국에서도 이방인이다. 그녀에게는 평생 이 낯선 이의 감각이 한없이 두려웠단다.


어머니와의 상봉은 빠르게 이루어진다, 별 시답잖은 이야기도 없이. 미안하다, 보고 싶었다, 용서해라, 뭐 이런 것도 없이 말이다. 그리곤 엄마는 대뜸 점심을 먹으러 가자 하고, 그 힘겨운 홍어를 먹이고, 부탁 하나를 건넨다. ‘자기하고 어딜 좀 가자’고, 대뜸 말이다. 엄마는 딸이 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 내겐 이런 생각부터 들었더랬다.


극은 시종 의아함과 불길함을 풍기며 전개된다. 많은 것들이 감추어진 채, 행위에 동기가 생략된 채 서사가 시간 너머로 자꾸 흘러만 갔다. 오랜만에 만난 엄마는 딸의 아무런 질문에도 답하지 않았고, 침묵했고, 자꾸 불안해 보였고, 고로 불길해 보였다. 이 초조한 의아함 위에 스산한 불길함이 얹히니, 극은 짙은 몰입감을 내게 요한다.


그저 수월히 이해되는 서사에는 그리 큰 몰입감이 필요치 않다. 그런 때엔 즐기며, 음미하며, 또한 동시에 시비를 가리며 극을 감상하면 족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연극엔 많은 것이 의도 하에 가려져 있다. 의아함과 불길함, 그로써 긴장감을 극은 유발하며 내게 ‘마음 편한’ 관람을 불허한다. 한 장면이라도 놓치면 아마 종내에, 극 전체를 ‘해독’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서사는 내게 긴장을 지핀다. 치밀하게 분배된 서사, 수수께끼와 해답의 열쇠는 산재해 있고, 해독은 우리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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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너는 새였어.”



엄마는 대뜸 홍어를 먹이고, 부탁이 있노라며 자기와 어딜 자꾸 가잔다. 어디로 가느냐 묻는 말엔 답이 없다. 딸은 의아함과 못마땅함을 안고서도 잘도 따라간다. 도착한 곳은 삼선동 3-4가, 철거예정의 붉은 락카칠이 되어 있는 곳이다. 건물의 두 외벽 사이, 틈바구니에 간신히 문을 매단 곳, 문 안에서는 놀랍게도 사람이 ‘살던’ 흔적이 지워져 가고만 있었다. 반기는 이는 없고 그의 마지막 유언장 하나만 덜렁 매달려 있다.

 

딸은 엄마에게 이 두려운 곳이 뭐 하는 곳이냐고, 누구의 집이냐고, 왜 왔느냐고 자꾸만 따져 묻는다. 그 질문은 나의 질문이기도 한 것. 그러나 엄마는 시종 대답을 하지 않았고, 자꾸만 불안하거나 두려워 보였고, 고로 불길해 보였다. 딸은 응당 불안과 궁금증과 못마땅함을 느끼기 시작하고,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관객인 나는 딸에게로 몰입해 들어간다.

 

의뭉스러운 장면들이 너무도 많다. 장면 자체로도 이해가 어려운 것들에 설명마저 부재하니 지켜보는 나는 두렵다. 낯선 것은 자체로도 꺼림칙하지만, 그 까닭이 까마득할 때 가장 두려운 것이듯, 엄마는 까마득히 낯설어 보기에 두렵다. 엄마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서슬 퍼래지고, 욕설을 퍼붓고, 뛰쳐나가고, 뭐 대충이 이러했다. 나는 그쯤 이해에 대한 강박을 슬며시 내려놓기 시작했다. 완벽히 이해해야지 하는 강박을 내려놓고, 그저 긴장 하에 극을 관람하기로 했다.


아무런 사죄도 해명도 없이 대뜸 어딜 가자 하고, 도착한 곳은 가히 불길하고, 그곳에서 엄마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서슬 퍼래지고 욕설을 퍼붓고 뛰쳐나가곤 돌아와, 더욱 뜬금없이 제사를 지내잔다. 나로선 정신을 똑바로 차릴밖에. 장면 하나를 놓치면, 극 전체에 대한 이해는 영영 요원해진다. 참 짜릿하다.


제사를 하잔다. 딸은 제사의 대상이자 이 방의 주인이자 유언장의 주인공이 누구냐 재차 묻는다. 엄마는, “내 심장”이라고만 답했다. 엄마의 말은 늘 이런 식이다. 원관념을 지워낸 은유, 철저히 자의적인 은유이다. 딸은 ‘왜 자기를 버렸느냐’는 질문에 대한 마땅한 대답은커녕, 시종 엄마로부터 침묵 혹은 수수께끼만을 듣고 있었다. 딸은 지긋지긋한 수수께끼 끝에 분통을 터트렸고, 이내 찾아든 소강상태 하에 둘은 조심스레 ‘진실게임’을 한다.


 

딸 : 날 왜 버렸어?

 

엄마 : 처음 너가 태어났을 때를 기억해. 너는 너무 아름다웠지. 

 

딸 : 아니!! 진짜 말을 해!

 

엄마 : … “너랑 죽으려 그랬어. 왜냐면 너는… 호수에 사는 요괴의 자식이니까.” 근데 너는 자꾸 배를 찼어. 파닥 파닥 파닥, 새처럼. 그래 너는 새였어. 나는 그래서 새가 날아갈 수 있을 때까지만 키우기로 다짐했어.

 


엄마 :


바닷가에 사는 소녀가 있었어. 소녀는 섬에 살았고, 섬 꼭대기엔 호수가 있었지. 어른들이 말하길, 그 호수에 얼굴을 비추면 안 된데. 그런데 소녀가 16살 되던 해, 소녀는 처음으로 생일 선물을 받았어. 흰 운동화였지.

 

소녀는 너무 기뻐 운동화를 신고 막 돌아다녔어. 문득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호숫가였고 그 호수 안에서는 하늘이 반짝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어. 소녀는 저도 몰래 호수로 발을 내딛었고, 그 안에 자기의 얼굴을 비추었어. 그리고 다음 날, 엄마 아버지가 죽었어. 배 타고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어.


몇 날 며칠을 소녀는 울었어. 호수에서 뒹굴었지. 소녀는 이제 더 이상 호수가 두렵지 않았고, 멍하니 호수 위를 떠다녔어. 그러다가 어느 날, 호수에서 검은 머리가 튀어나와 내게로 다가왔고, 나는 널 가졌어.



엄마의 일에 대해선 더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 않다. 이 고통스러운 서사 아래 수수께끼가 완벽히 풀린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서 엄마의 은유 속에 늘 비어있던 원관념이 획득되니, 해석은 탁하고 풀리어난다. 엄마가 시종 구사하던 ‘자의적 은유’는 어쩜, 이 “지울 수 없는 사건”이 남긴 짙은 그림자. 원관념이 도저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기에, 엄마는 그 사건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거나 지시하는 그 어떤 언어도 채택하지 못했던 따름일지도.


엄마의 시간은 이날 멈추어 버린 것 같다. 엄마의 사고도, 그리고 엄마의 언어도 16살 생일을 기점으로 멈추어 버린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흰 머리의 엄마, 버린 딸과 재회한 죄인일 엄마는 어딘가 소녀 같았다. 홍어를 먹고 난 다음 돌아 나오는 길, 돌담에 어린 햇발에 감동하던 그 엄마는 참 소녀 같았다. 그게 이제 와선 처연히 상기된다. 엄마의 시간은, 호수에 담겨 반짝반짝반짝 빛나던 햇살을 바라보던 그때 그 시간에서 영영 멈추어 버린 것인가. 엄마는 딸을 안아낼 만큼 어른일 수 없었던 것 같다. 엄마는 소녀인 채, 사랑하는 새를 날려 버렸던 것이다.


엄마의 ‘말’, 수수께끼가 아닌 진술에 드디어 딸은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것이 고백의 순리일 것이다. 너의 고백과 그 위에 드디어 풀려나는 나의 고백, 다만 선창은 더 어른처럼 보이는 엄마의 몫이었을 테다. 딸이 겪어야 했던 차별, 양부모의 슬하를 지키기 위해 그녀가 펼쳐야 했던 명랑함의 연기, 그리고 고독과 공허와 방황, 딸의 이야기가 풀려난다. 독일 땅은 ‘커다란 눈’을 가진 이들의 나라. 눈 크기를 연기할 수 없을 따름에야,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커다란 눈의 흑인 아이가 새로 입양되어 들어왔단다. 그 아이의 커다란 눈에는 자기와 같은 ‘연기’가 서려 있었단다. 입양아의 명랑함은 갈 곳 없는 이의 연기. 딸은 그 길로 집을 나온다. 그 까닭을 나로선 명확히는 모르겠다. 내가 버려지고 거두어진 적이 없기에. 그 뒤 딸은 천 길 방황을 지나 엄마를 찾아 한국으로 왔다. 그 지독한 여정 통에 아이 셋을 지웠단다. 입양된 집도, 거리도, 다시 찾은 모국도 그녀로선 한없이 한없이 낯설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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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고백이 끝나갈 즈음 둘의 하루도 끝나간다. 30년 만의 해후, 각자의 그 기나긴 사정에 하루는 분명 짧았으리다. 엄마가 먼저 지쳐 잠들었고, 딸은 그 위에 엎어져 안긴다. 그 날, 엄마는 딸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딸은 엄마가 시종 붙들고 있던 손수건을 챙기었고, 펼치어 본다. 그 안에는 말라붙은 딸의 탯줄이 쭈욱 안기어 있었다. 딸이 엄마의 손수건 냄새, 제 말라붙은 탯줄 냄새를 맡으면서 극에는 어둠과 일전의 낮은 천둥소리가 다시 찾는다.

 

*

 

어려웠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가려진 것과 감추어진 것이 극에는 너무도 많았다. 서사의 배열은 시간순이 아니었고 표현의 방식도 원관념을 지운 은유이다 보니, 극 해석은 결코 즉각적이지 못하다. 관객은 딸에게 몰입한 채로 엄마를 본다. 딸을 버린 엄마, 모든 해명의 몫은 고로 엄마의 몫이다. 딸도 관객도 엄마를 추궁하듯 쪼아보았다. 그러나 엄마의 입에서 풀리어나는 것이라곤 이해하지 못하는 수수께끼, 원관념을 비워둔 자의적 은유뿐. 극이 끝나갈 때쯤에야, 아아, 그랬던 것이구나 쓸쓸히 뒤늦게 알 일이었다.


극의 전말은 뒤늦게나 알 일이었다. 극이 마치고, 객석의 앉은 자리에서 하냥 곱씹어 보진 못할 값이라 자리를 옮겨서, 아니 옮기는 내내 나는 줄곧 이야기를 되새겼다. 모녀의 일생을, 시간순으로 다시 배열해보며 퍼즐을 푸는 것이다. 그렇게 배열을 마치고 나니, 확인하는 것이라곤 둘의 기묘한 닮음, 두 비극뿐이었다. 참으로 씁쓸하지.


초장, 극에 서리인 불길한 수수께끼는 나를 긴장케 했고, 끝내 해독한 수수께끼 안에서 나는 지독히도 헛헛한 감정을 가진다. 열쇠 조각을 맞추어 상자를 열었더니, 지독한 어둠뿐이었다는 말이다. 이제 남겨진 딸의 일생은 그 어떠할까. 엄마와의 해후, 제 뿌리에 대한 이해, 이런 것들을 발판으로 삼아 조금씩 제 자리를 찾아갈까. 낙관의 표지는 그 아무것 없다. 여기서부터는 오직 추측과 상상의 영역.


딸은 한 조각 추억, 엄마가 찍어준 제 사진과 엄마의 손수건과 제 오랜 탯줄만을 가지고 있을 따름. 그런 것들만으로 하나의 삶과 생은 그 얼마나 바뀔는지. 한 조각 추억을 움켜쥐고서 이 지독한 세상 탁류에 전전하고 버티어도 보겠으나 아마도 이내 꺾일, 그런 지지부진히도 지독한 삶이 계속될는지 모르지. 한 조각 추억만으로 생과 삶이 급변할 리 적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러나 또 어쩌면, 엄마가 찍어준 제 사진이 생에 대한 자기 태도를 바꾸어낼지도 모를 일이지. 어디건 낯설고, 늘 불안해했던 자기 삶과 ‘자기’에 대한 스스로 태도를 바꾸어낼지도 모를 일이지. 딸은 엄마가 찍어준 제 사진을 본다. 그 사진은 플래시 라이트로 과히 뿌옇다. 아마 빛 속에 살라는 뜻이었으리라고, 딸은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찰칵!” 사진 찍는 소리는 이때, 엄마가 딸을 찍을 때뿐이었다. 앞서 말하였듯, 무대 위에는 아무런 소품이 없고 오직 카메라로 찍은 딸의 사진만이 스크린에 영사되었음에, 딸은 내내 카메라를 통해 그 무대 위의 세계를 관객에게 선보였다. 딸이 찍은 사진은 광화문에서 출발해 홍어와 돌담에 어린 햇발과 지하철과 삼성동 3-4가 철거예정지와 바다… 둘의 하루 여정이니 많기도 하다. 그리고 그 각각의 사진을 찍을 때 ‘찰칵’ 소리는 없었던 것 같다. 엄마가 찍은 딸의 사진을 제외하고선 말이다. 이 사실은 엄마가 딸을 찍을 때나 알 수 있었던 것. 순간을 포착해 영원으로 편입시킬 때의 그 날카로운 소리에서 상기되었다.

 

딸은 이제 엄마를 이해했으려나. 총체적으로 이해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겠지만, 어쨌든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엄마가 찍어준 사진과 엄마 내음이 아직은 남아 있는 손수건과 그 안에 쌓인 채 내내 간직된 태고의 흔적, 탯줄과 당신 심장에 서리온 이야기와 “딸”이라는 그 불러줌과…… 이러한 것들의 집체가 이루는 커다랗고 복잡한 하나의 감각이지 싶다.


딸은 이러한 것들을 안고서, 이제 어디로 갈까. 그녀에게는 여전히 집도, 돈도, 이제는 가족도 없으니 갈 곳은 그 어디일지 궁금해진다. 모국으로 오기까지의 긴 방황, 그 끝에는 엄마가 있었으나 이제 바야흐로 딸의 여정은 무엇을 목적으로 나아갈 수 있으려나 싶은 것이다. 딸의 생은 이제 개척되어야 하는 성질의 것. 그럼에도 그 삶에 나는 조금 낙관적인 희망을 걸어보게 되는 까닭이란, 그녀에게 드디어 ‘엄마의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낯선 땅을 개척해 나가야 함에 있어, 그녀는 이따금 피로한 저 자신을 손수건에 가져다 댈 일이다. 그 안에는 이제 냄새도 아니 나는 자기 탯줄과 손수건의 엄마 내음이 섞이어 있을 테다. 그로써 모종, 나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를 테다.

 

딸은 엄마를 갖고서, 한 마리의 새가 될 수 있지 싶다. '빛 속에 살라'는 그 전언으로써 부화하는 한 마리의 새에게, 이제 알이자 도피처이자 닫힌 세계인 ‘카메라’는 필요 없을 터이다. 그러고 보면 "찰칵!"하는 그 소리는 알에 금을 긋는 소리였구나. 알에 금이 가면 한 마리의 새는 태어나려고 한다. 그것은 새의 부화요, 또 한 인간의 부활일테다. 그리고 부화한 새는 이제, 끝도 없는 아브락사스의 하늘을 향해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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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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