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 영화 '69세'

글 입력 2020.08.27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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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그 누구도 혐오라고 인지하지 않는 혐오가 있다. 바로 노인 혐오.

 

때로 노인의 삶은 나이 들어간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수많은 혐오를 마주한다. 여전히 건재히 살아 이 땅에 서 있음에도, 많은 이들은 주름진 피부와 하얗게 센 머리를 오래된 지혜로 읽기보다 답답한 구시대의 상징으로 여긴다. 부정적인 감정을 대놓고 표출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을 무시하고 쉽게 판단하며 편견을 바탕으로 가벼이 대하는 행동 모든 것이 혐오다.

 

시간의 흐름을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을 텐데, 자신이 늙어갈 미래는 생각지 못하며 누군가의 나이듦을 이토록 쉽게 여긴다. 어쩌면 죽음의 피상을 노인으로 여겨 무의식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하지만 노인은 죽음에 다가가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도 다른 사람처럼 단지 주어진 생애를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일 뿐이다.

 

임선애 감독이 맡은 예수정과 기주봉 주연의 영화 <69세>는 한 노인이 혐오로 만연한 사회 속에서 살아있음을 증명하며 불의에 대항하는 이야기를 담는다. 69세인 주인공 효정은 치료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으나 단지 노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사회에서 존중받지 못한다. 나이 든 여성이라는 이유로 범행 자체를 부정당하고 웃음거리로 도마 위에 오른다.

 

하지만 효정은 포기하지 않는다. 조용히 입 다물고 지내길 바라는 사회 속에서도 효정은 자신이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가치와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영화는 사회 속에서 노인이 받는 부정적인 시선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이에 맞서 가치 있게 살아가려는 노력과 모든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일상, 평범한 사랑을 보여주며 그 세대에 대한 이해의 발판을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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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삶을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주인공 효정은 다니던 병원의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함께 동거하던 동인과 경찰서로 찾아가 관할서로 사건을 넘기지만 이를 진지하게 대하는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조무사의 어린 나이를 듣고는 노인분에게 친절이 과했다며 농을 칠 정도. 효정은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인 수영을 하러 가서도 낯선 사람의 손길에 닿으면 소스라치게 놀라고, 전자렌지 소리의 알림 소리만 들어도 범행이 일어났던 물리치료실에서의 기계 소리가 오버랩되어 숨을 잘 쉴 수 없다.

 

이 와중에 경찰서에서는 조무사를 심문하기 시작하지만 조무사는 범죄가 아니라 상호 동의 하에 이뤄진 일이었다 고백하며, 경찰은 기억력이 온전치 않은듯 하단 이유로 오히려 효정을 치매 환자로 몬다. 효정은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의심하기도 하고, 냉정한 사회의 모습에 지쳐가며, 동거인 동인이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건 조사에 조심스러워 한다.

 

하지만 동인이 자신을 위해 조무사를 찾아가고 주변인을 조사하는 등 발로 뛰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서 그녀는 동인을 떠나 다시 홀로 지내기 시작했다. 성인지 감수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경찰이 대질 심문을 제안했으나 그녀는 이를 거절하고 결국 수사와 처벌을 포기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만의 방식으로 사건에 대응한다. 느리지만 꼼꼼히 쓴 사건문을 건물 옥상에 올라가 바람에 날리게 두었다. 차분하고 담대한 그녀만의 복수였다.

 

자신은 성폭행 피해자임에도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오히려 피해자가 고군분투해야 하는 부조리한 상황. 심지어 피해자인 효정이 노인이었기 때문에 그 상황은 상상 이상으로 고됐다. 누구나 포기했을 법했다. 하지만 효정이 그러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시간이 아직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동인과 동거하던 집을 나오고 호스피스 일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삶에서 한 발짝 떨어져보는 시간을 갖는다. 자신이 돌보는 중인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는 노인보다 자신은 생동하고 있었다. 전부터 떨어져 지내며 얼굴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외면하고만 있었던 딸도 이젠 만나고 싶었다. 무엇보다 스스로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일상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자신의 연인이 저를 위해 이곳 저곳을 조사하며 힘을 쓰고 있었다는 것, 그도 노인이면서 포기하지 말라고 굳건하게 노력하는 모습은 그녀의 마음에 힘을 더했다. 그녀가 자신의 문제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삶과 시간과 가치를 포기하지 않은 것과 같았다. 늙은 노인이 왜 그렇게 아득바득 힘을 쓰냐 하는 세상에서, 그녀는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어려운 목소리를 냈다. 살아있기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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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으로서의 노인


 

영화는 노인을 나이 들고 나약한 집단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사회 속에서 당연히 살아가는 한 개체로 바라본다. 노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혐오를 감내하며 살아야 하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며 한 개인에 이입하게 하고, 효정이 처한 문제 상황에 있어서도 거대한 사회 구조가 아닌 개인이 자신의 손으로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노인은 편견 속에서 늘 숨쉬듯 고군분투해야 하는 존재다. 노인도 사랑을 한다. 하지만 효정과 동인이 동거하는 관계라고 밝혔을 때 돌아온건 어이없다는 듯한 실소였으며, 자신의 연인을 위해 움직이는 동인을 바라보는 이들은 주책맞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노인에게도 성은 민감한 문제다. 그러나 효정의 사건이 쉽게 해결되지 못했던 것은 그렇게 젊은 사람이 나이 든 사람을 성폭행하지 않았을거란 근거 없는 믿음과, 노인에게 성 문제를 가벼히 여겼던 사람들의 태도에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효정에게 이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은 성폭행범이 노인을 힘없고 약하고 사회에서 외면당하는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음에도. 그리고 효정은 나이 들었다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남들보다 정갈하고 세련되게 자신을 단장하고 다녔으나, 거기에 돌아오는 것은 노인치고는 예쁘다니 하는 몸평과 얼평이었다. 노인은 그 어디에도 제대로 존중받고 서 있을 자리가 없었다. 그런 장면들을 바라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 역시 그들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에서 노인이 비추어지는 다양한 모습을 관조하며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새롭게 다지게 된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효정이 자신의 손으로 사건을 알리는 과정은 굉장히 뜻깊었다. 자신의 연인과 변호사인 그의 아들, 경찰이 협력하는 것은 맞지만 그녀는 결국 자신이 직접 목소리를 내 사건을 밝히기로 결정한다. 법이나 사회 구조에 기대지 않았다. 그녀는 가해자의 가정에 찾아가 진실을 밝혔으며, 세상에 그녀가 겪은 일을 알렸다. 그녀가 직접 펜을 들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써내려간 사건문을 떠올려본다. 그녀는 무거운 종이 뭉치를 들고 힘겨운 발걸음으로 아주 천천히 옥상에 올랐다. 그리곤 바람에 한장씩 휘날리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녀가 싸우는 방식은 느리고 답답할지언정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용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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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깊이 관조하는 영상



영상은 효정의 느릿한 발걸음과 적막한 시선을 닮아 있었다. 효정과 동인을 가만히 비추는 한 장면마저도 그들을 대변했다. 영상은 자극 없이 담백한 톤으로 인물과 관람객 사이의 거리감을 조절하며 차분하게 흘러간다. 공간의 한 켠에서 그들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때로 불안하고 위태로운 순간에서도 어쩐지 단단하고 안정감이 드는 것은 긴 시간을 견뎌내온 이들의 존재가 묻어나도록 했기 때문 아닐까.

 

삶을 아주 깊게 관찰해야만 나올 수 있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마치 내가 노인이 된 것처럼. 빨래를 널다가 햇빛에 쭈그러든 손과 가느다란 팔목을 비쳐보던 효정의 모습, 사건이 일어난 이후 불안함을 안고 막막히 펼쳐진 수영장 위를 가로지르는 장면, 떠나버린 효정을 동인이 찾아왔을 때 아주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던 시선……. 영화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 계속해서 기억에 머무는 장면들이 많았다. 임선애 감독님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됐다.

 

 

[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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