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절망의 다른 이름, 헛된 희망 - 체리

글 입력 2020.08.26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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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때로 소설보다 잔혹하다. 이를 이해하기 때문인지 인간의 허구와 현실을 나누는 벽은 상상 이상으로 두텁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은연중 소설에 기대하는 것이 있다. 생각대로 흘러가는 일 없고 늘 예측 불가하며 고통이 도사린 현실을 견디다 보면 허구의 이야기에는 희망이 있을거란 막연한 기대감이 드는 것이다.

 

최소한 희망이 없지는 않을거란 이유 없는 추측. 그렇게 독자는 주인공이라는 이름에 막중한 책임감을 부여한다. 예상치 못한 기지를 발휘하길, 어려움을 이겨내고 한번쯤 희망을 실현시켜 보길 바란다.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시야를 함께 공유하는 주인공의 삶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지길 소망한다.

 

책 <체리>를 읽는 내내 난 이 희망의 끈을 놓치 못했고, 결말에 이르러 그 누구도 날 배신하지 않았음에도 알 수 없는 배신감과 안타까움에 휩싸였다. 어설픈 희망과 섣부른 기대감을 완전히 파괴해버린 소설이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체리'는 미국에서 전쟁에 처음 투입된 군인을 이르는 말이다. 전쟁의 상처와 마약 중독이 한 사람을 망가뜨려가는 과정을 숨김 없이 보여주는데, 놀랍게도 작가 니코 워커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2020년 하반기에 개봉 예정인 루소 형제 감독, 톰 홀랜드 주연의 영화 <체리>의 원작 소설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대학 생활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다. 방황하던 중 에밀리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후 마약에 손을 대며 원래부터도 위태로웠던 일상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이후 이라크에 파병되지만 그의 눈 앞에 펼쳐진건 동료들의 죽음뿐. 전쟁 영웅이라는 명칭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영웅은 커녕 죽어가는 동료들과 전쟁에 대한 공포감으로 제 몸과 마음을 간신히 건사할 수밖에 없다. 복무를 마친 후 에밀리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는 헤로인에 중독된 채 매일을 보낸다. 중독에서 벗어나려는 의미 없는 노력과 마약이 선사하는 황홀한 감각 사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그는 결국 은행 강도로 전락한다.

 

 

 

오랫동안 겁에 질려 살다 보면 두려움이 어떻게 왔다가 사라지는지 알게 된다. … 그리고 다시 두려움이 다가오기 전까지, 희망이 어떻게 제자리로 돌려놓는지도 말이다. 다시 희망이 오고 다시 두려움이 다가온다. 나는 인생에서 오직 한 가지 빼고는 두려울 게 없 었다. 바로 헤로인이었다.

 

- 책 <체리> 417p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사랑과 함께 그는 서서히 절망 속으로 잠겨들었다. 그에게 불행은 비에 젖어가는 옷자락 같았다.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을 물들이기 시작하더니 정신을 차릴 즈음엔 이미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다. 책은 그의 불행과 간혹 희망이 교차하는 순간들을 대담하고 솔직한 어조로 이어간다. 막연하게 펼쳐진 삶 속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그를 지켜보는 것은 결코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불행감은 전염된다. 나 역시 물 자국이 퍼져가는 옷깃처럼 그에게 물들어갔다.

 

그와 같은 시야를 공유하며 희망을 향한 잘못된 선택에 함께 괴로워했다가 다시 밑바닥으로 떨어지길 반복했다. 행복은 굉장히 주관적인 가치다. 만약 마약에 중독되어서도 자신만의 망상 속에서 행복할 뿐이라면 차라리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후유증과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공포감이 중첩된 그가, 이를 마약으로 해소하고 다시금 고통을 반복하는 것은 이야기의 결말까지 함께하는 독자로선 너무도 괴로운 일이었다.

 

의지만으로는 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와 나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새빨간 거짓말쟁이.”

“제기랄.”

“미안해. 하지만 사실이잖아.”

“너무 겁이 난다.”

“나도. 이 생활이 진저리가 나.”

우리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남은 약을 더 맞기로 했다.

 

- 책 <체리> 320p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생을 이어갈 수 있었던, 그리고 내가 이 소설을 읽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사랑. 그의 말마따나, 이건 '위대한 약쟁이의 로맨스'였다. 연인을 함께 나락으로 이끌어버렸음에도 사랑은 지속됐다. 함께 절망하고 몰락하면서도,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라곤 서로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로맨스가 이야기를 이끌었다. 절망과 행복을 동시에 주는 관계가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하지만 이 아이러니함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은 부정하는 것이 사랑이고 사람이기에 나 역시 슬프게 공감하며 질척한 삶에 엉겨들었다.

 

나비효과를 상상해본다. 만약 그들이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더 나빠졌을까 더 나아졌을까. 행복의 기준이 있어 그 총량을 잴 수 있다면, 두 사람은 이뤄지지 않는 운명으로 두는 편이 더 나았던 것은 아닐지. 한 사람이라도 무던한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지. 하지만 행복은 정말로 주관적인 것이다.

 

약에 취해 정신이 흐려지고 세상과 점점 멀어져도 그들은 서로가 있기에 진정으로 행복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본다. 평범한 일상마저도 보이지 않는 고통의 밑바닥까지 가라앉게 하는 이야기였다. 헛된 희망을 가지고 책에 손을 댔다가 지독한 절망을 맛봤다.

 

 

[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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