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함께함이 도려내진 삶 - 도서 '고요한 인생'

글 입력 2020.08.23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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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들 중의 엔소르(1899) 엔소르, 1860-1949

 

 

 

내던져진 반쪽자리 자아의 이야기



타자는 자아의 뼈대와 같다. 뼈 없는 육체가 고깃덩어리가 되는 것처럼, 타자 없는 자아도 그 형태조차 유지하지 못한다.

 

타자의 존재는 자아를 만들고, 타자에 대한 신뢰는 자아를 사람의 형태로 빚는다. 전자는 자연스럽게 습득되지만, 후자는 다양한 요소의 영향을 받는다. 타자의 존재는 판단하고 비교하는 인간의 정신능력이 건재하다면 아주 어린 아이라도 자연스럽게 습득한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우리는 소통이 가능한 어린 시절부터 성격에 대한 표현을 이해한다. `상냥하다`, `똘똘하다`, `간악하다`와 같은 표현은 타인과의 비교 없이는 사용될 수 없다.

 

타자에 대한 신뢰(혹은 감정적 경험)는 좀 더 개인적이다. 유명한 발달 실험 중 하나인 애착 실험을 떠올리면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주 양육자와 안정적인 애착이 형성되지 않은 아이는 외부세계에 몰두하지 못한다. 이처럼 타인에 대한 신뢰, 주관적으로 느껴지는 사랑은 유아나 보호자 사이에서 확립된 신뢰는 일상생활의 가장 평범한 활동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위협과 위해를 어느 정도 차단해주는 기초적인 보호 고치 역할을 한다.

 

신뢰는 자아발전이라는 선순환의 가장 기초적인 고리다. 신뢰는 주 양육자가 당장 눈앞에 없어져도 외부 물건을 충분히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을 용기를 불어넣는다. 경험과 이해가 사랑의 원천이기 때문에, 자아는 이 과정을 통해 풍부해진다. 실험은 가장 민감한 시절을 예로 들고 있지만, 꼭 어린 시절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애착이나 신뢰는 삶의 여러 부분에서 형성되고 단련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렴풋이 자아를 형성했지만, 타자에 대한 신뢰는 습득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게 될까? 보호 고치가 없는 사람, 실 옷 없이 불확실성으로 들끓는 외부 세계에 던져진 아이는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탐구하게 될까? 신중선의 <고요한 인생>은 이 반쪽짜리 삶에 초점을 맞춘다.

 

 

 

무덤 찾아 떠나는 늙은 코끼리를 닮은 아이, 고요한 인생


 

책의 제목이기도 한 <고요한 인생>의 주인공은 바라지 않은 아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매년 주인공이 태어나는 날이면 진통을 느끼고, 주인공이 한번은 장난스럽게 달려든 탓에 어머니가 소중하게 여기던 천을 찢어버리고 어머니를 다치게 했다. 가족과 섞일 수 없는 것은 뭐라 말하기 어려운 주인공의 독특한 기질도 한몫했을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가정환경에서 주인공은 이 가족이 자신의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위로한다. 이후로 묘사되는 주인공은 흔히 말하는 소시오패스와 같이 행동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른 남자들의 욕정에 작은 몸을 맡기고, 짜증 나는 친언니에게 락스를 섞여 먹이고, 자신에게 불리한 소문을 퍼뜨리는 짝궁을 몰래 유인해 살해한다. 가출한 뒤에는 부유한 가정에 입양되어 의기양양하게 살아간다. 어느 날 친언니와 마주친 후, 자신이 필사적으로 찾은 둥지마저 위태로워졌음을 직감한 주인공은 자신이 살던 동네에 돌아와 어린 시절에 써두었던 시구를 다시 읽는다. 시구는 아래와 같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왜 난 여기에 있고 저기에는 없을까/시간은 언제 시작되었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악마는 존재하는지/ 악마인 사람이 정말 있는 것인지"

"내가 내가 되기 전에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나는 어떻게 나일까?/ 과거엔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는 다만 나일 뿐인데/ 그것이 나일 수 있을까?"

 

이 소설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진 어린아이인 주인공을 늙은이에 빗댄다는 점에 있다. 주인공의 태몽은 빨래하는 늙은이였고, 친언니는 주인공의 뒷모습에서 늙은이를 본다. 이 시구를 반복해서 읽을 때도 주인공은 스스로 자신이 아이인 적 있는지를 묻는다.

 

그 독백대로 주인공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아이의 이미지와는 영 떨어져 있다. 타인의 행동과 의도를 계산하고, 자신이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치밀하게 계획한다. 독자들은 이런 특성을 통해 대단한 성공이나 바랄 것 같지만, 주인공이 바라는 것은 고요한 인생 정도다. 그야말로 노동만 이어온 고된 삶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늙은이와 같은 바람이다. 끝없이 이어진 노동으로 얼룩진 삶에 지친 늙은이처럼 주인공은 `행복한 삶`이 아니라 `고요한 인생`을 추구한다.

 

마침내 주인공은 무덤을 찾아 떠나는 코끼리 같은 삶의 진실을 마주한다. 떠돌고 맴도는 삶에서 그는 천사도, 악마도, 그 자신조차 아니다. 하물며 그는 우리가 추측했던 소시오패스마저 아니다. 작가가 독자들에게 시를 통해 내민 것은 고요한 인생을 최종목표 삼아 타인을 사랑하거나 이해하려고 조차하지 못하며 전전긍긍하는 삶과 자신의 이름마저 잃어버린 결여된 인간의 슬픈 초상화였다.

 

 

 

함께함을 도려낸 소설


 

책에 첫 번째로 수록된 <고요한 인생>의 주인공처럼, 다른 수록 소설의 주인공들도 삶에 대한 특별한 목표 없이 도시를 이리저리 떠돈다. 수록 소설에 묘사된 주인공들은 홀로 고독하게 삶을 부유한다. <아들>의 아들은 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언니의 봄>에서는 무관심했던 친언니의 자살을 마주하며, <낮술>에서는 일없이 무능한 남편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 집 앞>에서는 대놓고 주인공은 도시에서 떠도는 노숙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타인과의 교류에서 소외된 이들이 고독을 상대하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거나 행동하는 방식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낮술>의 주인공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있어 보이는 명칭으로 서로를 부르며, 자신의 연약한 다리를 오징어의 생식용 두 다리에 대입해 암컷 오징어와 교미하는 상상을 하고, <아이러브유>의 주인공은 채팅에서 만난 남자를 상상하며 허름한 술집을 기웃거리고, <언더독>의 주인공은 예식장의 축의금을 훔치고, <그 집 앞>의 주인공은 별 용도도 없는 책을 훔친다.

 

이것들이 이들로서는 고독을 상대하기 위한 이들 나름의 제일 나은 방법이지만 그들의 삶을 더 악화시키거나 변화시키지 않는다. 훔치는 행위는 잠깐이나마 그 삶의 일부를 획득하는 상상을 할 수 있게 하지만, 본질적으로 허락되지 않은 행위이며, 그런 방식으로만 소유할 수 있다는 삶의 비극을 확인할 뿐이다. <그 집 앞>의 주인공은 그토록 타인과의 소통을 바라 전화기의 벨소리를 기다리지만, 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는 늘 그렇듯 환청이라 생각하고 무시하고, <아이러브 유>에 등장하는 사랑을 속삭이는 인형은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트럭에 부딫쳐 두동강 난다. 인형은 반토막 나지만 쉬지 않고 `아이러브 유`를 반복한다.

 

 

 

고독한 삶의 조명


 

<고요한 인생>은 사회에서 말하는 흔한 `명백한 약자`, `확실히 소외된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가족으로부터 버려진 독거노인도 아니고, 사회나 타인으로부터 아주 명백한 상처를 받은 사람도 아니다. 이들에게는 버젓이 가정이나 직업이 있다. 이들의 비루한 상상력과 방황을 제외한다면 우리와 퍽 비슷한 면이 있다. 그래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시선으로 바라보자면, 이들은 특별한 꿈도 없고 삶을 이겨낼 만큼의 의지조차 없는 나약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소외된 인간이 아니란 것은 아니다. 이들에게는 사람들을 신뢰하고 교류하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제거되어 있다. 소설의 내용이 그토록 푸석푸석하게 느껴지는 것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관계적 활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은 윤기 없는 인생 앞에서 자아를 잃어버린다. 처음에 앞서 기술했듯이, 타인에 대한 기대나 신뢰가 없는 사람은 뼈대가 없는 육체처럼 그 형태를 유지하는 것마저 어려운 법이다.


세상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엄격하고 유능한 아버지이자 남편, 따뜻하고 친절한 어머니이자 아내, 싹싹하고 성실한 자식이라는 이미지 주입한다. 하지만 이미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난 이들의 세계에서 가족은 가족이 아니고, 인연이 인연이 아니다. 사회가 만들어낸 과장되고 거짓된 환상은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냉혹한 체계 때문이건, 개인적 서사 때문이건 이들은 주변인과 소통의 가능성을 발휘하려는 노력마저 기울이지 못하고, 세상과 동떨어진 상상이나 한다. 이들의 고독은 그래서 참 무겁다.

 

작가는 이 소외된 이들에 대해서 어떤 노력을 기해야하는가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작가는 질문을 멈춘 삶에 대해 질문을 쏟아낸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왜 난 여기에 있고 저기에는 없을까,시간은 언제 시작되었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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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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