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마지막 공연, 마지막 배짱, 마지막 용기 -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 [공연]

글 입력 2020.08.2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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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부 위기의 연극부, 그 마지막 공연을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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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재학 중인 학교는 2016년을 기점으로 인문대학 통폐합을 진행함으로써 16학번을 마지막으로 인문대학의 모든 학과를 폐지했다. 덕분에 전공 수업 개수는 매해 급속도로 줄어들었고, 3학년을 마친 뒤 1년 정도의 휴학을 계획하고 있던 나는 졸업 전에 이수해야 할 전공 학점을 휴학 전까지 모두 이수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무리하고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겐 전공심화 과정에 대한 선택지가 암묵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으면서 반강제적으로 복수전공 과정을 수료하기 시작했는데, 불행히도 당시 복수전공을 희망했던 학과 역시도 인문대학의 소속이었던지라 졸업 전 마지막 학기의 수강신청을 앞둔 지금, 수강 가능한 강의를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어진 선택지에 꾸역꾸역 시간표를 짜보는 중이다.

 

도래 : ‘이야기’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그런 일 하고 싶은데... 허황된 꿈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 언제 꿈이 이뤄질지도 모르겠고... 집이 잘 사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도 반대하시고... 그래서 너한테 더 뭐라고 한 거야. 내가 흔들릴까봐... 현실에 져서 꿈까지 저버릴까봐... 무서워서. 세상에 도움될 이야기는 하나도 내놓지 못하고 내 목구멍 채우려고 안전만 추구하면서 살게 될까봐... 겁나, 나도.

 

- 웹툰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 66화 인물 도래의 대사 중에서

 

 
그리고 지금과 크게 다를 것 없이 초조한 마음으로 2학년 겨울방학을 나던 2017년 끝자락과 지금 여기의 2020년 가운데, 오늘 소개할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로부터 매번 위로를 받아왔다. 3년 전에는 동명의 원작 웹툰으로, 그리고 올해 여름엔 연극의 형태로.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가 위로가 되어줄 수 있었던 지점은 바로 연극이라는 소재와 다섯 명의 연극부원들에게 있다고 여긴다. 마찬가지로 인문대의 통폐합을 겪으며 폐부 위기에 놓이게 된 연극부와 그리하여 연극부의 마지막 공연을 올리기 위해 갈등하고 또 화합하는 청년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저 이제 막 연극의 매력을 하나씩 알아가는 중일 뿐인 나였지만, 작품에서의 연극이란 인문학 그 자체로 곧 문학과 철학으로도 읽힐 수 있었기에 인물들이 ‘지키고자’하는 행위 그 자체로 하여금 공감과 위로를 경험할 수 있었다.
 
‘배짱’과 ‘용기’라는 가치로 통할 수 있었기에.
 
 
 
불완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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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엔 이름 모를 힘이 있다고 여긴다. 비슷한 맥락의 접속사 ‘그러나’보다도 정확하고 울림 있는 접속사. 그리고 웹툰의 45화 끝자락에 적힌 작가의 말 한 줄이 마음에 고스란히 남았다. ‘불완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란 : 사랑받으려 노력했는데, 사랑해주지 않으면 상처받잖아요. 그 상처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아예 바라지 않기로 한 거예요.

 

- 웹툰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 27화 인물 찬란의 대사 중에서

 

 
다섯 명의 연극부원들은 모두 각자의 아픔과 상처 그리고 과거를 지고 있다. 그리고 연극의 경우엔 다른 네 명의 인물들보다도 주인공 찬란의 서사를 중점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찬란은 가정폭력의 피해자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며 지금까지도 남는 시간을 모두 쪼개 여러 아르바이트를 동시에 함으로써 고시원비와 생활비 그리고 아버지의 뒷일을 수습하는데 빠듯하게 사는 인물이다. 찬란에게 남들이 정의하는 ‘평범’한 삶이란 사치에 불과했다.

 

도래 : 그래도 스스로한테까지 괜찮다고 속일 필요는 없잖아?

 

유 : 안 그러면... 미워하게 될 것 같았어요. 날 떠난 아빠를... 날 두고 무너진 엄마를... 아니, 사실은... 나를. 내가 더 잘했다면... 더 기쁘게 해줬다면 엄마 아빠가 그렇게 되지 않았을텐데... 내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못된 거니까...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그렇게 대해왔는지도 몰라요. 날 싫어할까봐, 괜찮아 보이려... 밝아 보이려 애쓰면서...

 

- 웹툰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 38화 인물 유의 대사 중에서

 

 
마지막 공연의 두 주인공 중 한 명이면서 찬란의 파트너인 유는 밝고 에너지 넘치는 연극부의 막내다. 하지만 유가 대체로 타인에게 사랑받는 쪽일 수 있었던 건, 타인에게 밉보이지 않음으로써 버림받지 않으려는 유의 노력도 깃든 결과기도 했다. 유는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을 겪으며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애써왔으며, 연극을 통해 타인이 아닌 나의 마음과 결정에 집중하고 따르는 방법을 익혀가는 인물이다.

 

도래 : 글의 본질은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에 닿도록 고스란히 전달하는’ 건데... 잘못된 환경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 그 상처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아름다운 본성을 회복하고 함께 나아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

 

- 웹툰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 39화 인물 도래의 대사 중에서

 

 
연극부 회장 도래는 연극의 대본을 집필한다. 도래는 연극부 가입을 거절하는 찬란이 던진 한마디 ‘저는 그렇게 한가하지 못해요’로부터 ‘나 지금 숨 막혀요.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어요’라는 메시지를 읽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찬란이 이 연극의 ‘주인공’이어야 하는 이유는, 이 연극이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이 숨 쉬는 법을 찾아가는 이야기였으면 하기 때문이라고 밝히며 진정성 있게 찬란을 설득한다.
 
찬란과 도래, 유 외에도 학업과 취업에 기대가 높은 부모님 아래서 현실과 연극이라는 이상 간의 괴리에 괴로워하는 시온, 사랑받는 나를 놓을 수 없어 연인과의 관계에서 상처받고 방황하는 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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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각자 다른 상처를 지닌 다섯 명의 인물들이 회피해온 과거의 아픔을 직면하고 나아가 그로부터 찬찬히 벗어나는 과정이 인상 깊게 남았다. 그 과정의 중심에는 ‘함께’라는 부사와 ‘연극’, 크게 두 가지의 요소가 놓여 있다.
 
각자의 상처를 공유하던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이에 앞서 ‘연극은 ‘같이’ 만드는 거니까’라고 덧붙이던 도래의 대사도. 다섯 명의 인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고 아픔을 나눈다. 삐뚠 말로 홧김에 상대의 마음에 비수를 꽂고 후회하고, 또 비수를 꽂히고 미안하다는 말의 사과에 깃든 상대의 속내를 들으며. 나아가 그렇게 상대의 아픔을 들여다보다 다시 나의 아픔을 직면해보는 것으로 귀결되는 일.
 
그리하여 다섯 명의 연극부원들은 누구의 아픔이 더 가볍거나 무거운지 판단할 수 없다는 것과, 나도 너도 즉 우리 모두가 불완전하고 또 약한 존재라는 것을 천천히 배워간다. 사랑은 받고 싶지만 상처는 받고 싶지 않은 약한 존재. 이를 있는 그대로, 괜찮지 않은 그대로 수용해주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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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이야기를 그것도 오래 묵혀온 속내를 타인들 앞에 꺼내어 놓는 일은 두렵고 또 무섭다. 그 이전에 내 솔직한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인데 이야기로 하여금 타인이 내게 건넬 시선을 감당하기까지의 용기란, 자유로워지려는 간절함과 의지 그리고 타인에 대한 신뢰 없이는 더욱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섯 부원이 솔직하게 마음을 터놓는 걸 도운 것이 바로 ‘연극’이다. 특히 앞서 소개했듯 이 연극의 마지막 공연의 주인공은 찬란과 유로 이들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두 주인공은 자신의 결핍과 아픔을 더 아프게 직면하고 발화해야 했다.
 
이 연극으로부터 알게 된 연극의 매력이란 배우가 ‘지금 여기’의 극중 상황에 집중해야한다는 것이다. 순간순간 상대방이 주는 자극이나 변화에 예민하게 또 즉각적으로 감각하고 반응하는 일. 아픈 감각으로부터 쉽게 도망칠 수 있고 또 무뎌지기 십상인 사회에서 연극이 지닌 진솔한 소통과 감정이 발휘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 자신에 집중하고 또 직면하며 나아가 소리내는 데까지의 용기가 유독 빛나는 현장이 바로 연극의 무대 위라고 생각한다.
 
찬란, 도래, 유, 시온, 진, 이들로 하여금 오늘 나는 아주 조금 더 강해졌고 자유로워진 것 같다.


 

찬란 : 전 아직도 저를 상처받던 어린애로만 봐서... 놓아주지 못하나봐요.

 

진 : 너무 걱정마. 지금 넌 예전보다 강하고 자유롭잖아.

 

- 웹툰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 52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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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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