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찬란함 대신에 단단함을 얻고 싶어졌다 -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 [공연]

대한민국의 모든 대3병, 그리고 행복강박증을 앓는 이들에게
글 입력 2020.08.16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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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동아리’ 하면 떠오르는 손꼽히는 흑역사가 있다. 갓 대학에 입학한 내게 연극동아리는 큰 로망이었다. 학창시절 내내 끼를 발산하는 친구들이 멋있어 보였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기타를 치고.. 학교 축제 무대 위에서 환호성을 받으며 자신을 내보이는 친구들이 빛나는 별 같아 보였다. 그에 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좁은 책상에서 홀로 공부를 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축 처졌다.

 

그래서였다. 스무 살이 되고, 나름 큰마음을 먹고 두 발로 직접 연극동아리 오디션 무대에 오른 것은. 무대에 선 빛나는 모습을 수도 없이 그려보았지만, 상상 속의 나는 현실에 없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하얀 조명과 함께 심장이 새하얘졌다. 어느새 손에는 ‘미용실에 갔는데 파마를 망한 손님의 역할’이라는 지시문이 쥐어져 있었다. “헐... 어떡하지.. 머리가 망했다..” 띄엄띄엄 중얼거리며 정말로 망했다, 는 생각이 들었다. 손과 눈과 입과 얼굴 근육이 제각기 따로따로 집에 돌아가고 싶어 했다. 지금 돌아봐도 웃음이 나는 발연기였다. 그렇게 시원하게 연극 동아리에서 떨어진 뒤로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어느새 대학교 4학년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의 주인공 찬란을 보면서 유독 들었던 생각은 ‘부럽다’였다. 연극부 회장인 도래와 단원들로부터 끊임없는 연극부 섭외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폐부 직전의, 부원 다섯을 채우지 못하는 연극동아리이긴 하지만 말이다. 동시에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대사도 까먹고 감정도 자연스럽지 않던 찬란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엔 무대로 나아가 연기를 펼치는 모습은 나의 로망을 채워주었고 마음이 벅차올랐다.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


 

연극의 제목,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는 연극이 끝난 뒤 나에게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말로 날아와 들렸다. 연극부원 다섯 명에게 늘 행복한 일만 생기지는 않는다. 아니, 어쩌면 힘든 일이 더 큰 무게로 얹혀 있을지도 모르겠다.

 

연극에서는 그런 모습을 애써 숨기거나 감추지 않는다. 찬란은 늘 돈에 허덕이고, 회장 도래는 대본이 안 써져 압박을 받고 있다. 밝은 모습의 유도 안 좋은 가정 상황을 털어놓고, 모범적으로 보이던 시온도 취업 불합격 소식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혁진 또한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방황하고 고민한다.


행복 강박증이라는 것이 있다. 사회과학자 모스는 일련의 실험을 통해 행복을 쫓고 행복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히려 우울감을 느끼거나 불행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엔 일상의 모든 흐름을 행복이라는 척도를 기준으로 판단 내리게 되기 때문이다. 편집과 전시가 개인 단위에서도 용이해진 현대 시대에 타인의 편집된 행복은 나에게 그 사람의 일상이자 라이프스타일로 들어와 마음을 들쑤시기 일쑤다.


연극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는 어쩐지 내 안에 내재해 있던 행복 강박증을 한 번쯤 꺼내 보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객관적으로 보면 작은 연극동아리는 돈을 가져다주지도 않고, 유명세를 떨칠만한 규모도 아니다. 연극동아리를 한다고 각자의 힘든 환경이 깨끗이 씻겨 나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소중한 일상을 얻었고,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며 웃어넘길 수 있는 서로를 얻었다.




대3병


 

갓 대학교 3학년을 벗어난 입장에서 3학년인 찬란의 모습이 와 닿았다. 대학교 2학년 때까지 만해도 2학년이 가장 방황하는 때인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3학년이 되고 깨달았다. 대1병, 대2병 그리고 대3병... 해마다 환경이 크게 바뀌는 성장기인 대학생을 아프게 하는 요소는 해마다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을.

 

대학교 1학년 때는 꿈 전부였다고 말할 수도 있는 대학의 민낯을 마주하며 크게 깨지고 실망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인간관계, 전공 수업, 대학 생활 등 전면에서 상상과 현실의 괴리를 온몸으로 겪으며 통과한다. 대학교 2학년이 되면 조금의 냉정함을 갖추게 되고, 기대가 무너져 내린 대학생활 속에서 자신만의 꿈을 찾기 위한 고군분투가 이어진다.

 

그렇게 잡은 목표를 가지면,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조급함과 함께 무언가를 깨닫게 된다. ‘내가 어른이 되면, 빛날 줄 알았는데. 유명해질 줄 알았는데...’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기, 그런 갭을 깨닫게 되는 시기이다. 허무함과 동시에, 유명한 사람은 차치하고 내 몫이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생긴다.


찬란이도 비슷해 보였다. 웹툰 원작은 잘 보지 못했지만, 연극에서의 대학교 3학년 찬란이는 자신의 몫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커 보였다. 그래서 모든 일을 계산적으로 생각하고, 연극동아리도 마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녀의 계산적인 모습을 역이용하여 연극동아리로 끌어들이는 부원들이 참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다. 찬란이 그들을 만나 평범한 것, 평범한 일상 안에도 특별하고 소중한 것들이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꼭 연극동아리가 아니더라도, 나에게도, 또 누군가에게도 이런 계산적인 면을 내려놓을 수 있는 아지트 같은 대상이나 장소, 취미가 있을 것이다.


 

 

뮤즈가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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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서 알아주는, 어디서나 찬란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 시기를 겪고 나면 조금의 안정이 찾아든다. 살을 깎듯 허세와 욕심을 깎아내고 나면 포부는 작은 곳을 향한다. ‘그래도, 누군가에게만큼은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뮤즈’라는 말을 좋아한다. 쉽게 말해 영감을 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연극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에서도 찬란은 도래의 뮤즈가 되었다. 찬란의 모습은 도래의 연극 대본으로 적혀 내려져 갔다. 그 장면에서 나의 질문에 대한 힌트를 찾은 듯 해 기분이 좋았다.


찬란하지 않아도 된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해서 돈을 나눠줄 수도 없고, 인기가 없어서 많은 사람에게 예쁨을 받아 함께 누릴 수도 없다. 그러나 나에겐 나의 색이 있다. 한 사람에게만큼은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찬란함 대신에 단단함을 얻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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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예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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