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여름, 모두의 잠잠한 흔들림 - 여름날

누구에게나 유배된 시간이 있다.
글 입력 2020.08.15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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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아닌 저곳은 언제나 새롭다.

 

너무 익숙해져서 지긋지긋한 이곳을 떠나 다른 저곳으로, 사람들은 언제나 떠나고 싶다. 빽빽한 도시를 떠나 탁 트인 곳으로 가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시멘트를 벗어난 초록의 풍경을 보며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까.


승희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거제도로 내려왔다. 거제도는 고향이기 때문에 승희에게 완전한 ‘저곳’은 아니다. 하지만 어색하다. 승희를 보는 내내 느낀 감정이었다. 고향에 내려온 승희가 한없이 어색해 보였다. 너무 오랜만에 내려온 고향이라 그런 것일까. 어머니의 빈자리가 더 생생하게 남아있는 곳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승희 마음에 그 어떤 여유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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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승희는 고향인 거제도로 내려온다. 엄마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곳에서 승희는 엄마의 스웨터를 끌어안고 잠을 잔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도 도통 웃지 못하고, 혼자 남겨진 사람처럼 거제도의 길을 서성인다. 고향이지만 어딘가 승희에게서 동떨어져 보이는 곳. 고향마저도 승희에게 마음을 놓을 휴식처를 제공해주지 않아 보인다.


그러다 우연히 ‘거제 청년’을 만난다. 그날도 혼자 서성이며,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 낚시를 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나타나는,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 이 남자. 조선소에서 일하기 위해 거제도에 도착한 사람. 거제도를 고향으로 가지고 있는 승희보다 거제도를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사람. ‘혼자 서성이기’에 꽤나 통달해 보이는 사람.


그래서 그런 걸까? 승희가 이 사람에게는 어쩐지 마음을 연 것처럼 보인다. 둘 사이는 여전히 어색하지만 만남은 계속된다. 둘 사이의 미묘한 공백은 보는 나까지 어색하게 만들지만, 그들은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있다.


어느 날 그들은 함께 폐왕성에 오른다. 잠겨있는 철문을 열고 들어간다. 과거 왕의 유배지였던 폐왕성에서는 거제도의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누군가의 유배지였던 곳에서 경치를 즐기며 그들은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한참을 앉아 구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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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 대화가 영화의 진행에 엄청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정말 며칠 전에 처음 만난 사이에 할 법한 어색하고 파편적인 대화들이 오간다.

 

영화를 보며 굉장히 현실적이면서 어색함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대화에 놀랐는데, 대본 없이 배우들이 직접 즉흥연기를 했다고 한다. 이야기의 줄기와 상황이 주어지면 배우가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식이다.


또한 우리가 익히 아는 거제도의 풍경보다는 폐왕성(둔덕기성), 낚시, 전통시장과 같이 그곳의 사람들, 풍경과 소재를 살릴 수 있는 공간을 담고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장소가 아닌, 실제 거주하는 집과 논밭 뒤로 펼쳐지는 조선소 기계의 풍경이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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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언젠가 증발한다. 뜨거운 여름 태양 아래 거제 청년도, 승희도 증발한다. 승희 곁에 있던 사람들이 언제 승희 곁에서 사라질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 승희가 겪고 있는 내면의 흔들림이 언제 잦아들지도 모른다.


들과 집과 바다와 조선소가 겹겹이 쌓여 거제도의 풍경을 완성한 것처럼, 승희의 상황도 겹겹이 쌓인다. 가만히 색소폰 소리를 듣고 있는 일, 고기가 미끼를 물기를 기다리는 일, 할머니의 빈자리에 누워보는 일, 출입금지 구역에 태연히 들어가는 일, 마의 스웨터를 매만지는 일 모두가 승희의 이번 ‘여름날’을 구성한다.


거제도의 앞바다와 뜨거운 태양 앞에 있는 승희가 부러워지기도 했다. 나 역시 나만의 유배된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일까? 나의 이번 여름날은 어땠을까. 더위 속에서 마스크로 입을 꼭 가리고 다니고, 계속 되는 장마로 물기를 머금은 듯 눅눅했다.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일에 매달리며 힘을 소모했다. 시간은 누구에게 뺏긴 것처럼 흘렀다.


잠잠해 보이는 바다가 끊임없이 요동치는 것처럼, 오늘도 무사하지만 흔들리는 승희들의 하루하루를 응원하고 싶다. 유배된 시간을 홀로 보내기에 익숙해지면, 그리고 어느 날 그 시간이 증발할 수 있도록.


 


 

 

여름날
- Days in a summer -
  
 
감독/각본 : 오정석
 

출연

김유라, 김록경

 

장르 : 드라마

개봉
2020년 08월 20일

등급
전체관람가

상영시간 : 82분
 
 
[진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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