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서로 다른 언어로 신을 말하다 - 라스트 세션 [공연]

필멸자들의 치열한 논쟁 속 인간의 존재란
글 입력 2020.08.14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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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악을 없애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은 전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능력도 있고 없애려 하기도 하는가? 그렇다면 악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능력도 없고 없애려 하지도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를 신이라 부르나?

 

- 에피쿠로스

 

 

필멸자로서, 인간은 현세의 안녕을 갈망함과 동시에 죽음 이후의 막연한 세계를 두려워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인과의 굴레들을 지켜보고 또 창조하는 절대적인 존재가 우리 위에 정말로 있다는 말인가? 그 존재는 과연 선한가, 악한가?

 

이 땅의 수많은 살육과 눈물을 그저 지켜보는 존재이자, 한편으로는 시련을 통해 깨달음을 주고 또 구원을 내리는 존재의 모습으로서 '신'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실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그렇기에 그 실체를 두고 벌어지는 무신론과 유신론의 대립 역시 필연적으로 이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라스트세션] 공연사진_남명렬(2)(사진제공_파크컴퍼니).jpg

 

 

 

고통이 신념의 형태를 결정하는가?


  

연극을 보면서 가장 뚜렷하게 대비되었던 것은 프로이트와 루이스가 각각 겪고 있는 고통의 형태이다. 루이스는 전쟁의 상흔으로 남은 PTSD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비행기 소리와 사이렌 소리 등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외부 자극에 커다란 두려움을 느낀다. 한편 프로이트는 그의 입천장을 대부분 파먹은 구강암으로 철제 보조장치가 살을 파고드는 고통을 매 순간 견뎌내며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고대 문명 중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지리적 특성상 외세의 침임이 잦아 당장의 현세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집트 문명은 상대적으로 사면이 막힌 지리점 이적 덕분에 행복을 기원하는 그들의 종교적 기원을 죽음 이후의, 내세로까지 확장시켜 종교관을 고도화시킬 수 있었다. 이처럼 이 두 학자들의 고통도 그 형태와 근원이 뚜렷이 대비된다는 점에서, 결국 유신론과 무신론을 나누는 기점은 인간이 겪는 수많은 고통들의 형태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프로이트의 구강암은 지극히 현세적인 것으로, 매 순간 그의 입천장을 찢는 듯한 고통을 만들어낸 암세포라는 원인은 외부적이며 생리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초월적인 존재로서 인간을 언제나 먼발치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신은 그에게 구원의 의미로 다가올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에게 구원은 인간 머리 위의 신이 아닌, 바로 그의 눈앞에 주어진 과학이다.

 

한편 루이스의 PTSD는 스스로의 내면과의 사투라는 점에서, 지극히 정신적인 문제이며 이는 영적으로 충만하고 완전한 존재로 여겨지는 신에 대한 의존에서 구원을 찾기 수월하다. 이같은 차이가 결국 유신론과 무신론으로 이 두 학자를 갈라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철 좀 들게, 루이스



[라스트세션] 공연사진_남명렬(4)(사진제공_파크컴퍼니).jpg

 

 

프로이트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 '누군가 네 뺨을 친다면 다른 한 쪽 뺨도 내주어라'와 같은 기독교적 교리를 지극히 유치하고 현실적이지 못한 이야기로 치부한다. "제발 철 좀 들게, 루이스!"라는 그의 외침은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꽤나 통쾌하게 들린다.


프로이트의 권총자살 계획을 들은 루이스는 자살이야말로 죄악 중의 죄악이라며, 자신의 고통에 대체 어떤 신의 뜻이 있냐며 분노하는 프로이트에게 이 모든 것의 신의 뜻이라면, 숙명적인 원죄에서 기인한 고통을 통해 깨달음을 전하고자 시련을 주시는 것이라면 어떠하겠느냐고 되묻는다.

 

프로이트에게 그 원죄란 인간의 오만함에 지나지 않는다. 한낱 인간 하나가 사과 한 알 먹었다고 수천 년에 걸쳐 인류에게 죄를 묻는 신이라니 그 얼마나 관대하고 고결한 존재인가! 이러한 프로이트의 날선 비판을 듣고 있으면 무신론에 수긍하게 되는데, 그러다가도 루이스의 대사를 듣고 있노라면 또 유신론자들의 신념과 가치에 설득된다는 점에서 이 연극은 참 풍부한 논의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화는 거짓이 아니라, 진리에 닿는 서술입니다.


 

[라스트세션] 공연사진_남명렬(1)(사진제공_파크컴퍼니).jpg

 

 

루이스는 그의 절친 톨킨의 말을 인용하며 "신화는 거짓이 아닌, 그러한 형태로만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진리에 대한 서실이자 힌트"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에게 성경은 원론적이고 이상적인 가르침만을 담은 우화집 같은 것이 아니라 신의 흔적이며 계시이다.

 

"우리는 언어가 달라. 절대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겠지"라는 프로이트의 대사가 처음에는 유신론자들의 논리에 대한 답답함의 표현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내가 오히려 유신론에 대해 고찰할 생각을 아예 닫아놓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닿았다. 언어는 사고를 구성하는 틀이요, 사고에 선행하는 가이드라인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유신론과 무신론은 궁극적으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유의미한 인간의 존재방식에 대한 고찰을 향한 열망에서 기인한 두 입장이라는 점에서 그 전제나 결론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달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지극히 달라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꽤 심도 있는 고민에 이르게 됐다.

 

 


내가 옳다면 우리는 영원히 정답을 알 수 없을거야.


  

 

"무신론자 보험판매원과 목사가 있었어. 임종을 앞둔 그 무신론자와 목사는 하루 날을 잡아 밤새 끝장 토론을 벌였지. 결국 무신론자가 숨을 거둔 그 날, 무신론자는 끝까지 신을 믿지 않았지만 목사는 종신보험에 가입했다네."

 

"재밌네요, 그런 것이 있다면 말이죠"

 

 

루이스가 프로이트의 집을 나서기 전 그들의 마지막 대화다. 루이스가 말한 "그런 것"이란 무엇이었을까.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보험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목사는 신에게서 구원과 지혜를 찾지만 결국 그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주리라 믿음을 준 것은 보험이다.

 

여기서 보험은 그러니까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극복하게 도와 줄 울타리 같은 것이다. 루이스의 말마따나, '그런 것'이 있을까? 신이든, 과학이든 최후의 순간에서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줄 수 있는 보험 같은 것이 있을까, 마지막까지 짙은 여운을 남기는 극 <라스트 세션>을 열띤 토론을 통한 지성의 대향연에 관심을 갖는 모두에게 진심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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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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