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안녕하세요 아트인사이트 전문 필진 오예찬입니다

스스로도 파악할 수 없는 상상을 가미한 자유로운 독백이 취미인 사람입니다
글 입력 2020.08.02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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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대화의 기술The art of conversation

 

 

여기 회색빛이 자욱한 그림이 있다. 구름만 잔뜩 낀 것 같지만 가만히 시선을 내리면 무심한 듯 오묘한 푸른빛을 머금은 산과 들판이 놓여있다. 아, 시선을 내리기 전에 눈에 걸리는 두 사람이 있다. 까만 옷에 까만 중절모를 맞춰 입은 두 사람. 왼쪽 사람은 지팡이를 짚고 서 있고 오른쪽 사람은 한쪽 팔을 살며시 옆 사람을 향해 들어 올리고 있다. 마치 살짝 마주 선 채 대화하는 듯이.

 

얼마나 평범한 풍경인가. 추상화처럼 파악할 수 없는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야수파의 마티스처럼 자유로운 색채의 변주가 있는 것도 아니다. 무미건조하게 하늘, 구름, 산, 땅, 그리고 사람을 그대로 그린 그림이니 말이다. 물론 조금 이상한 것이 있다. 두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허공을 내디디고 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두 사람이 가만히 보여주는 뒷모습은 물음표를 띄우는 관객에게 뭐 그리 놀라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살짝 웃어 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무렇지 않고 참으로 고요하다.

 

이 그림은 철학적인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유명한 르네 마그리트의 "The art of conversation"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대화의 예술"이라 번역했는데 조금 더 찾아보니 한국어로는 보통 "대화의 기술"로 번역되는 작품이었다. 어느 날 평소처럼 SNS를 떠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이 그림을 보게 되었는데, 검은 옷차림의 두 사람에게 시선이 꽂혀 가만히 그림을 보다가 그림 이미지를 작품 이름과 함께 저장해두었었다. 왜 저장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마 적어도 언젠가 다시 한번 살펴보고 싶다는 마음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르네 마그리트의 예술적 언어는 보통 이런 식이다. 아무렇지 않게 기묘한 장면으로 관객인 나의 마음을 헤집어놓는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도 파악할 수 없는 그 경험이 불편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매력적이다. 그의 작품을 이해해보려 마음속의 혼란스러움을 다뤄보는 과정은 오히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기도 한다. 내게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세계는 그런 존재였다.

 

언젠가 다른 글에서 그렇게 쓰기도 했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은 편지 봉투에 내용을 적고 그 안의 편지지에 단어 하나만을 적어놓은 기묘한 편지이며, 그의 작품을 보는 나는 항상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한 채, 무엇인가 적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읽을 수 없는 편지가 쥐어진 당황스러운 관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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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교장The schoolmaster

 

 

글 제목으로 '안녕하세요 아트인사이트 전문 필진 오예찬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네다 갑자기 르네 마그리트 작품 이야기를 꺼내는 이 상황이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교장"과 닮은 상황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르네 마그리트는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오묘한 파란 풍경에 까만 중절모를 쓴 사람의 뒷모습을 앞에 세우고, 그의 머리 위에는 초승달을 띄워 놓고 작품의 이름을 “교장”이라고 지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작품을 만난 상상을 해본다. 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상황인가. '저 중절모를 쓴 사람이 교장이란 말인가?' 같은 질문부터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그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관객을 응시한다. '그럼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저 오예찬이라는 사람은 르네 마그리트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건가?' 나는 대답할 수 있다. 지금은 'Yes'라고 답을 남겨본다.

 

갑자기 어떤 작가의 그림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게 된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나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백지 앞에 앉아있자니 오히려 머릿속도 하얗게 돼버렸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르네 마그리트의 "대화의 기술"이었다.

 

이 그림이 가만히 떠오른 상황을 일종의 '우연이라 한다면, 나는 이 '우연'을 둘러싸고 정말 많은 것을 상상하고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일 것이다. 지금까지 나아온 이 글이 그것을 증명한다.

 

나는 질문에 대한 대답보다는 질문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을 하며 이 글을 자기소개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글로 이어가 보려 한다. 나는 질문에 질문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야 나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상상하는 자유로움이 되는 것 같아서 그런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대화의 기술"을 보고 제목을 읽는 순간 가만히 떠올린 단어는 ‘자유로움’이었다.

 

시간조차 예측할 수 없는 모호한 풍경 한가운데.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내디딘 채. 그렇게 장소, 시간, 주변의 개입조차 부재한 허공의 상태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이 내게는 너무도 자유로워 보였다. 그것이 첫인상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어떤 타인의 영향도 받지 않을 것 같다. 가만히 바라보니 허공에 떠 있는 대화인 만큼 어떤 고정된 사유의 틀에도 갇혀있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의 대화를 상상한다. 아무런 영향이나 개인의 고정관념 없이 어느 곳에도 단단히 안착하지 않은 채 오고 가는 자유로운 대화라는 것이 현실에서 가능할까? 불가능할 것 같다. 너무도 자명한 현실 이미지로 그려진 르네 마그리트 그림은 늘 그렇게 막상 현실에는 결코 없을 어딘가의 꿈이자 미스터리다. "대화의 기술"이라는 편지에서 내가 첫 번째로 읽어낸 것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읽을 때는 전혀 다른 것을 읽어낼 수도 있고, 밑도 끝도 알 수 없이 깊이 침잠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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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이번에 열리고 있는 르네 마그리트 미디어 전시회를 보러가지 못했다. 너무도 슬픈 일이다. 전시회에 대해 검색해보다가 르네 마그리트 그림이 새겨진 전시 굿즈 사진을 보고 정말 오랜만에 마음이 심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이런 게 덕후의 마음이란 걸까). 하지만 꽤 오랫동안 열리는 대형 전시회만큼이나 보고 싶은 작고 영롱한 전시들이 너무 많다. 잠깐 미루면 어느새 종료되는 전시들 말이다. 그래서 이번 달에는 야심 차게 달력에 가고 싶은 전시를 날을 정해 표시해 두었으나 어찌나 비가 거세게 내리는지 (나는 우스갯소리로 비만 내리든지 바람만 불든지 제발 하나만 해달라고 하늘에 하소연한다. 두 상황이 동시에 일어나는 건 정말 끔찍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딱 날씨와 마음 상태가 르네 마그리트의 "대화의 기술"의 색채와 닮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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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나’를 상상해본다. 나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모습을.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 타자를 두들기고, 문장을 쓰다가 막혀서 멈춰 있다가 금세 딴짓을 하고, 단단히 꼬여버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어떻게 글로 옮길 것인지 아니면 과감히 버릴 것인지 답답한 심정으로 고민하며 습관처럼 입에 손을 얹고 아무 죄 없는 노트북을 째려보는 나를 상상해본다.

 

가끔은 반대로 생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글을 쓰지 않는 나를 상상해본다. 오우, 그 상상은 이제 너무도 어려운 지경에 와버린 것 같다. 글을 포기하면 나는 다시 무엇을 해야 하지? 현실적으로도 망상적으로도 어려운 상상이다.


“글” 이라는 물가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발을 첨벙거리던 사람이 눈 감았다가 뜨니까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지금은 그 안에 쑥 들어가서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려보며 머물고 있다. “저기요! 수영을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줄 수 있나요?” “네? 수영이요? 저는 수영을 할 줄 모르는데요?” “그럼 물속에 어떻게 계속 그렇게 있는 거예요?” “...글쎄요?! 제가 어떻게 이 물속에 머무는 걸까요?” 나는 이상한 사람이다.


나에 대한 질문이 불쑥 다가오면 아무런 대답도 제대로 못 한 채 질문만 반복하는 것이 꼭 바보 같기도 하다. 아니 바보다. 나는 왜 이 물속에 들어온 걸까. 수영선수도 아니고 특별히 첨벙거리며 쉬고 놀고 싶은 마음에 들어온 것도 아닌 것 같다. 잠자코 그곳에서 발버둥 쳐보더니, 다시 물가로 올라가 앉아야겠다는 생각이 아닌 앞으로도 머물러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나는 늘 그렇게 그런 바보 한 명을 안고 디지털 픽셀로 띄워진 하얀 백지 앞에 앉는다. 그러고 있으면 내 안의 그 바보는 굴러온 공 하나를 쥐고 벽 앞으로 간다. 그러곤 벽을 향해 공을 던진다. 그러곤 어느 순간 손에 쥐어진 ‘채’로 공을 다시 받아친다. 혼자 벽을 마주하고 승자 없는 치열한 핑퐁 게임을 시작한다. 바보가 공을 쳐내 벽을 한 번 탁- 때릴 때마다 문장 하나가 스윽- 하고 백지 위에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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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너무도 자주 공을 놓친다. 공을 주고받는 시간만큼이나 저 멀리 잘못 튕겨간 공을 주우러 가는 데에 시간을 소비한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벽으로 사방이 가려진 방 안에서 핑퐁 게임만을 온종일 치열하게 하는 줄 안다. 내가 발버둥 치고, 핑퐁 게임을 하고, 공을 주우러 다니는 이 물웅덩이가 있는 공간에 들어와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글을 쓰는 나’ = ‘물에 들어갔지만, 수영을 하지 못하며, 이야기해야 할 공 하나가 물속에 들어오면 벽 하나를 찾아 혼자서 승자 없는 핑퐁 게임을 하는 나’라는, 사실 별 의미 없는데 지나치게 긴 공식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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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하는 마음속 ‘바보’와 달리 사실 오예찬은 13살에 수영 상급반까지 과정을 마쳤다. 그렇다고 지금 수영하라고 하면 심히 당황할 것이다. 요즘은 다시 물이 좀 무섭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릴 때처럼 바닥에 깊숙이 들어가 수영하는 건 못한다. 심해 공포증이 있다. 무엇을 밟을지 알 수 없는 공포가 도사리는 바다보다 바닥이 깨끗이 보이는 수영장이 좋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물’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글을 쓰는 나’를 상상했다. 물에 일렁이는 반짝임은 호아킨 소로야의 물결과 같다면 얼마나 좋을지 잠깐 상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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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광경인가. 그래서 나는 여전히 글을 쓰는 나를 자주 의심한다. 그렇게 딴생각을 하다가 또 핑퐁 볼을 받아치지 못하고 허공에 선물로 줘버린다.


몇 걸음 다가가야 다시 주울 수 있는 거리에 떨어진 공을 보며 한숨을 쉰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잘 머물고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꽤 오랜 시간을 물가에 어정쩡하게 앉아 손에 들린 공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조차도 몰라 안절부절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다시 공을 주우러 간다.


'이제는 내가 공을 찾아야 한다' 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공이 알아서 내 물웅덩이에 날아왔었다. 내 물웅덩이에 날아왔던 백 개 정도의 공이 다소 무분별하게 담긴 유리병을 바라본다. 이제는 그것들과 달리 내가 공을 찾거나 만들어야 한다.


물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여전히 잘 모르지만 몸이라도 첨벙거리며 물웅덩이에 계속 머무는 나는 어떻게 보면 참으로 천진난만하고 어리숙한, 부족한 자신을 알면서도 이상적인 글을 쓰고 싶어하는 글쓴이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선명한데 잡을 수 없는 꿈이다. 르네 마그리트 그림 같은 꿈.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천진난만하다고 말한 것과 달리 사실 현실에서의 나는 벽 앞에서 많은 시간을 애썼다. 고민을 만나며 인상을 쓰고 아무도 만날 수 없는 벽 앞에서 마지막 문장의 점을 찍을 때까지 앉아있는 것은 너무도 괴로운 일이다.

 

물론 이제는 익숙하다. 아마 그럴 것이다. 아니 익숙하다. 이제는 벽에 거울 하나를 달아야겠다. 나를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을 주고받는 중에도 내 주변에 놓인 것들을 함께 살펴보기 위해.



tmi.

2020.08.02. 오후 4:30. 공이 또 다시 허공으로 사라져버리다.

바보가 내게 전했다. 나는 공을 다시 주우러 갈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tmi.

파일 하단에 있던 메모.

(이번 글은 무겁지 않게, 그리고 짧게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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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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