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때리는 것도 아닌데 혐오표현이 뭐가 문제냐고요? [도서]

<선량한 차별주의자>와 <말이 칼이 될 때>를 읽고
글 입력 2020.08.03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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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무르만스크에서 오로라 여행을 하고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줄을 서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큰 덩치의 러시아 남자 셋이 우리를 보고는 “니하오~”하고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인종차별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기내에서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고 있던 옆자리 승객을 부득이하게 깨워, 감사함에 “Thank you”라는 말을 건네자, 그들은 또 다시 내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며 시시덕거렸다.

 

분노를 느꼈고, 항의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사과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행동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분노와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비행기 속에서 나는 언어도 통하지 않는 타지에 여행을 온 작은 체구의 아시아 여자에 불과했다. 내게는 그들을 자극할 만한 용기가 없었다. 만약 시비에 휘말려 폭력 사태에 휘말리게 된다면 손해를 보는 건 누가 봐도 나였다.

 

그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무시였다. 마치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들을 지나치는 행위 말이다.

 

*

 

최근 코로나19의 전세계적 확산세 속에서 아시아인들에 대한 폭력을 다루는 뉴스가 연일 쏟아져나오는 것을 보면 이 이야기가 떠오른다.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는 이제 일정 수위를 넘어섰다. '칭챙총' 등 지금껏 공기 중에 태연히 떠다니던 혐오표현들이 이제는 끔찍한 혐오행위로 번지고 있다.

 

치료약 없는 질병 앞에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갈 곳 잃은 분노를 사회적 약자에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서구권에서 아시아인들은 ‘걸어다니는 코로나바이러스’가 되어버렸고,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그 나라에서 그 문화를 공유하고 자란 아시아계 이민자라도 예외는 아니다. 멜라닌 색소의 차이가 모든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아시아인에 대한 선별적 폭력이 위기적 상황 속에서 갑자기 증가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인종차별은 항상 우리 주변에 있었다. 기저에 존재하던 차별적 의식이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크게 표출된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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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혐오는 항상 이러한 기제로 작동해왔다. 1923년, 유례없는 규모의 대지진 앞에 유언비어에 휩쓸린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관동대지진 사건 때에도 이는 결코 갑작스럽게 발생한 해프닝이 아니었다.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 속 '조센징'이라는 단어로 표방되던 조선인에 대한 차별의식이 대지진이 불러온 불안감을 기폭제로 삼아 폭발한 결과였다.

 

그러한 면에서 홍성수 작가가 <말이 칼이 될 때>에서 여성혐오를 예시로 혐오표현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부분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된장녀 신상털기와 데이트 폭력, 성폭력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 제기다. 다양한 수위의 차별, 적대, 배제, 폭력의 말들을 ‘혐오표현’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내 이 문제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 말이 칼이 될 때, p. 34

 

 

의식과 표현, 행동은 결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와 행동은 생각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혐오표현이 위험하다. 혐오표현은 특정집단에 대한 혐오감을 내포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를 강화한다. 증폭된 혐오감은 혐오범죄의 원인이 된다. '호명 권력'이 중요한 이유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김지혜 작가는 이렇게 쓴다.

 

 

당신은 스스로 원하는 방식으로 호명되고 있는가? 당신은 타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호명하고 있는가? 당신의 호명 권력은 어느 정도이며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 선량한 차별주의자, p. 96

 

 

그렇다. 혐오를 담아 다른 사람을 마음껏 호명할 수 있는 힘이 곧 ‘권력’이다. 엄마들을 ‘맘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권력, 여성들을 ‘김치녀’라고 부를 수 있는 권력, 게이들을 ‘똥꼬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권력, 그리고 아시아인들을 ‘코로나바이러스’라고 부를 수 있는 권력.

 

소수자의 배제와 고립을 낳는 혐오행위는 모두 이렇게 사소해보이는 호칭에서 시작된다.

 

 

혐오표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결국 ‘공존의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함이다. 제러미 월드론은 공존과 공공선을 이야기한다. 누스바움은 인간을 존중하고 “상상력을 동원해 타인의 삶에 감정적으로 참여”하는 태도인 ‘인류애의 정치(politics of humanity)’를 말한다.


- 말이 칼이 될 때, p. 229

 

 

이 말을 뒤집으면 혐오표현을 묵인하면 사회의 공존과 공공선이 위협받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혐오표현은 우리의 공감능력을 마비시킨다. 혐오표현에 물든 집단은 피해집단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며,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결국 혐오에 무감각해진 사회는 혐오범죄에 취약해지고 만다.

 

‘소수자’라고 하면 당장 우리와는 관련 없어 보이는 말 같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도 언젠가 어떤 상황 속에서는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내국인의 권리를 마음껏 누리던 우리가 해외여행을 가면 일개 ‘니하오’로 전락하듯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민하게 촉을 세우고 혐오표현을 감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혐오가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표출될지 아무도 모른다.

 

혐오표현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문제제기를 할 때 우리는 코로나와 같은 위기가 다시 닥쳐도 분열되지 않고 공존하며 견딜 수 있는 회복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애적 가치를 잃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때리지 않아도 혐오표현은 엄연한 문제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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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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