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설 같은 삶 - 연극 '그 여자의 소설' [공연예술]

“그 여자의 소설”
글 입력 2020.07.12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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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기][크기변환]그 여자의 소설 캡쳐.JPG

 

 

요즈음 연극에 큰 흥미가 생겨서 또 혜화를 찾았다. 아트인사이트를 통해 알게 된 ‘대학로 예술극장’. 어떤 연극들이 상연되는지가 느닷 궁금해 들어갔다간 그대로 예매 버튼을 누르게 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운도 좋지, 때마침 ‘제11회 대한민국 국공립극단 페스티벌’이 진행되고 있었던 덕분이다.

 

고백하자면, 다른 연극티켓보다 현저히 저렴한 가격에 먼저 눈이 끌렸다. 강원도립극단, 순천 시립극단, 수원시립공연단, 광주시립극단, 총 네 개의 국공립극단의 연극이 있었고, 개중 이번에 관극하게 된 '그 여자의 소설'은 수원시립공연단의 연극이다.

 

 

자르기][크기변환]제11회 국공립극단 페스티벌.JPG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블로그 페이지 中


 

글 쓰는 지금에야 자세히 찾아보니, ‘대한민국 국공립극단 페스티벌’은 매해 개최되는 ‘릴레이 공연 페스티벌.’ 해당 지역, 예컨대는 수원과 순천과 광주와 강원도에 방문하지 않고서 해당 지역 국공립극단의 수준 높은 연극을 몰아볼 수 있는 페스티벌이다.

 

지금까지는 매년 경주에서 개최되던 이 페스티벌은, 올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정한 ‘2020년 연극의 해’를 기념해 서울과 경주로 나뉘어 진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 페스티벌은 ‘아르코 예술극장’을 통해 진행되었다. 이런 사정도 통 모르고 관극했다니, 나도 참 운이 좋다.

 

공연 당일은 6월 21일 일요일, 하지 夏至. 날이 가장 긴 오늘, 더위가 만만치 않다. 혜화까지 오는 길 시원한 버스에 앉아, 쨍쨍한 햇볕이 비추어 아름다운 바깥 경치를 구경했다. 그리고 내리자마자, 이제 내 등을 비추며 그 햇볕이 왈칵 얹히니 숨이 컥 가빠오더라. 서둘러 아르코 예술극장으로 내달았다.

 

연극이 시작하기 직전, 기다리는 객석이 참 좋다. 곧 있을 연극을 기다리며 설레는 것이, 내 새로 생긴 취미. 특히나 이렇게 더운 나날에 극장은 더없이 피서지 같다. 관객들은 하나둘씩 입장하기 시작하고, 서로 사이에 한 자리씩 떨어져 앉아서 나긋이 각자의 이 연극에 대한 기대와 오던 길의 설렘과 그 외 일상들을 나눈다. 본의 아니게 그런 것들을 엿듣는 나는 이 소박한 풍경이 사뭇 즐겁다.

 

이런 참에 객석엔 아직 조명이 환한데, 극이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연기가 시작된다. 무대 한구석에서 주요 화자인 ‘작은할머니’가 바느질을 시늉한다. 그 앉을 자리를 예열하는 듯. 그런 통에 극이 시작되기 직전에 나오는 특유의 안내방송이 틀린다. ‘코로나에 대한 당부’와 ‘영상 촬영과 녹음에 대한 당부’의 방송이 울려 퍼지고, 그 아래에서도 ‘작은할머니’는 개의치 않고 바느질을 하고 있고, 나는 그런 광경이 처음이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객석에도 어둠이 찾고, 전부터 바느질하던 ‘작은할머니’에게만이 조명이 쪼여 눈부시다. 이 완전한 어둠 속에서는 오로지 볼 수 있는 것이 그녀뿐이었으니, 뚜렷하게 집중된다. 곧 무대와 객석과 바느질하는 할머니 전부 아주 캄캄해지며, 어둠 속에서 분주히 무대와 소품이 마련된다. 대극장에서의 연극을 처음 보는 나로서는 이런 것들이 참 늦게도 새롭다. 신기한 눈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응시하며, 나는 극으로 삽시간에 빨려 들어감을 느낀다.

 

*

 

극은 ‘작은할머니’와 손녀의 문답, 과거 회상의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둘은 막의 전환 때마다 앞서부터 예열해둔 이 구석에 등장해 묻고 답한다. 할머니는 곧 결혼할 손녀에게 줄 치마를 기우며, 손녀에게 처음으로 긴 긴 이야기들을 펼쳐준다.

 

막은 “왜정 말기”에서 출발한다. ‘정신대’ 이야기가 나돌던 고통스런 시절이니 벌써 70년도 더 되었다. 이름도 없는 우리의 주인공, ‘작은댁’은 김 씨네 씨받이로 들어간다. 없는 살림에 남편은 독립운동을 하러 가 소식도 없고, 유일한 딸 ‘조춘이’를 먹여 살릴 궁리를 하느라 내린 선택, 씨받이. 듣기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단어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 ‘작은댁’의 삶은 하염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기 시작했다.

 

‘족보 있는 가문에 대를 이을 사내아이가 없다니 될 말인가.’ 그것은 김 씨네 ‘큰댁’이 거듭 받아오는 핍박이자 자책이다. 워낙 많이 들은 ‘옛이야기’라 새롭지는 않다만, 들을 때마다 이질감과 기피감이 자연스레 드는 그 말, ‘큰댁’은 그렇게 “씨받이”를 물색해 들인다. “아이만 하나 낳아주면, 내 섭섭잖게 사례함세.”


 

자르기][크기변환]그 여자의 소설 2.jpg


 

그러나 그녀는 약속대로 사내아이를 낳아주고서도, 영영 그 집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렇게, 원치 않는 ‘작은댁’이 되어버린다. 이 집에서 기어이 나간다면 작은댁을 모함해 감방에 처넣고 말리라는 김 씨 사내의 말. 왜정 말기, 아직은 일본 순사가 거리를 돌던 가슴 아픈 시기였고, 사내는 옹졸하고 추한 남자의 전형적인 본보기를 띠고 있었다. 소유욕이다.

 

불과 70여 년 전인 이 무대의 위에는, 지금 셈해보자면 경을 칠 일들이 마치 당연하단 듯이 서술되고 있었다. 우리의 주인공 ‘작은댁’은 그렇게, 딸아이 ‘조춘이’에게로는 돌아가지 못했고, 자기 배로 낳은 사내아이 ‘진범이’는 약속대로 ‘큰댁’에 넘겨주었다. 두 자식 모두 보지 못하는 것은 미칠 팔자일 터인데, 어째 그 시절에는 체념이 당연하다는 듯. “어쩔 수 없지유우……” 하는 그 처연한 목소리는 왜 이리 깊은지……

 

옛 가부장은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구역질이 난다. 사내아이를 낳아주고서도 그 집에 매여버린 ‘작은댁’은 김 씨 사내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된다. 물론 작은댁 스스로는 그것이 너무도 불쾌하고 불편하며 지긋지긋할 따름, 까닭인즉 그로써 큰댁이 매몰찬 대접을 받게 된 때문이다. 큰댁은 개의치 않는다. 자기는 사내아이인 ‘진범이’만 있으면 세상만사 괜찮다는 듯, 그 체념하는 모습이 보는 우리로 하여금 대신 억하심을 느끼게 한다.

 

창경원 동물원을 두 아낙을 ‘거느리고’ 나다니는 김 씨 사내. 큰댁은 아이를 업고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고, 작은댁은 꽃단장을 시켜두었다. 참으로 불편한 그림. 큰댁은 괜찮노라 체념하고 작은댁은 더없이 불편한데, 자기 혼자 으스대고 있는 저놈의 꼬락서니를 보자면 눈살 펴지를 못하겠다. “어이! 이리와!” “어이! 깔아!” “어이! 상 차려!” 이 모든 경악스런 일들이 불과 70여 년 전의 일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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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 사내, 이제는 남편인 그 사내의 핍박 속에서 본처와 후처, 큰댁과 작은댁의 사이는 돈독하다. 큰댁은 아주 의로운 여성, 작은댁은 이 지긋지긋한 집안에서 큰댁을 ‘어머니’처럼 의지하며 못내 살아간다. 그런 나날 속에 대한독립은 오고, 원래의 남편인 ‘조춘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마쳐 돌아오고, 그에게로 돌아갈 수 없음에 눈물로 이별하고, 이런 사람의 일들이 그냥, 시절처럼 무심하도록 지나간다.

 

또 이어, 익히 우리 알 듯 전쟁은 찾았고, 막은 1.4 후퇴 때 잠시 멈춘다. 남편이란 작자는 만사 만인 제쳐놓고 저 혼자 몸을 부산에 피해있었고, 전쟁통을 두 아낙이 뚫고 지나간다. 그리고 큰댁은…… 작은댁은 이제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지도 모른다. 비로소 쌓인 한 恨을 마구 표하고 분출하고 뱉는다. 누구를 의지해 이 억울하기만 한 삶을 나아가나. 그런데도, 특유의 느리고 유순한 충청도 사투리의 옷을 입은 그 한 恨은, 참으로 순박하기만 해 더 절절했다.


**

 

막은 그 이후로도 자잘한 일련을 거쳐, 말하는 지금인 손녀의 곁, 반짇고리 앞으로 도착한다. 손녀는 작은댁을 시종 ‘작은할머니’라 부른다. 김 씨 사내는 독자 獨子, 어떻게 작은댁은 ‘작은할머니’로 자리매김해 있었을까. 우리 세대에게는 이해되지 못할 그 긴 긴 사연을, 작은댁은 이제야 손녀에게 풀어준다.

 

이제 내일이면 결혼할 손녀의 한복 치마를 누비며, 그 긴 이야기를 풀어준다. 치마는 이제 막 완성되었고, 손녀에게 그 치마를 펼쳐 보이며, 손녀의 결혼생활이 창창히 펼치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연극은 마친다.


“너희들은 우리처럼 살지 말고

사랑받으면서 행복하게, 그렇게 예쁘게 살어~”

 

이런 투박하고 진부한 말을 진부하지 않게 만드는 힘. 그것은 앞서 내내 이어져 온 연기의 힘일 것이다. 이러한 경악스런 모든 인간의 일들로부터 멀어진 우리, 그런 이야기들을 공감하는 데 필요한 티끌만큼의 경험도 갖지 못한 우리는 연극을 통해서나 가장 여실히 그것을 이해해볼 수 있겠기에. 재현됨으로써 눈에서 눈으로, 몸에서 몸으로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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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머리가 하얗게 센 어른들로부터 저런 비슷한 당부의 말씀을 받곤 한다. 그것은 아마 자신의 한 많은 인생을 반추하며 어리는 진심, 그러나 그것을 표현하는 당신의 입술은 단출하니 말라 있었다. 또한, 그 투박하고 진부한 말에 귀를 착하니 감아보기에는 내 앎이 너무 적기도 하였다.

 

나는 이런 옛이야기들을 좋아한다. 그 모든 역사의 산실은 곧 내 할아버지의 이야기이기도 한 까닭이다. 지나간 격랑의 세월, 그 세월이 가지는 비극과 비장미란 지금의 내게 아득하고, 그래서 새롭고, 웅장하게 다가온다.

 

그러고 보면, “너희는 우리처럼 살지 말고……” 하는 말씀은 종종 들어온 바 있다. 그러나 그 모든 말들을 능히 내 심경에 닿게 할 서사와 재현은 우리의 일상 속 적었음에, 아마 스치듯 흘려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이런 서사와 재현의 앞에서나 비로소 받아들일 수가 있게 된 내 지금의 감각은, 모종 씁쓸함을 안고 있다.

 

이런 이야기가 더욱 많이 생산되기를. 그리고 더욱 많은 우리에게 닿기를. 조부모 세대의 이야기들에는 대개 한이 잘 어리어 있다. 말도 안 되는 시대 속을, 그 각자의 당신들께서 살아내고 감내하고 뚫고 지나오면서, 낙인과 훈장처럼 무언가가 가슴 위에 달리어 있더라. 그것은 비극의 시대를 감내한 인간이 가지게 되는 한이요, 그 시대를 맞선 인간이 지니게 되는 앎이지 않을까. 시대가 흐를수록 멀어지기만 할, 그 시대의 기억과 그 시대의 인간들과 그 시대의 마음을, 우리가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

 

“그 여자의 소설”

 

그 삶이 소설 같이 말이 안 되는 삶이요, 또한 그 말 안 되는 삶이 능히 소설로 쓰일 만큼, 쉬이 납득될 만큼 우리의 역사에 만연했던 까닭일 것이다. 소설이 무어라고, 내가 말해볼 수는 없겠지만 소설은 분명 인간의 이야기.

 

그 여자의 삶이 ‘소설같다’는 것은 그것이 허구같이 잘 믿기지 않는다는 뜻이요, 그 여자의 삶이 ‘소설’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독자의 공감을 획득할 수 있을 만큼 만연했다는 뜻이다.

 

믿기지 않는 이 만연했던 이야기, 연극 “그 여자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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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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