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숨 막히는 하이퍼 리얼리즘 - 장녀들 [도서]

글 입력 2020.06.29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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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 리얼리즘, 즉 극사실주의는 주관을 배제하고 사진처럼 극단적인 사실적 묘사를 추구하는 것을 뜻하는 문학비평용어다.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보편적인 단어로 자리 잡은 ‘하이퍼리얼리즘’은 용어가 발생한 미술은 물론 영화, 소설, 연극을 아우르며 비평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나의 취향을 말하자면 확실하게 판타지보다 사실주의다. 장르가 무엇이 됐든 비현실적으로 행복한 이야기에는 태생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현실은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아는지라 마냥 행복한 이야기를 보면 자동으로 위화감이 찾아온다. 이런 나의 취향은 내 친구들은 애써 피하는 어두운 장르의 작품을 찾게 했다. 시노다 세츠코의 <장녀들>을 읽는 순간 웬만한 작품은 괜찮다는 자부심은 와르르 무너졌다.

 

 

장녀들_표1.jpg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간병하는 나오미,

어머니를 향한 애증으로 괴로워하는 게이코,

꿈을 위해 아버지를 버렸다는 죄책감을 품고 사는 요리코.

 

초고령 사회의 사각지대, 가족의 그림자에 붙들린 장녀들의 서늘한 목소리

 

 

장녀들에게 한이 많다는 건 한참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어디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당장 내 옆에 괴로워하는 한 장녀가 있었다. 바로 우리 큰 언니였다.

 

어른들은 우리에게 입을 모아 엄마 말 잘 듣고 효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형제 중 엄마가 고생이 많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큰 언니에게 그 말은 더 큰 무게감을 안겨주었다. ‘말썽 안 일으키고 나중에 성공해서 보답해야지’ 정도의 생각으로만 그쳐도 되는 나와 달리 큰 언니는 어른들이 요구하는 효도를 당장 실현해야 했다.

 

나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해결하며 동생들 용돈을 주고 곧바로 취직하고 가장 노릇을 하는 게 성인이 되면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나도 언니 나이가 되면 그렇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되었을 때 나는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어 가족들에게 자주 도움을 요청하곤 했다. 어느 것 하나 당연한 게 없었는데 언니는 당연하게 줬고 나는 당연하게 받았다. 10대 시절 언니가 내뱉었던 ‘내가 일찍 태어나고 싶어서 일찍 태어났느냐’는 말은 어린아이의 투정이 아니었다. 책을 읽는 내내 느꼈던 답답함은 대부분 큰 언니를 향한 죄책감에서 왔다.

 

<장녀들>은 세 편의 소설 ‘집 지키는 딸’, ‘퍼스트레이디’, ‘미션’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세 명의 주인공 나오미, 게이코, 유리코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그건 바로 비혼의 장녀이며 부모가 노인이라는 점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각각 여동생, 남동생, 오빠라는 다른 형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설정을 통해 작가는 독자들에게 단순히 일찍 태어난 것을 넘어 ‘장녀’인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첫 번째 소설 ‘집 지키는 딸’은 초고령 사회에서 가족의 굴레에 갇힌 장녀의 고통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홀로 모시는 상황 자체부터 극단적인 압박감을 준다. 두 번째, 세 번째 소설 ‘퍼스트레이디’와 ‘미션’은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다. ‘퍼스트레이디’에선 유능한 의사 아버지가 있고, ‘미션’은 장녀 본인이 의사이다. 사실 ‘집 지키는 딸’도 유산으로 남은 집 덕분에 조금은 희망찬 결말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나마’ 나은 상황들이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상황들은 소설의 장녀들이 지닌 압박감을 조금도 해소해주지 않는데 말이다.

 

이 책의 핵심은 ‘공감’이다. 인물들 이름도 그렇고 언급되는 지명도 그렇고 모든 것들이 이 책이 일본 소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한국 작가가 쓴 게 아닌가 의심스러워 자꾸 작가 이름을 살펴보았다. 네이버 웹툰 <27-10>을 통해서 ‘K-도터’라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다. 한국의 원죄 의식을 공유하는 딸들을 가리키는 말로, 그들은 가족 중에서 특히 엄마에 대한 죄책감을 지니고 있다. 책에는 살면서 만나온 ‘K-도터’와 다른 구석이 하나도 없는 ‘J-도터’들이 있었다.

 

페미니즘 담론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딸과 엄마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엄마는 가족 중에서 자신과 같은 성별인 딸에게 감정적으로 의지하지만, 실질적인 도움은 남자 형제에게 준다. 딸은 엄마의 선택적인 애정을 원망하지만, 그럼에도 연민을 지울 수 없어 엄마에게 가장 헌신적인 도움을 준다.

 

언젠가 엄마가 내게 전화로 한탄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 긴 하소연을 마치고 엄마는 ‘내가 이런 말을 누구한테 하냐. 딸한테 하지.’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그래, 이러라고 딸이 있는 거지. 언제든지 힘든 거 다 말해.’라고 답했지만, 한탄이 몇 년에 걸쳐 쌓이고 쌓이자 깊은 피로감이 찾아왔다. 반복적으로 내뱉는 ‘그나마 딸이 있으니까 내가 이런 말도 하는 거지.’라는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엄마가 딸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무엇이 됐든 일방적인 관계는 문제를 낳게 마련이다. 엄마는 내게 하소연을 늘어놓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아무리 힘든 일을 겪어도 엄마보다는 덜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역경을 뚫고 우리 형제를 키웠는지 알기에, 여태 내가 받아온 양육의 무게를 알기에 입을 굳게 다물고 엄마의 말을 들어주기만 했다.

 

최근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 가족들을 만났다. 집에는 큰 언니가 마련한 새 가구들이 있었다. 큰 언니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내가 느낀 피로감은 약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니는 엄마는 물론 친척 어른들의 하소연도 들어주고 있었다. 왜 하필 언니에게 연락하느냐는 나의 말에 언니는 친척 어른의 말을 대신 전했다. 내가 이런 말을 누구한테 하겠니. 너한테나 하지.

 

언니와 마찬가지로 소설의 장녀들은 결코 외동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두 장녀를 가정의 유일한 책임자로 인식한다. 책을 읽다가 너무 화나서 책장을 덮고 심호흡을 한 부분이 있었다. ‘집 지키는 딸’에서 장녀 나오미가 동생 마유코에게 치매 어머니가 일으킨 사고를 전하자 마유코가 그때 언니는 뭐 하고 있었냐고 따지는 부분이었다. 본인도 양육의 혜택을 받았으면서 부양의 의무는 내팽개치고 심지어 그것을 쉽게 말하는 태도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분노는 어느새 죄책감으로 바뀌었다. 사실은 나도 마유코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읽는 내내 내 마음을 무겁게 한 건 죄책감만이 아니었다. 문제의 원인이 사회 구조에 있다는 막막함도 있었다. 책에서 장녀들과 대립하는 건 단연 노인이 된 부모 세대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 당뇨병에 걸린 어머니, 고독사로 사망한 아버지가 그녀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들이 장녀들에게 스트레스 수준으로 의존하는 걸 단순히 개인이 나약해서라고는 할 수 없다. 책의 어느 인물도 너무나 당연하게 어머니에서 비혼 장녀로 가정 내 여성의 희생이 대물림되는 사회 구조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마지막 소설 ‘미션’은 앞의 두 소설과 달리 주인공 가족의 이야기가 아닌 유리코가 의료 봉사하러 간 마을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생명과 건강에 대해 일반적인 견해와 다른 사상을 지닌 마을 사람들은 유리코의 상식에 어긋난 행동을 자주 보인다. 장녀가 필요 이상의 의무감을 느끼는 것도, 가족들이 장녀에게 당연하게 의존하는 것도 특정 가족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가부장제의 문제일 것이다.

 

타지에서 외롭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습관적으로 ‘집에 가고 싶다’고 중얼거린다. 그러면서 정작 집에 내려가는 일은 일 년에 한두 번뿐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은 좋지만, 고향을 지배하는 가부장제의 기운에 힘이 빠지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희생하는 집안 여성들과 당연하게 즐기는 집안 남성들, 그 사이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해 아예 집에 안 내려가는 방법을 택했다. 책 <장녀들>은 내가 여태 애써 외면해왔던 그 부분을 정확하게 보여주었다. 하필 이 책을 고향에서 읽어서 더 마음이 복잡했다.

 

보통 이쯤에서 집안의 가부장제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으로 글을 마무리하는 게 맞을 텐데 선뜻 그럴 자신이 없다. 이 글을 쓰고 난 이후에도 여성이지만 장녀는 아닌 나의 나약함과 비겁함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글을 끝맺을 수는 없다. <장녀들>의 세 소설 모두 어설픈 해피엔딩으로도, 비관적인 새드엔딩으로도 끝나지 않는다. 장녀들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잘못됐다는 걸, 자신의 희생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으로 끝을 장식한다. 나는 아직 이 세상을 바꾸기엔 너무나 약하다. 하지만 적어도 나 스스로 뼈저리게 깨닫고 그 깨달음을 주변 장녀들에게 나눠줄 수는 있지 않을까.

 

 


 

 

장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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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시노다 세츠코


옮긴이

안지나


펴낸이

주일우


출판사

이음


발행일

2020년 5월 29일


정가

14,800원


쪽수

340쪽


판형

135*200mm


ISBN

978-89-93166-09-5 03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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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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