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금, 당신 옆에서 들리는 이야기 - 더 테이블 [영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
글 입력 2020.06.11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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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한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두 사람이 자리를 뜬다. 그리고 또 두 사람이 그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그런 단조로운 행동들이 계속해서 되풀이된다.

 

하루 동안 같은 장소의 같은 자리를 거쳐간 사람들. 그렇지만 그들의 대화는 결코 단조롭지 않고, 어디도 비슷한 구석이 없다. 처음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 대체 이들이 무슨 사이인지 알 수가 없다. 외모도, 직업도, 풍기는 분위기도 각각 너무 다른 사람들. 그래서 그들의 관계가 더 오묘해 보였는지 모른다.

 

 

 

유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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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내부도, 카페가 위치한 동네도 더할 나위 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공간. 유진은 테이블에 머물렀던 인물 중 가장 처음으로 카페에 발을 디딘다. 그리고는 유일하게 꽃이 있는 그 테이블에 앉는다.

 

곧이어 한 남자가 유진을 발견하고 같은 테이블에 앉는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자리이지만, 유진은 개의치 않는다.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이미 오래전 헤어진 연인인 이들이 어쩌다 이곳에서 만나게 된 걸까? 그들이 언급하지 않았기에 전혀 알 도리가 없다.


 

-자상함이 좋네, 여전히. 새치 빼고는 안 변했어.

 

-넌 좀 변했어. 연예인들 얼굴 많이 고친다던데. 아무튼 연예인들 진짜 안 늙는 것 같애.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대화는 시작되었지만 어쩐지 처음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뿐이다. 서로가 사는 세상이 너무나 달라진 만큼, 생각도 너무나 달라져버린 걸까. 서로 언급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나오면 그저 웃음으로 넘겨버린다.

 

그러다 남자가 건넨 조금은 민감한 질문에, 유진은 쿨하게 대답한다. 그가 질문한 사건에 대해, 그에 대한 나쁜 소문은 거짓이고 그는 좋은 사람이라며 자리에 없는 옛 연인에게도, 눈앞에 있는 옛 연인에게도 예의와 배려를 갖추어 말한다.

 

그러나 낮부터 마신 맥주 탓일까, 아니면 유명 배우가 되어버린 유진을 다시 보기 힘들 거라고 생각한 걸까. 남자는 유진에 대한 예의는커녕 듣는 이가 더 불쾌하고 무례한 질문과 행동을 한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자리만큼, 그의 속내도 훤히 들여다 보인다. "다 추억이잖아." 이 한마디로 모든 무례와 황당함을 무마시키려는 듯하다.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지만 누구보다도 멀어진 시간은 너무나 길었다. 그 간극은 너무 길어서 둘은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듯하다.


 

-아쉽다.

 

-나도 그래.

 

 

자리를 뜨며 유진은 남자의 말에 동감을 표했지만, 둘의 '아쉽다'의 의미는 서로가 마신 맥주와 커피만큼이나 달라 보인다.

 

 

 

경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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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해 보이는 경진과 여유로워 보이는 남자. 행색과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의 분위기.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지만 어색한 기류는 지울 수 없다.

 

경진은 남자가 두고 간 손목시계를 꺼내 건넨다. 무려 다섯 달간이나 남자의 손목에 없었던 손목시계. 자연스레 지난 다섯달 간의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 뒤 여자의 근황을 묻는다.

 

서로가 생각하던 서로와는 살짝씩 빗겨나는 두 사람. 그래도 남자는 생각보다 경진에 대해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경진은 남자에 대해 냉소적이고, 남자를 나무란다. 그럼에도 남자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아무렇지 않게 모두 맞받아친다.


 

-경진 씨 저 잘 모르시잖아요.

 

-네.


 

아, 그걸 꼭 입 밖으로 내뱉어야만 했나요.


 

-이야기해요 우리. 경진 씨 저 잘 모르시잖아요.


 

경진이 그랬듯 그도 경진에게 체코에서 산 손목시계를 건네고 채워준다. 매일매일 홀로 태엽을 감았던 시계를. 다섯 달간 사진 한 장 보내지 않았던 남자는, 좋은 것을 보면 사진을 찍는 대신 이곳으로 직접 가져와버렸다.

 

주인 없이 지내온 시계들은 주인을 만난 이제서야 시간이 간다. 멈춰있던 그들의 시간이 그렇게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네 번째 만남을 가졌던 이 둘은 앞으로도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만남을 가지게 될까?

 

 

 

은희의 이야기, 또는 숙희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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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자와 조금 나이 든 여자가 마주 앉아있다. 절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아주 어색해 보이지는 않는다. 모녀라기보단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의 직장동료 같은 느낌의 두 사람.

 

이런 일이 다 그렇다는 듯이 편견을 가지고 있는 숙희, 그래도 인간적으로 다가는 듯 보인다. 반면에 공사가 뚜렷해 보이는 은희의 마음은 어떤지 알 수 없다.

 

숙희에게 요구한 가명이 은희의 '진짜 어머니'의 이름이라는 한마디가 둘의 관계를 한 발자국 앞으로 전진시켰다. 여기에 겹친 우연으로 은희의 결혼식 날짜는 숙희의 '진짜 딸'의 결혼식 날짜와 같다. 그리고 둘의 그 '진짜'들은 더 이상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은희는 마음을 조금 더 연 듯 결혼에 대해 묻는 숙희에게 또 다른 진실을 알려준다. 다른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지만 진짜 좋아져 버려 하는 결혼이라는 것. 이에 숙희의 마음도 더 편안해진 듯하다. 정말 은희의 엄마가 된 듯, 딸의 결혼식을 위해 준비했던 옷을 입겠다고 한다.

 

이제야 은희는 마음을 놓고 진솔한 자신의 이야기를 숙희에게 늘어놓는다. 느림보 거북이처럼 천천히, 그리고 다정히. 어쩌면 이후에 약속된 두 번의 만남 이후에도, 이 둘은 계속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혜경의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운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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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헤어진 연인같이 들리는 두 사람의 대화. 번듯한 외모로 회사에 다니고, 맥주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며 늦은 밤에도 커피와 차를 마시는 이 둘은 성숙한 어른처럼 보인다.


 

-아깝게 놓쳐버렸네.

 

-진짜 아까워?

 

 

장난스레 말하지만 말속에는 진심이 담겨있다. 혜경이 결혼하는 가을이 되기 전, 그녀를 잡지 않는다면 기회는 없다. 혜경이 돌아가 주겠다며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지만, 운철은 완곡히 거절한다. 혜경은 그러면 2년 뒤 자신과 바람을 피우자고 한다. 말도 안 되는 말로 막무가내 떼를 쓰는 혜경의 모습은 열 살 아이보다도 철없어 보인다.

 

 

-왜 마음 가는 길이랑, 사람 가는 길이 달라지는 건지 모르겠어.

 

-선택을 한 거잖아.

 

-난 아무런 선택을 한 게 없는데. 그냥 내몰린 거지.

 

 

어른이 되면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택은 생각보다 힘든 것이었고, 버티다 결국 내몰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선택을 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마음 가는 길이랑, 사람 가는 길은 결국 달라지게 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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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머무른 자리는 같았지만 그들이 마신 음료는 제각기 달랐듯이 그들은 모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 대화 속에서는 각기 다른 형태의 사랑, 사람을 찾아볼 수 있었다.

 

가벼운 웃음을 연거푸 자아냈던 <더 테이블>. 카페 옆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대화를 듣는 듯한 영화였다. 물론 진짜 카페 옆자리에서 듣는 이야기였다면 풋-하고 웃어버려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라서, 영화라서 다행인 이야기들이었다. 이들이 카페에서 나선 이후의 일들이 궁금하지만 알 방법은 없다. 실제로 옆 테이블 사람들이 자리를 뜨고 나서 어떤 일이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영화는 한 시간 정도의 러닝타임에 각각 여덟 명의 이야기를 담아냈지만, 전혀 어지럽지도 마음을 졸이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인물들에겐 일상 속 대화이고 아주 멋진 말은 아니었지만, 가끔 음미하고 싶은 좋은 대사도 참 많았다. 오랜만에 친구에게 가볍게 추천해 주고 싶은 영화였다.

 

머무른 이에 따라 달라지던 대화. 내가 그 테이블에 앉았다면 나의 이야기가 담겼겠지. 그리고 내 옆 사람은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을지도 모른다. 다음 번, 이 테이블은 또 어떤 이야기를 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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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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