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안녕, 내 이름은 마로나 - 환상의 마로나 [영화]

애니메이션 영화 < 환상의 마로나 >
글 입력 2020.06.09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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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마로나]를 관람하기 전, 알고 있는 정보는 몇 개 없었다. 애니메이션 영화이고, 주인공 이름이 '마로나'구나. 흥미를 느꼈던 지점은 스틸컷을 보아하니 내가 즐겨 보았던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결의 모습을 가졌으리라는 기대감이었다. 인물이나 배경의 움직임보다는 일러스트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궁금했다. 요소 자체가 독특하니만큼 신선한 경험을 하지 않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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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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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마로나는 떠돌이 강아지다. 처음에는 마로나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9남매. 마로나는 세상에 던져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세상에 던져진다. 자신의 의지 하나 없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지다가 처음으로 자기 생각대로 행동할 계기, 첫 번째 주인인 곡예사 마놀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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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놀은 아주 자유로운 사람이다. 강렬하기도 하다. 빨간색, 노란색, 연체동물처럼 자유로운 움직임. 액체처럼 흐를 것으로 보여도 마놀은 넘어지거나 떨어지지 않는다. 중심이 잡혀있다. 마놀의다락방 한쪽에 마로나의 보금자리가 생기고, 마로나는 소중한 개껌을 어디에 둘지 주변을 둘러보며 마놀과의 생활에 스며든다.

 

그러나 마로나는 마놀을 떠났다. 자유롭게 어디든 넘나드는 사람에게 자신이 큰 방해물로 작용하던 탓이다. 물론 마로나가 잘못한 것은 전혀 없다. 단지 '강아지'라서 해가 되었다. 마로나는 받아들인다. 마놀에게 자신은 사라져야 하는 존재라고. 마로나는 마놀을 위한 선택을 내렸다. 첫 번째 선택이었지만, 이 선택의 중심에는 마로나가 아닌 마놀이라는 다른 존재가 있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한 선택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밤을 떠돌던 마로나는 한 장소에 정착한다. 트럭을 몰고 찾아온 두 번째 인간, 이스트반과 가까워지며 정을 쌓아간다. 처음엔 이스트반도 마로나를 살갑게 대하며 다정한 친구처럼 지냈다. 하지만 '건설업자'라는 인간의 삶을 영위해갈 땐 자신의 발아래에 있는 존재를 개의치 않는다. 인간은 인간의 삶이 있고, 강아지는 강아지의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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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일이든 사람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함께인 시간을 중히 여긴다. 강아지는 이와 달리 자신의 주인이 전부다. 물론 킁킁 냄새를 맡는 것도, 고구마를 먹는 것도, 뛰어놀기도 좋아하지만, 주인이 허락한 영역이 강아지가 누릴 공간의 전부다. 이스트반은 마로나에게 목줄을 채운 적도 없지만, 마로나는 생활반경이 정해진 것 같았다. 이스트반의 집에서 살기 전에 이미 그를 주인으로 인식했다는 의미일 거다.

 

이스트반의 일터에서 집으로 옮겨 가면서 마로나의 삶이 좀 달라졌으면 좋았겠다. 바람과는 정반대로, 이곳에서 마로나는 신체적•정신적 아픔을 겪는다. 마로나는 또 버려진다. 세 번째 주인, 솔랑주도 비슷하다. 처음에는 강아지를 마냥 귀여워하던 어린 주인은 사춘기를 겪으며, 마로나를 귀찮은 동물 하나쯤으로 여긴다.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어머니의 잔소리에 못 이겨 산책하러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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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랑주의 할아버지는 마로나를 딱히 아끼지 않는 듯했다. 말을 듣지 않는 솔랑주에게 '그러면 강아지 버리겠다'는 협박으로 홧김에 마로나를 데리고 나갔다. 목줄을 놓고, 혼자 뒤돌아서 가다가 다시 목줄을 잡고 집으로 향한다. 마로나는 여기서 냄새를 맡았을까? 솔랑주의 할아버지는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냄새. 아니면 또 버려진다는 생각에 가만히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던 것일까.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솔랑주의 할아버지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도 마로나는 기쁨에 겨워 꼬리를 흔들지 않았다. 차분했다. 결정권은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숱한 경험이 마로나에게 그런 생각을 심어주었을 거다. 자신은 언제나 걸림돌이 되어 주인을 위해 떠나주거나 주인이 자신을 버렸으니까.

 

이쯤에서 영화의 전개 방식을 언급하고자 한다. 영화는 화려한 일러스트들과는 반대로 덤덤한 마로나의 내레이션의 합으로 이루어졌다. 난해하다고 생각할 만큼 정신없는 색과 도형과 물체의 이미지와는 달리 귀에 들리는 목소리는 아주 딱딱하다. 감정이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다. 음의 높낮이는 거의 없어도 이따금 이어지는 짧은 침묵에서 마로나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들리지 않기 때문에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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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영화를 '행복한 마로나'라고 잘못 적은 기억이 난다. 왜 행복을 떠올렸을까. 마로나의 삶 어디에도 행복을 찾긴 어려웠는데 말이다. 그럼 마로나는 불행했을까?

 

아니라고 본다. 이분법으로 단순히 여길 사안이 아니다. 마로나는 행복하기도, 행복하지 않기도 했다. 마놀의 안식처에서 자신의 침대에 누울 때, 이스트반의 트럭 헤드라이트가 자신을 비출 때, 솔랑주가 자신을 어떻게 해서든 지켜주려고 할 때 마로나는 행복했을 것이다.

 

주마등처럼 스쳐 간 마로나의 삶을 쭉 보여주며, 영화는 마로나의 내레이션으로 끝난다. 시작과 똑같이.

 

 

안녕, 내 이름은 마로나.

지금부터 내 얘기를 들려줄게.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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