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더듬거리는 읽기의 힘 - 창작과 비평 2020 봄호 [도서]

글 입력 2020.06.01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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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많은 것을 단편적인 시각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다. 문학을 납작한 서사로만 읽기, 기후 위기를 기후만의 위기로 읽기. 하지만 ‘사람의 안녕을 살피는 일을 문학이’ 하듯, 또 기후 위기는 언제나 정치적 차원 또는 사회경제적인 체제와 맞닿아있듯, 우리가 세계를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각적인 또 다원적인 앎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의 첫 번째 계간지가 되어준 「창작과 비평 2020 봄호」를 통해, 계간지 읽기가 나아갈 수 있는 무궁무진한 지점들을 몸소 느꼈다.


한 계절에 걸친 10주간의 계간지 읽기는 교묘한 무지라는 이름으로 눈과 귀를 가리고 있던 장막을 조금씩 걷어내는 과정이었으며, 앎이란 올바른 목소리에 힘 있는 근거가 되어줄 거라는 깨달음을 얻었던 읽기였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불투명하고 모호한 문장 투성이인 세상엔 투명하고 정확한 발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딱딱해보이는 글자들과 책의 두께에, 계간지라는 낯선 이름에 한 번 펼쳐봤다가도 완독하기를 포기하고 덮었을, 나와 같은 당신에게 계간지 읽기의 매력을 조심스레 선물해본다.

 

 


특집 _ 생태정치 확장과 체제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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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에 한 파트씩, 세 달에 걸친 읽기를 했다. 100쪽 정도의 글을 매주 읽었다. 해볼만하다 여기며 시작했지만, 기존의 내 흥미요소엔 없었던 낯선 주제들, 입문자였던 내겐 어렵게 느껴졌던 어휘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한 파트를 읽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그러던 와중에, 문득 나의 읽기에 붙여줄 기특한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그 이름은 '더듬거리며 읽기'였다. 단어를, 문장을, 문단을, 그리하여 하나의 글을 '더듬거리며' 읽는 중이라는 것이 새삼 뿌듯해졌다. 앎의 기쁨을 경험했던 순간에서 비롯됐던 새로운 이름의 그날을 소개한다.

환경문제를 주제로한 특집의 이름은 '생태정치 확장과 체제전환'이었다. 이 파트에는 현재 '기후 위기'에 대한 여러 담론부터 그린뉴딜, 자본세에 시인이 저항하는 방법 등 '다양한 각도로 본 환경문제'가 담겼다.

다각도에서 분석된 기후 위기는, 기후 위기란 단지 기후만의 위기가 아니라는 점을, 즉 언제나 정치적 차원의 문제나 사회경제적인 체제 등 우리 삶의 모든 측면과 맞닿아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한 번 더 곱씹게했다. 나아가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 사실을 간과해왔다는 걸 확인시켜주었다.

특히 「플라스틱 중독시대 탈출하기」라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이 글은, 실시간으로 매순간 함께하며 이제는 자연의 일부가 된 물질 플라스틱이 중심이 되어 전개됐다. 그중에서도 성장을 인간의 척도로 여기는 성장지상주의로부터 벗어나야한다는 '탈성장' 담론은 무한하게 질주하는 플라스틱 과잉생산과 소비방식에 걸린 핵심적인 제동이었다. 기후 위기에 대한 성찰은 '삶의 방식'에 대한 재고와 반성과 함께 가야한다는 개념은 어쩌면 가장 근본적이고 또 유용한 해결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삶인 만큼 더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일깨워주었다. 이 글에서 제시된 '구체적인 유토피아' 프로그램이라는 워딩이 함의하듯, 이제는 정말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았던 글이다.
 
 
 
촌평으로 미리 읽기 _ 「안녕을 묻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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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파트 중 소유정 평론가가 쓴, 양경언 평론가의 「안녕을 묻는 방식」에 대한 글은 '나'와 '글'에 대한 고민과 반성으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약 네 쪽 정도의 짧은 비평문으로 「안녕을 묻는 방식」이 읽고 싶어졌던 힘 있는 글이었다. 소유정 평론가의 글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안녕을 묻는 방식」은 비평의 역할에 대한 양경언 평론가만의 단단한 신념을 담은 평론집인듯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안녕을 살피는 일을 문학이 할 때" "비평 역시 문학과 문학작품을 접한 이들 모두의 안부를 묻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라는 문장과 '양경언의 비평은 사회적으로 또 문학적으로 깊은 관심을 두어야 했던 현장의 중심에서 발아한다'라는 문장에서, 당연했지만 실은 간과하고 있었던 '세상 들여다보기/읽기'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된 글이었다.

나를 위한 글을 쓰는 사람에서 나아가 타인을 위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매번 비슷한 마음가짐으로 글을 써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건 모호하지 않은 분명한 글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생각도 함께. 하지만 알면서도 밖을 내다보는 일엔 게을러왔다.

네 장의 촌평을 읽고 소유정 평론가가 인용한 양경언 평론가의 문장이 뇌리에 남았다. '피하지 않은 채 읽고/쓰는 '나'를 견고히 하여 스스로 던진 물음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것. 그리고는 '오래 글을 쓰고 싶은 내가 직면한 첫 번째 과제'라고 쓰고, 옆에 이 문장을 옮겨적었다.
 
 
 
산문 _ 특권과 공정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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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미 작가의 「특권과 공정 사이」 중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의 불평등에 민감하다고 한다’라는 문장은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문장으로 다시금 들렸다. 이 글을 읽었던 날은, 부끄럽지 않기 위해 또 나의 목소리를 확실히 내기 위해 근거가 되어주는 것은 ‘아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계간지 읽기를 계속하겠다 다짐했던 날이었다.

최근에 흑인여성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흑인여성은, '흑인'집단에선 인종차별주의가 중요하니 성차별 경험에 대해 침묵해야한다는 요구를 받는다고 했다. 여성의 권리에 대해서 주장하는 건 흑인‘남성’에 대한 대항이기도 하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 이러한 문제는 현재 한국 사회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특권을 지니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봤던가 싶었다. 김중미 작가가 말했듯 나 또한 그동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의 불평등에만 민감했던 게 아니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지의 결과였다.

‘학력과 교양을 갖춘 일부여성들에게 그 장벽은 유리천장이지만, 훨씬 더 많은 여성(과 그아이)들에게 이 장벽은 바닥이 보이지 않으며 타고 올라갈 사다리 하나 찾기 힘든 깊은 구덩이다’라는 문장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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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계절동안 꾸준한 배움과 좋은 자극이 되어준 계간지 읽기는 한 마디로 '현재', '여기'였다. 양경언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동시대성을 감각할 수 있는 장소' 즉 '현장'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창작과 비평 2020 봄호」를 펼치기 전 써놓은 다짐이 기특해지는 오늘이다. '오랜 시간을 두고 한 권의 책을 천천히 읽어낼 것이 기대가 된다. 부단히 읽고 또 고민함으로써 완독에 성공한 여름 즈음엔, 좀 더 풍부하게 문학과 세계를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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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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