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짜 목소리가 사라진 문학 - 2020년 한국현대시 [문화 전반]

글 입력 2020.05.31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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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 가끔 취미로 문예지를 읽곤 한다. 문학은 현실의 반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에게 있어서 문학의 세계는 나의 현실과 거리가 멀게만 느껴져서 현실과 멀어지고 싶을 때 문예지를 찾게 된다. 하루는 《창작과 비평》의 계간지를 읽다가 한 시인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그는 오늘날의 시문학이 시 패러다임이 2000년대와 비교했을 때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오늘날의 시인들이 자신이 아닌 가상의 시적 화자를 내세우는 데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시라는 가상의 세계에 가상의 화자를 설정하지 못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분위기, 그리고 도덕의 범위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관련이 있다. 오늘의 사회가 한국 현대시, 시문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오늘날의 시문학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은 한 문예지의 인터뷰 내용을 확장해 2020년 사회가 낳은 시문학의 세계를 소개하는 글이다. 여기서는 하나의 작품이 독자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하는 일반적인 오피니언들과 방향을 반대로 하고자 한다. 문학이라는 가상 세계가 우리 현실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고 변형되고 있는지 살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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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시적 화자와 서술의 시점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학교 문학시간에 소개하기로는, 시에서 등장하는 화자는 반드시 시인 자신과 일치할 필요는 없다. 시의 화자는 시인 본인 또는 시인의 대리인일 수도 있지만, 시인 스스로의 감정과 전혀 상관이 없는 가상의 인물일 수도 있다. 시인은 시라는 가상의 세계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 또는 가상적 존재의 목소리 중 하나를 선택해 시를 전개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시를 창작할 때 시인은 시적 화자로 자기 자신을 등장시킬 것인지, 혹은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킬 것인지 결정하게 된다. 물론 자신과 가상인물 사이에 뚜렷한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시적 화자가 가상의 인물이긴 하지만, 시인 스스로의 모습이나 입장과 상당히 유사한 인물일 수도 있고, 시의 화자가 자기가 시인 자신이라고 주장하면서 사실은 실제 자신의 의견이 아닌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자신의 화자를 ‘자신으로부터 얼마나 가까이’ 있는 것으로 느끼냐는 것이다. 일기를 쓰듯이 솔직한 마음으로 발화하냐, 아니면 정말로 소설을 쓰듯이 fictional한 말을 하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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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준으로 볼 때, 2020년 오늘의 시적 화자들은 일기를 읊듯이 시인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2010년 이후 10년간 시인들의 시적화자는 점점 시인 자신과 동일시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2000년대와 비교했을 때 굉장히 놀랍다. 왜냐하면 2000년대 시인들만 하더라도 시적 화자들은 시인 자신에게서 많이 분리된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2000년 한국 시문학을 견인한 대표적인 시적 경향을 ‘미래파’라고 부르는데, 이 미래파 시인들은 자신의 현실적 자아와 완전히 분리된 시적 화자들을 등장시켰다. 이들 시적 자아들은 가상적 존재, 익명적 존재로서 사회의 흐름에 대항하고 현실을 전복시키려 하였다. 전지구적 문제들을 이 가상의 화자를 통해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과감한 시적 화자들은 점점 사라지고, 시적 화자의 가상성, 익명성도 점점 사라져갔다. 2010년 이후로 10년간 시 작품들에 등장하는 시적 화자들은 시인 자신과 점점 동일시되어 갔다. 가상적 화자의 익명성에 숨어 과감한 언행을 전게하는 데 시인들이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본래 문학의 세계는 허구 세계라는 합의 아래 이루어지는 창조적 활동인데, 오늘날의 시인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시세계의 허구성을 활용하길 꺼리는 것일까?


인터뷰에 참여한 시인은 현대 사회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 이러한 현상을 설명한다. 요 근래 이슈가 되었던 차별과 혐오의 문제, 갑질과 사회구조 문제들은 SNS를 통해 퍼져 나가고 있다. 더욱이 문단의 표절 스캔들, 미투 사건들은 문학인들에게 파장이 컸을 것이다. SNS와 미디어의 발달 속에서 누구의 작은 발언이든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현대 사회 속에서 발화 행위의 의미를 시인들이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구조를 경험하면서 시인들은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글쓰기 행위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최근 몇 년 간의 크고작은 사건들을 통해 어떠한 형태의 발화 행위든 책임감이 뒤따라온다는 것을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시인들도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그들은 10년 전의 선배들이 사용했던 글쓰기 전략을 계승하기 힘들 것이다.


결국 오늘날의 시인들은 더 이상 자신으로부터 동떨어진 시적 화자를 통해, 자신의 입장이 아닌 발언들을 선보이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가상의 화자, 시인 자신의 현실적 도덕에서 벗어난 익명적 화자로 시를 전개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이다. 시적 발화 내용의 정치성이나 사회적 민감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발화이든, 시인 자신의 감각과 감정이 아닌 것을 표출하는 게 어색한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시문학계의 현실은 굉장히 묘하게 다가온다. 문학의 세계, 텍스트로 이루어진 세계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고, 어떠한 시도도 받아들여진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무너진 것이다. 문학 자체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에 어느 정도 제한이 걸린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정치적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워진 우리나라 문단은, 다양한 언어적 시도가 옹호되고, 도덕적 논란에 대해 건전한 논의로 대응하는 공간이었다. 물론 그 당시의 문단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우리 사회가 그러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사회적 분위기가 자유분방한 문학세계, 전위적이고 난해한 시 작품들을 잉태하였다.


그로부터 약 30년, 그리고 ‘미래파’의 시대로부터 약 15년 흐른 오늘날, 우리 시문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의 발언 행위는 15년 전, 30년 전과는 다른 위상에 위치한 것이 아닐까. 오늘날의 대중들이 공격적이거나 극단적인 발언이 가진 위험성을 정확하게 인식한 결과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수의 논리나 권력의 지위를 이용한 차별들은 물론이고,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차별들까지 민감하게 인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이러한 현실 속에서 문학인들은 가상적 존재에 자신의 목소리를 위탁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책임질 능력이 없는 익명의 존재에게 함부로 발언권을 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새로운 사회를 살고 있고, 새로운 사회가 분만한 새로운 문학을 읽고 있다. 이 새로운 텍스트에 깃들어 있는 섬세한 마음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이 사회는, 그리고 이 텍스트는 시의 독자들을 어디로 이끌고 가게 될 것인가. 2020년 새로운 문학을 통해 우리의 존재가 어디에 이르게 될지 복잡미묘한 마음이 든다.

 


[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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