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기, 움직이는 인간이 있다 [시각예술]

여전히 낭만적인 우리. 휘도 판 데어 베르베 개인전
글 입력 2020.05.28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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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사람들은 나름의 예술에 대한 선호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시각적 쾌를 우선으로 여길 것이고, 누군가는 사회적 메시지를 기대할 수도 있다. 매체를 이용해 메시지를 얼마나 독특하게 전달하는가에 집중할 수도 있고 어렵지 않고 재미있는 예술을 선호할 수도 있다.


영상 작품에 대해서는 어떨까. 많은 작가들이 영상 작업을 한다. 비디오라는 매체는 현대인들에게 아주 익숙해졌지만, 예술에서의 비디오는 아직도 조금 어렵고 난해하다. 영상에서 나타나는 불확실한 이미지 또는 비선형적이거나 명확하지 않은 서사 앞에서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익숙하면서 다른 매체들과 쉽게 혼합되는 미디어 예술이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다. 영상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에 숨이 막힐 수도, 영상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받을 수도 있다.


송은 아트스페이스에서 4월 말부터 석 달이 조금 안되는 기간 동안 열리고 있는 휘도 판 데어 베르베의 개인전 《Trials and Resurrections》에서 전시되고 있는 8개의 영상 작품에는 작가가 직접 등장한다.


관객은 여러 상황 속에서 자신을 한계로 내몰거나 고군분투하는 작가를 만나게 된다. ‘시련과 부활’이라는 전시의 제목처럼, 작가는 자신에게 시련을 부여하고 도전하며 인간에 대한 시선을 내보인다. 이 시선은 비관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끈질기게 달라붙는 모습이 찬란해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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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mer twee(just because i'm standing here doesn't mean i want to), 2003

 


전시장에 들어가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작품 Nummer twee(just because i'm standing here doesn't mean i want to)(2003)은 휘도 판 데어 베르베의 첫 작업이다.


부제목에서 하고 있는 말처럼, 작가는 그가 자라고 탈출하고 싶었던 네덜란드 주택가에 서 있다 곧 차에 치이고 쓰러진다. 그리고 웅장한 클래식 교향곡과 함께 승합차 트렁크에서 발레리나들이 등장한다. 3분 남짓의 영상으로 죽음과 함께 시작하지만, 그 옆을 장식하는 우아한 발레가 우스꽝스럽고 아이러니하다.


다음 층으로 올라가면 전시장은 찰칵거리며 돌아가는 영사기의 소리로 차 있다. Nummer vier(2005)와 Nummer dertien(2011)이 상영되고 있으며 Nummer vier는 헤드셋을 착용해야 소리를 들을 수 있다.


Nummer dertien(effugio c, you're always only half a day away)은 12시간이나 되는 영상이다. ‘effugio’는 도피라는 뜻이다. 작가는 영상에서 자신의 핀란드 집을 빙빙 돌며 뛴다.


작가는 12시간 만에 마라톤의 2.5배에 달하는 거리를 완주한다. 영상 옆의 사진은 작가가 아콩카과산 정상에서 촬영한 하늘과 쉬고 있는 자신을 찍은 것이다. 작가는 무엇에서 도피하고 싶어 달리기를 하고, 등산을 했을까. 여기서부터 작가가 자신을 한계로 몰아붙이는 작업들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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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mer acht(everything is going to be alright), 2007

 

 

통로를 지나 다음 방으로 가면 Nummer acht(everything is going to be alright)(2007)가 상영되고 있다. 작가가 걸어가고 있고 그 뒤를 거대한 쇄빙선이 따르고 있다.


사람은 너무 작고, 쇄빙선은 너무 크다. 둘의 사이는 아주 가깝고 얼음을 부수며 따라오는 쇄빙선이 위협적이다. 자연과 기계, 그리고 그 사이에서 너무 작게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주제를 자신을 위협할 수도 있는 상황을 사용해 표현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검은 옷을 입고 묵묵히 걷고 있는 모습은 나약해 보이지만 한없이 묵직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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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mer twaalf(variations on a theme; Opening: The King's Gambit accepted; Middlegame: the number of stars in the sky; Endgame: and why a piano can't be tuned, or waiting for an earthquake), 2009

 


바로 다음에 이어져 있는 Nummer twaalf( variations on a theme; Opening: The King's Gambit accepted; Middlegame: the number of stars in the sky; Endgame: and why a piano can't be tuned, or waiting for an earthquake)(2009) 역시 비슷한 느낌을 준다.


이 영상의 핵심은 작가가 직접 고안한 ‘체스피아노’ 장치다. 이 장치는 “참가자가 체스 말을 칸에 맞춰 놓음에 따라 피아노가 작동하는 원리를 바탕으로” 음악을 만들어낸다. 작품에 깔리고 있는 웅장한 음악과, 대자연의 장면들은 그곳을 오르고 움직이는 인간 존재를 무상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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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mer negen(the day I didn't turn with the world), 2007

 


마지막 전시실인 4층으로 이동하면 집에서 같은 움직임을 반복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을 담은 2채널 비디오 Nummer zeventien(killing time attempt1)(2015)과 24시간 동안 북극점에 서 있는 모습을 담은 Nummer negen(the day I didn't turn with the world)(2007)이 있다.


특히 북극점에 서서 천천히 회전하며 지구의 자전에서 벗어나려 하는 이 작품은 작가의 집요함에 놀라우면서 자유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스톱모션으로 담아내어 9분 정도 되는 영상에서 작가는 천천히 돌고 있고, 주변의 하늘도 조금씩 끊임없이 변하며, 작가가 직접 작곡한 클래식 피아노가 흐른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 Nummer veertien(home)(2012)으로 전시가 끝난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철인 3종 경기의 세 종목인 수영, 사이클링, 달리기로 1,600km를 이동한다.


바르샤바에서 파리까지 이동하며 이 작품 역시 클래식 음악과 함께 하며 영상에 연주하고 있는 단원들이 직접 등장한다. 그들은 야외에 있을 수도, 집 안에 있을 수도 있고 작가는 의자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거나 몸에 불이 붙은 채로 그 앞을 지나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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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는 네덜란드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 휘도 판 데어 베르베의 한국에서의 첫 번째 개인전이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 속의 작가는 계속해서 움직인다. 산을 오르고, 걷고 뛰며 수영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잡아낸다.


영상으로 남은 모습의 잔상은 관객에게 와 닿는다. 너무 커다랗고 웅장해서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자연경관 속에서 인간은 움직이면서 자신의 생명력을 내보인다. 작가의 개성적인 시선과 작업, 생명력이 돋보이는 전시였다.


내던져진 우리 앞에는 시련과 고난이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답을 찾고, 고군분투하고, 그 속에서 더 큰 자신이 된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발버둥 치고 노력했는지에 대해서는 단명하게 말할 수 없다.


무언갈 원하고 향하고 욕망하는 것은 각자마다 너무 다양하고 정의되기 힘들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계속 부활한다. 자연과 기계 앞에서 무상한 자신을 직시하고 가끔 고통에 굴복하기도 하지만 그조차 아름답다. 우리는 인간이며, 여전히 낭만적이기 때문이다.

 


[진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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