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자연으로 떠나간 게 아니라, 돌아간 거야 - 리틀 포레스트 [영화]

글 입력 2020.05.14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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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나는 굴뚝, 하얀 눈밭을 뛰어다니는 강아지, 쌓여가는 땔감, 긴긴 겨울밤. 쨍한 햇빛과 끊임없는 매미와 풀벌레 소리, 빨갛게 익어가는 토마토. 각각 겨울과 여름 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이지만, 도시의 이런 모습을 상상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이런 아름다운 계절의 풍경을 직접 느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막연히 살지도 않아본 시골을 미워하곤 했다. 그냥 건네는 말인 "시골에서 살면 어떨 것 같아?"라는 말에 항상 "인터넷도 잘 안 터지고, 배달음식도 없고, 내가 좋아하는 카페도 없고 또..."라는 식의 부정적인 답으로 임해왔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내가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은 점점 줄어들어갔다. 그럴 때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소년 농부를 보거나 집 베란다에 작게 키우는 채소들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나도 농사나 짓고 싶다!"


 

 

익숙한 영화의 새로운 등장


 

요리를 잘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바이블 같은 영화가 몇 편 있다. <카모메 식당>, <아메리칸 셰프>가 그러한 영화인데,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 시리즈는 여기에 빠질 수 없는 영화였다. 정직하게 기르고, 요리하고 먹는 영화라니! 다소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지만 나름의 스토리가 있는 영화라는 점이 나에겐 아주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를 본 나는,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가 나온다는 소식에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요리와 자연을 좋아한다면 누구나 꿈꿔보았을 전원생활에 대해 그리고 있다. 특이한 점은 그 주체가 젊은 여자인 혜원이라는 것이다. 정신없는 도시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도망치듯 시골로 돌아온 주인공 혜원. 영화의 내용은 혜원이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친구도 만나고, 맛있는 것도 해먹는 그저 평범한 이야기다.

 

등장인물들은 화려하고 예쁜 옷을 입지도 않고, 긴장감을 높이거나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다만 화려한 영화의 주인공들과 달리 수수하고, 사람 사는 이야기일 뿐이다. 드라마틱 한 사건은 없을지라도,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던 나에겐 이런 영화가 꼭 필요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볼거리와 짜릿한 복수극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곤 하지만, 바쁘고 정신없는 도시에 살아가는 우리에겐 이런 편안하고 무공해적인 볼거리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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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이 있는 영화이고, 원작을 좋아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원작과 국내 리메이크판이 비교가 되었다. 우선 원작은 정말 인적이 드문 시골 그 자체의 느낌이 남아있다. 여름과 가을 편, 겨울과 봄 편으로 나뉘어 있어 이야기의 스펙트럼이 조금 더 길고, 영화 안에서 나타나지 않은 주인공의 그간의 인생에 대해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한다.

 

색감이나 전체적 분위기가 무겁고, 어두운 면이 있어 안정적이게 느껴지지만 그 안에서 어딘가 모르게 홀로서기의 쓸쓸함이 묻어나기도 한다. 일본인이라는 특성 때문일까? 인물들의 내면을 금방 간파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좀 더 진지하고, '먹고사는' 사람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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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국내 버전은 큰 틀과 흐름은 비슷하지만 세부적인 요소와 분위기가 원작과는 확연히 다르다. 거의 모든 장면에, 혜원의 곁에 사람들이 함께 있어 주인공이 조금 더 마을에 소속되어 있다는 또 다른 안정감이 든다. 색감과 전체적인 분위기 표현도 원작보다는 밝은 편에 더 산뜻하고 가벼운 느낌이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발랄하고 명랑한 기운까지 느껴진다.

 

가장 큰 차이는 먹고사는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해있다는 것이다. 인물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드러내 성격의 파악 쉽고, 그렇기 때문에 인물에 더 깊은 공감이 가능하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은 점이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주제이자 공감을 불러온 '물려받은 레시피'이다. 온전히 자신의 레시피로 요리를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에 대한 향수와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것이 음식과 결합해 레시피가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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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우리 집에서만 먹는 음식인 줄 알았던 요리도, 우리 부모님이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최고로 잘 만드는 음식도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추억이기 때문에 혜원에게 나를 빗대어 보기에 무리가 없었다. 거기에 엄마의 레시피를 변형해 나 홀로 엄마와 대결을 하고, 패배를 인정하지만 새로운 레시피를 제안하던 혜원의 쪽지는 20대 후반인 혜원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엄마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어 하는 말로 들리는 듯했다.


 


맛있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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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에 비해 사람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있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이 큰 주제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특이한 점은 <리틀 포레스트>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음식들은 (달걀, 가쓰오부시 등의 요소를 제외하면) 채식이라는 것이다. 연일 미디어에서는 더 자극적이고, 더 기름지고, 더 중독적인 음식을 소개하고 유행시킴에도 불구하고 <리틀 포레스트>는 영화의 전체적 분위기에 부합하는 가볍지만 군침 도는 채식 요리를 나열했다.

 

채식이라고 해서 연신 풀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겨울에는 수제비, 비 오는 날에는 막걸리와 전, 봄에는 봄 나물과 꽃을 곁들인 파스타, 더워지면 오이 콩국수, 가을이 오면 커다란 밤톨을 모아 만드는 밤 조림... 날씨와 계절에 따른 다채로운 음식의 배치는 보는 즐거움을 선사할 뿐만 아니라, 한국인이라면 공감할 날씨와 계절별 음식 분류로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 짓게 했다.


기분에 따라 먹는 음식도 비슷한 이유로 공감을 자아낸다. 울적한 기분이 들 때 먹는 달콤한 디저트와 어쩐지 스트레스 받는 일이 한가득일 때 과감히 시도하는 매운 떡볶이. 그리고 함께 음식을 나누며 우울도, 스트레스도 나눠 없애버릴 좋은 사람들.

 

영화에서 이러한 맛있는 요소들과 이미 알고 있는 스트레스 해결 방안이 등장했을 때, 나는 왜 그렇게 도시 생활에 집착했나?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정말로 내게 필요했던 건, 여러 요소들을 찾아가서 또는 찾아서 느끼는 힐링보다는 자연스러움과 익숙함이 가져다주는 편안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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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 <리틀 포레스트>. 먹고사는 이야기 속에서 혜원, 재하와 은숙, 그리고 엄마의 이야기를 담아내었지만 어쩐지 그 이야기들은 나에게 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혼자 먹어도 예쁜 접시와 잔에 담아내어 먹는 식사들과 엄마가 혜원에게 해준 이야기들. 내가 나를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있게, 나를 더 단단히 만들어주려는듯했다. 혜원이 아주심기를 이루어낸 것처럼, 혜원과 다를 것 없는 도시생활을 하고 있는 나도 아주심기를 할 수 있다고. 언젠간 그렇게 하게 될 거라고.


덧붙여, 비행기를 타고 기내에서 <리틀 포레스트>를 보기를 시도한 적이 두 번 있다. 결과는 두 번 모두 실패였는데, 이유는 영화가 지루하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한 번은 영화에서 혜원이 먹는 음식을 보고 내가 먹은 기내식이 너무나도 자극적이고 덜 맛있게 느껴져서였고, 한 번은 탁 트인 전원생활을 보고 있으려니 기내가 너무나도 답답하게 느껴져서였다.

 

어찌 됐든, 가을날 두고두고 꺼내 먹는 밤 조림처럼 일 년 내내 두고두고 꺼내 볼 이 영화를 너무 늦은 밤에는 보지 않길 바란다. 마음은 꽉 차겠지만, 배는 텅 빈 느낌이 날 정도로 배고파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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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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