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열등과 냉소 그 속에서의 발걸음, 소설집 상속 [도서]

은희경 소설가의 소설집 상속 속에서 찾은 것
글 입력 2020.05.14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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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힘들어질 때면 가끔 도피하고 싶은 장소가 사람마다 있다면, 나는 아마도 환상 속으로 도피할 것이다. 개개인이 원하고 바라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그 세계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감춰주는 대신 환상 속에서 나온 후에는 허탈함을 선사한다. 사람들의 현실적인 문제라는 것은 내가 그들과 동등하지 않다는 느낌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일시적으로나마 환상이 이들을 열등감으로부터 구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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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상속에서는 환상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좌충우돌 현실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게 해준 사건에 의해 전과는 다르게 비틀어진 모습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나온다.


단편집에 실린 첫 번째 소설 ‘내 고향에는 이제 눈이 내리지 않는다’에서는 말더듬이어서 원래 열등하다는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던 주인공이 깡패 친구 성국이와 어느 노부부의 집을 턴다. 그때 성국이를 배신하고 그 이후 떠돌이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어머니 곁을 떠난다. 그는 윤년의 생일을 가지고 있는데 그가 가출한 2월 그의 생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우고 열등 의식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열등 의식은 사회에서 배워 온 그 모든 보편적인 것들을 행하거나 누릴 수 없다는 것과 행여나 행하게 된다면 보이지 않는 비웃음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준다. 소설 ‘딸기 도둑’에서도 열등 의식은 자신은 누군가가 떠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며 착한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라는 보편적으로 추구되는 틀에서 벗어나도 괜찮다고 한다. 이는 주인공 은혜가 이름이 같은 다른 은혜에게 열등하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고 자신을 괴롭히는 세상에 대해서도 열등하다는 의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저는 괜찮아요. 누군가 떠나는 것이라면 지금까지도 그래왔던 일이니까요. 부당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리워해본 적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오? 그가 더 이상은 좋은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할 뿐이에요. 행복을 빈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아요. 다시 말하지만 저는 착한 사람은 못됩니다. 딸기 도둑이니까요. (은희경, 상속, 문학과 지성사, 2002, 191쪽)


 

등장인물들은 이러한 열등감이 자신들의 타고난 본성이라고 느끼는 듯하다. 이것은 가만보면 등장인물이 겪은 사건이나 살아온 인생사를 반추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추구하는 착한 것, 더 좋은 것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냐는 의문을 갖게 한다. 그들의 열등 의식은 출생을 비롯한 온갖 부당한 사건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만들어진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나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의 고통이 다른 이의 고통보다 더 크게 느껴지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이 들면서 서서히 열등 의식에 젖어들기 시작하는 등장인물들에게 시련은 그저 자신의 열등함을 증명하기 위한 고통일 뿐이다. 그 고통은 삶에서 지속적으로 맞닥뜨리는 영속적인 것으로, 때로는 인생 전체를 말하기도 한다.



아기의 얼굴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난생처음 외기 속으로 나와 숨을 쉬기 위해서 사력을 다하는 아기의 채 펴지지 못한 팔과 다리는 계속해서 바동거렸다. 살갗은 충혈되고 이마는 일그러지고 입술은 비뚤어졌다. 세상이라는 미지 속에 내던져진 그 붉은 생명 덩어리는 너무나 미숙하고 나약한 존재였으므로 살겠다는 본능부터가 고통을 의미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인생을 시작한다. (같은 책, 217쪽)



열등 의식을 가리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정체성은 인물을 압박하고 진정성 있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한다. 인물들은 모두 ‘미숙하고 나약한 존재’였으므로 살겠다는 본능이 착한 것, 좋은 것과는 거리가 먼 어색하고 억지스러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상이 보편적으로 향해 있는 방향은 이렇듯 그들에게는 강물을 거스르는 것처럼 버겁고 힘든 쪽이었다. 그래서 소설 속 인물은 냉소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소년원에서 거세를 시키는 건 범법자의 대를 끊어버리려는 거잖아요.(중략) 나같은 사람은 선택 이론에 의해서 도태되게 되어 있어요.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우성만 유전되고 열성은 도태되는 게 진화잖아요. (중략) 옆집 개 말예요. 그 더러운 개새끼는 곧 굶어 죽을 거예요. 죽는 날까지 토실토실한 개한테 가까이 달라붙겠죠. 뻔뻔스럽게도 그 개가 크는 것까지 가로막으면서 말이죠. 빨리 죽어주면 좀 좋아. 개들은 왜 자살 같은 걸 안 하나 몰라. (같은 책, 296쪽)


 

세상이 원하는 것은 처음에는 공교롭게도 인물 그 자신이 원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인물들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착한 것’, ‘좋은 것’의 속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들의 본성이 어떻든 만들어진 정체성은 그러한 속성으로 분칠한 겉껍데기만을 가질 뿐 본성을 드러내어 주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그들은 아니 우리는 살아남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상처뿐인 본성을 열등 의식으로 꼼꼼히 숨겨야 한다.

 


한 사람의 육체가 생겨나기까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육체가 시간 속에서 생멸을 거듭해왔다는 것도, 제 몸 속에 죽음이 들어 있다는 사실도 처음 깨닫는 일이었다. (같은 책, 119쪽)


 

사람들의 본성은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것, 생명에서부터 나올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자신이 미숙하고 나약하다는 것을, 자신이 처참할 정도로 열등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인물들은 냉소적으로 변한다. 그들이 얼마나 차가운가에 대해서는 소설집 상속을 읽어보면 알게 되겠지만 열등감이 뜨거운 만큼 차가울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열등과 냉소로부터 온 뜨거움과 차가움의 뒤섞임 속에서도 삶이라는 생명을 위한 사람들의 열망은 무의식적으로도 지속된다. 마치 이러한 아수라장이 자신이 오랫동안 바라왔던 삶의 터전이라는 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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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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