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4월 한 달 이야기 [사람]

100년이 지나고 1000년이 지나도 인간은 사랑이라는 기적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글 입력 2020.04.30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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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드 인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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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무드 인디고는 동기 한 명이 내게 강력 추천해 준 영화였다. 영화 포스터를 봤을 때 몽글몽글한 느낌에 두근거렸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니 생각보다 우울한 영화였다. 우울한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영화였다. 영화가 맨 처음 시작할 때 '세월의 물거품'이라는 책을 모티브로 했다고 했을 때부터 이름이 공허해서 불안했는데, 역시 그럴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우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주인공 클로에가 실패하면 다시 하고, 또 하면 된다고 한 말이 조금 희망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 사람의 삶 자체에 윤회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이 영화와 연관지어 본다면 비비드한 삶의 색감이 컬러리스인 흑백으로 나아간다고 해도 또 다시 비비드한 색감을 희망할 수 있다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콜랭의 소중한 사람인 클로에가 죽은 것은 한 삶의 어떤 분기가 끝났을 뿐이라고, 콜랭에게 그렇게 위로해주고 싶었다.

 


 

2. 책방 '이음'과 육식의 성정치


 

우연히 혜화 대학로에서 책방 '이음'이라는 곳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책방에 반하게 되었다. 내 애인은 심심할 때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그리고 그 근처에 살다 보니 홍익문고에 자주 가는 사람이라, 자연스레 나도 서점에 자주 가게 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애인과 달리 책을 자주 사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빌리거나, 가끔 성적을 잘 받았을 때 부모님께서 선물로 사주시는 정도였다. 꽂을 책장도 없었다. 그러니까 내 책이 없었다. 그 때문인지, 어릴 때는 책을 걸어가면서 읽고 밥을 먹으면서도 읽고 차에서 읽을 정도로 좋아했지만, 점차 책을 멀리하게 되고 자극적인 컨텐츠만 찾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쩌다 철학과생이 되었고, 아무래도 과가 과다 보니 과제로 고전이나 논문과 같은 관련 2차 자료를 많이 읽게 되었다. 그런 텍스트를 읽으면서 책 속 저자들의 사고의 치밀함에 익숙해졌다. 전에 즐기던 자극적인 컨텐츠가 재미가 없어졌다. 그렇게 유튜브를 보는 시간보다 과제책을 읽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유튜브는 책을 읽을 때 심심할 때 ASMR을 듣는 데에만 쓰게 되었다.

 

그러다 애인과 서점에 자주 가게 되었고 애인도 철학과생이다 보니 서점에 가자마자 같이 철학 분야로 가곤 했다. 체인점 서점마다 있는 철학책의 굉장히 적은 비중과 적은 종류를 보면서 조금 절망하기도 하고, 그래도 어떤 체인점 서점에서는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철학책을 발견해 횡재했다면서 구입하기도 했다. 애인 말로는 홍익 문고에 철학책 종류가 많다고 한다. 아직 나는 가보지 않아서, 다음번에 가보기로 했다.

 

아직 나는 독립 책방을 가보지 않았다. 완전히. 그래서 실은 독립 책방의 기본 큐레이션 분위기가 어떤지 잘 알지 못한다. 가 본 곳을 굳이 꼽아보자면 고양이 관련 서적만 있는 '슈레딩거의 고양이' 정도이다. 하지만 좋았던 점은 좋았다고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음'에 갔을 때 깜짝 놀랐다. 철학책 큐레이션이 체인점 서점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큐레이션을 보면서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매대에 새로 나온 롤스의 책이 있었다. 체인점 철학책 매대에는 없었던 책이었다. 그리고 고전철학과 현대철학 등등의 각 분야별로 책이 있었는데, 톡톡 튀는 책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고전 철학 관련 책에 고전 철학 이전의 문학을 다루는 책이 있다거나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페미니즘 분야가 따로 있어 한 구석에서 책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쓰윽 훑어 봤을 때 책장을 그대로 가져오고 싶었다. 왠지 이 책방에서 책 한 권을 사고 싶었다. 월말이라 돈이 없었지만 그래도 사고 싶었다. 고민하다가, '육식의 성정치'라는 책을 샀다. 이 책은 2년 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하지만 책을 사 본 경험이 없어 과연 사서 읽어도 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컸다. 그래도 사고 싶었던 이유는 생각을 책 옆에 쓰면서 정리하면서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생각 사이에서 나는 방황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생각에는 내 삶의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날 한 가지 길을 선택했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내 마음을 믿기로 했다. 이 책을 꼭 읽고 싶어서, 아침 시간 한 켠에 이 책을 읽는 시간을 1시간 정도 배치했다. 요즘 그렇게 꾸준히 읽어가고 있는 중이다.

 


 

3.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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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에서 독서 계정을 가득 팔로우해왔다. 계정주 분들이 소설책 등등을 마음껏 사면서 마음껏 자신의 책으로 삼고 읽는 게 부러웠다. 그렇게 인스타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해 왔다. 애인도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사는 쪽인데, 오히려 요즘에는 살 책과 사지 않을 책을 구분하려 한다고 했다. 그것도 부러웠지만, 나는 아무래도 자취방에 살다 보니 전공책 보관할 자리도 벅차니까 책을 사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어느 날 너무 힘이 빠지고 우울했다. 밖에서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다. 내가 동경하는 사람들처럼 책을 사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서점에 갔다. 가서 이전부터 사고 싶었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책을 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점에서 소설을 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언젠가 누군가가 읽고 오래 전 내가 행복했구나, 하고 생각했으면 해서 날짜와 오늘 일을 기록했다. 책 한 권으로 하루가 즐거워졌음을 느꼈다. 사서 이 책을 꼭 안고 오래오래 걸어다녔다. 엄청 큰 청포도에이드도 먹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청포도청을 만들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산 다음날 어쩌다 보니 새벽 3시에 일어나 책을 읽었다. 새벽을 만끽하면서 읽다 보니 문득 내가 SF, 특히 다정한 SF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드 창의 '나와 당신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 '컨택트'를 좋아하고, 어릴 때 호시 신이치의 SF를 좋아해 전부 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넷플릭스의 블랙 미러도 정말 재미있게 봤다. 앞으로 관련 소설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즈앤이어즈도 봐야지.

 

왜 나는 다정한 SF를 좋아할까? SF를 좋아하는 이유는 알 것 같다. 나는 마치 물 속에 세로로 박혀 현실 세계와 물 속 세계 둘 다에 있는 막대처럼 SF가 현실 세계와 닮았되 현실 세계에 조금 어긋나 있는 점을 좋아하는 것 같다. 실은 SF가 아니라도 상관 없다. 루소의 잠자는 집시 처럼 동화같은 컨텐츠도 정말 좋아한다. 어쩌면 다정하고 현실적이지 않은 컨텐츠를 좋아하는 이유는 SF로 현실 세계에 어긋나 있더라도 인간의 다정한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00년이 지나고 1000년이 지나도 인간은 사랑이라는 기적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 사실이 나에게 감동을 주는 것 같다.

 

무드 인디고의 콜랭도 다른 사랑을 만나 행복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라고 생각한다.

 

 

[성채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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