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나간 연인이 나에게 미친 우스운 영향들 [사람]

음식, 영화, 노래까지 내가 정말로 마음을 줘버린 것들이 남았다
글 입력 2020.04.3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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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명확한 이유가 존재하는 호불호의 영역의 많은 것들은 지나간 연인들에게서 만들어졌다. 그렇게 생겨난 이유들은 정말 단순하면서도 그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선명하다. 단어로 말하자면 ‘사랑’이라는 이유겠지만, 가끔 떠오르는 추억이 아직도 나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주 놀랍다.

 

*


내게 쫄면이 그런 음식이다. 그때 만났던 애는 입맛이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었다. 나는 워낙 아무거나 잘 먹고 싫어하는 음식이 없어 매일의 음식 메뉴를 자주 상대방이 정했는데, 그 사람이 특히 좋아하는 음식이 바로 쫄면이었다.

 

나는 그전까지 쫄면을 굳이 식당을 찾아가서 돈을 내고 사 먹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메뉴판에 쫄면이 있으면 꼭 시키고 보는 사람이었다. 집 주변의 쫄면은 그때 다 먹어본 것 같다. 단골이 된 맛있는 가게도 그때 찾았다.

 

그 사람과 헤어지고 나서도 나는 쫄면을 먹는다. 새로운 가게들을 방문해가면서. 이제는 연락하지 않는 그 사람에게 공유하고 싶은 마음을 눌러가면서. 그 사람과 짧지 않은, 꽤 긴 시간을 만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함께한 장면이 왜 돈가스와 쫄면을 배달 시켜 영화를 보며 먹던 장면일까.


어떤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의 나는 인기 있는 할리우드의 시리즈 영화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허무맹랑한 영화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일명 ‘덕후’였다. 그 사람과 같이 새로 개봉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앞서 개봉한 영화들을 보고 공부해야 했다. 그래서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그 사람의 집에서 앞선 영화들을 몇 시간씩 이어서 봤다. 전문가가 옆에 있으니 더 자세한 정보와 세밀한 분석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아직도 개봉하고 있는 그 영화들을 잊지 않고 챙겨 본다. 날 입문시키고 설명해주던 그 사람은 이제 없지만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계속 이어서 본다. 나는 내가 아직도 그 영화들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과 영화 얘기를 하다 보면, 마니아라고 해도 될 정도로 자세히 모든 영화를 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럴 때면 조금 우습다.


내가 좋아하는 몇 노래들도 그렇다. 나는 음악을 잘 듣지 않는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만 들을뿐더러 새로운 음악을 찾아 듣지 않는다. 어쩌다 꽂힌 음악만 무한 반복한다. 그래서 좋아하는 음악이 없었다. 그냥 아는 노래, 요즘 자주 듣는 노래 정도였다.

 

어떤 때 좋아했던 사람은 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항상 나에게 추천을 해줬다. 사실 주변에서 추천을 해줘도 나는 잘 듣지 않았다. 만일 들어도 큰 감상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이란 감정이 한창 일렁일 때는 다를 때가 있다. 그 사람이 추천해준 음악을 듣고 심지어 앨범의 수록곡까지 찾아 들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내 마음에 든 노래 하나를 골랐다. 그 음악은 내가 아직도 좋아한다. 들을 때마다 그 순간이 생각난다.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고 사람들이 한꺼번에 건너던 순간에 내게 말했던 그 노래.


운동도 비슷하다. 좋아했던 사람이 운동에 미쳐있었다. 나와 함께 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막상 사귈 때는 같이 운동을 하지 않았다. 귀찮기도 했지만 괜한 심술이기도 했다. 헤어지고 나서 나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 사람이 열심히 하던 수영을 끊었다. 나와 함께 나가고 싶어 했던 마라톤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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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우습게 느껴질 때가 자주 있다. 굉장히 감정적인 그 순간에 자기를 맡긴다는 일이 믿기지 않을 때가 많다. 누군가 짜놓은 각본 안에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릴 때부터 자주 봐온 영화나 드라마 속의 연인들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누군가를 왜 좋아하는지 이유를 따져보면 순전히 이기적인 이유가 많았다. 뭐랄까, 사랑에는 희생이 같이 따라다니지 않던가? 나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헤어진 그 사람들과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다. 가장 친밀했던 사람과 한순간에 남보다 못한 원수가 되어버린다는 건 항상 이상한 일이다. 아무튼 시간은 지났고 안 좋은 감정은 빠르게 마모된다. 나에게 남은 건 내가 정말로 마음을 줘버린 것들이다. 이로 끊기 힘든 쫄면을 사 먹고 그다지 관심도 없는 할리우드 영화를 꼬박꼬박 챙겨보고 누군가 좋아하는 음악이 있냐고 물을 때 주저 없이 대답하고 꾸준히 운동에 시간을 소모하는 것.

 


사랑은 사유가 모든 위계에 대한 욕망 바깥에 서게 만든다. (…) 사랑은 사유를 “더 잘 실패하도록” 이끌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게 한다. 사랑은 사유를 정지시키면서 작동시킨다.


- 『라캉, 사랑, 바디우』 중에서



그런 지나간 연인들의 영향이 참 우습다고 생각했었다. 이젠 그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는 사이면서 아직도 떠올리고 있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사랑이 그 정도였던 것 같다. 어떤 책에서 “맹목적인 관성 속에서, 비참한 수치 속에서, 마음은 숨겨져 있기를 원하지만, 또한 아무것도 자신으로부터 숨겨져 있지 않기를 바란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본 적이 있다. 진리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나에게 대입해보면 난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나 보다. 이제 알게 되었다. 난 사랑이라는 감정이 내 사유를 조종하는 걸 견디지 못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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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내가 좋아하게 된 것들. 서사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내가 햄버거를 좋아하는 건 그냥 맛있으니까,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맛있게 먹었으니까. 하지만 쫄면은 다른 느낌을 준다.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 쫄면을 좋아해서, 계속 같이 먹으러 다녀서. 취향이 겹치는 영화를 보면서 쫄면을 먹던 추억이 기분 좋아서. 그 사람에게 쫄면은 나에게 햄버거와 같은 정도의 음식이겠지만, 나에게는 쫄면에 그 사람이 얹혀서 들어온다.


시리즈가 이어지는 새로운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보기 싫다고 투정 부렸으면서 나중에는 더 열심히 보고 있던 어두운 방 속의 내가 생각난다. 플레이 리스트에서 우연히 틀어지는 노래에 그 사람이 추천해줬던 이유와 그때 걷던 길의 분위기가 같이 들린다. 눈 부시게 해가 쨍쨍한 여름이었고 길을 건너는 사람들 속에서 하는 말을 더 잘 들으려고 서로 몸을 기울였던, 적어도 우리에게만은 낭만적인 장면이 되어서 돌아온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지배했던 감정. 시시하고 잔잔하게 아직까지 나에게 영향을 주는 과거들. 추억은 곧잘 미화된다지만 그때의 내가 그립기도 하다. 덕분에 나는 더 많이 경험하고 영향을 받았다. 좋아하는 게 많아지고 이야깃거리도 다양해졌다. 이제는 지나간 사랑이 공백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진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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