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난쟁이의 시선 - 툴루즈 로트렉 展

문외한의 미술 관람기
글 입력 2020.04.18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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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루즈 로트렉 展, 물랭 루즈의 작은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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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문화 향유 기회가 주어져, 툴루즈 로트렉 전을 관람하게 되었다. 미술에 대해 배워본 적도, 더욱 솔직히 말하면 일찍이 그리 큰 관심을 가진 적도 없는 내가 무엇을 계기로, 또 무엇을 까닭으로 전시회를 가게 되었는가. 이것은 예술의 전당을 향하는 내내 스스로에게 부여되는 질문이기도 했다. 나는 무엇을 찾으러 그리로 걷고 있었을까.


때는 봄, 마스크로 가득한 거리가 아직 조금 흉흉하다만 거리는 역시 거닐만하다. 가는 길 내내에는 벌써부터 결별을 알리는 듯 벚꽃잎이 나리며 있었고, 간신히 달린 이파리들은 계절이 이미 충분히 지나가고 있었음을, 벌써 충분히 쇄도하였음을 알리었다.

 

모든 예술이 얼마간 그러할 것이, 예술사조와 시대별 기법 등의 전반적인 배경지식 없이는 온전히 향유하기가 참 어렵다는 사실이다. 하물며 많은 부분이 텍스트 내적으로 설명되는 장르인 문학조차 그러할 것인데, 미술이야 어떨까. 나는 과연 미술에 문외한인지라 그런 생각을 덜컥 가진 채 걷고 있었다. 혹자는 미술의 관람함을 두고, ‘이미지를 통한 추체험,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한 바도 있었으나, 그것은 분명 공감할 수 있는 말이긴 하지만, 여전히 어렵게 느껴지는 이 감각을 아주 지워낼 수는 없었다.


지난번 리뷰의 소재였던 클래식으로 빗대어 보자면, 소상한 앎 없이도 그 음악들을 향유할 수야 분명 있겠으나, 예컨대는 베토벤 음악들의 위대함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듣는 때엔 그로부터 농밀한 체험을 가지기는 어렵겠듯이 말이다.

 

부랴부랴 그에 대해 찾아본다. ‘앤디 워홀에게 영향을 준 화가, 그로써 팝 아트에 영향을 끼친 인물.’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의 간극을 허문 인물.’ 등등 무언가 저 낯선 화가의 이름자 위에 거대한 태그를 가져다 붙이는, 휘황한 수식들이 가득하다. 나는 열심히 찾다간 이내 그만두기로 한다. 이제 와 찾아본들, 그렇게 얻은 충분히 납득되지 못한 피상적인 정보들을 가지고서는 목적인 ‘충분한 관람의 체험과 향유’를 가져볼 수 없을 것이 분명할 터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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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와 캉캉, 이 포스터는 이번 전시회를 잘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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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는 인트로와 프롤로그를 지나 7개의 섹션으로 구성돼 있었다. ‘물랑루즈의 화가’ 로트렉의 전시회, 물랑루즈는 파리의 역사적인 카바레로 ‘빨간 풍차’라는 뜻이란다. 즉, 그는 ‘빨간 풍차 카바레의 화가’이고, 그것을 이 전시회는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생애와 예술 세계는 거진 반, 이 빨간 풍차 카바레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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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무래도 포스터로 유명한 듯하다. 미리 찾아본 바에서도 그렇고, 입장의 때에 받은 팸플릿에서도 마찬가지로 그의 포스터에 대한 칭찬들이 유독 돋보인다. 그의 전시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그림들도 대개 그의 포스터들임이, 그러므로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물랑루즈의 화가’라는 그의 별명에 걸맞게 댄스 클럽(?), 아니 카바레의 이미지로 전시회는 가득 차 있었다. 특히나 위의 캉캉을 소재로 한 그림들이 참 많다. 인트로에서부터 흥겨운 축제의 분위기, 그 예감이 벌써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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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니 이런 그림도 있었다. 우측에서 시야를 확 잡아당기는 여인의 얼굴. 푸른 낯빛이 주는 낯섦도 분명 그에 톡톡한 몫을 담당하고 있었겠지만, 나는 밑에서부터 위를 향해 비치는 조명, 그 조명이 얼굴에 드리우는 섬뜩한 그림자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입장하자마자 만나는 포스터와 캉캉, 흥겨운 축제의 분위기보다 그 옆에 자리한 이 모종 섬뜩한 그림으로 나의 신경과 관심은 쏠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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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그림은 이것이다.

 

 

전시회를 마친 뒤 글을 쓰는 지금, 내가 전시회를 잘 ‘읽은’ 것이었을지 자신이 없지만, 전시회에 비치된 그의 그림은 반절의 스케치와 반절의 포스터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채색된 그림들은 대개가 포스터이고, 그 외 그림에는 채색 없는 스케치만 있었다고, 나는 이 전시회를 읽어낸 것이다.


 

근본적으로 로트렉은 야외의 자연 빛을 화폭에 담으려 했던 인상주의와는 달리, 실내의 인공조명을 선호했다. 이런 로트렉의 화풍은 물랭 루즈의 실내조명 아래서 그린 모델들의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팜플랫의 이런 글귀가 막 눈에 들어온다. 어두운 카바레의 인공조명, 밑에서 위로 닥치는 조명은 분명 바깥의 세계에 수 놓인 자연광과는 이렇듯 다른 이미지를 가진다. 위에서 아래로 쪼이는, 혹은 전방위적으로 우리를 밝히는 자연광이 아닌, 밑에서 위로 역류하는 인공의 인상. 나는 이번 전시회를 이러한 테마에 입각하여 읽어갈 것임을, 전시회에 들어서자마자인 ‘인트로’ 섹션에서 벌써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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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의 막을 걷고 ‘프롤로그’ 섹션으로 들어서니 풍차와 빨간 글씨의 ‘물랑루즈’가 곧바로 눈에 띈다. 그의 그림들을 보기에 앞서, 시공간적 배경에 대한 이해와 몰입을 장려하는 듯한 배치이다. 프롤로그를 지나, 로트렉의 생애에 대한 간략한 소개마저 지나고부터 전시회는 시작된다. 섹션 1은 ‘연필 드로잉’, 스케치들을 위해 마련된 섹션이다. 아주 간단한 드로잉들로 가득 찬 그 공간을 빠르게 지나치면, 섹션 2에 이르러 드디어 그의 대표작으로 보이는 몇 개 포스터들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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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시회의 입구에서부터 만난 ‘아리스티드 브뤼앙’의 초상이다. 후에 알아보니 과연 대표작이라고. 그 외 몇몇 인물에 대한 포스터가 섹션 2에서 등장한다. 화가에게 영감을 준 뮤즈 들이란다. 그림 하나 모르는 나이지만 이 명료하고 단순한 형태와 분명한 색감의 앞에 서면, 괜히 조금 서 있게 되다. 유명하다는 인식 때문이었을까? 나 혼자선 알 수 없을 일이다.

 

앞서 가졌던 질문, 그래서 나는 무엇을 얻으러 이곳에 온 것일까 하는 질문을, 이 앞에 조금 오래도록 서서 다시금 가져본다. 짐짓 젠 체를 하며, ‘아 퍽 괜찮은 그림이네, 무척 눈길을 끄는걸?’ 하며 이제 이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 급급히 애쓰기엔 내 양심이 걸린다. 아직의 생각으론, 예술에서 내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직감적이고 영감 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보자마자 느껴지는 강렬한 무언가의 감각이 없이는, 나는 그 그림 앞을 떠나야만 했다.

 

섹션 2를 지나오면서부터는 그림 앞을 지나치는 속도를 조금 높였다. 그림의 앞에 내가 서는 것이 아닌, 그림이 나를 그 앞에 매어 붙잡아 두는 것이 옳겠거니 판단을 드디어 가진 덕이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이내 또 멈춰 서는 일이 생겼다.

 

 

배우 폴랭의 초상.JPG

배우 폴랭의 초상

 

 

이베트 길베르.JPG

이베트 길베르

 

 

스케치에 불과하지만, 이 낯선 얼굴의 앞에 또다시 나는 멈추었다. ‘인트로’에서 받은 것과 꼭같은 이질감과 기시감. 섹션 3의 안내문에서 로트렉은 "어떤 쇼가 벌어지든 상관없다. 나는 언제나 극장에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말했다 했지.


무대 위의 얼굴들에는 하나같이 섬뜩한 그림자가 드리워 기묘한 이질감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카바레에서 어떤 심정을 안고, 어떤 프레임과 시야로 인간들을 관찰하며 스케치를 한 것일까. 선 자리 이곳에선 다 밝힐 수 없는 의문을 안고서야 그림 앞의 발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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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메리 루이스 마르시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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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안나 헬드의 초상

 

 

얼굴에 그림자가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 고혹적이면서도 명백히 싸늘한, 두 여인의 초상이다. 그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에 앞서, 그는 어떤 시각으로 카바레의 군상들을 바라보고 있던 것일까. 그 시기의 프랑스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시대로 불리는 ‘벨 에포크’ 시대, 숱한 화가들이 파리로 모여들고 있었다 하였지.


가장 화려한, 말하자면 ‘카바레와 공연‘의 시대. 그는 정말로 그가 말한 대로 즐거운 것이었을까. 19세기 후반의 프랑스에 만연했다는, 퇴폐적인 경향인 데카당스의 홍수 속에서 그는 정말로 온전히, 즐기고만 있었던 것일까, 과연. 그러고 보니 최근에 읽은 니체 속 데카당스의 개념이 떠오른다. 정말 즐거웠던 것일까, 그는.

 

또 한 번 질문을 안고서야 발은 떼인다. 그 뒤로는 이제 전시회의 하이라이트, 그의 포스터들로 가득 찬 공간이 등장한다. 그 포스터들에는 분명 눈길을 끄는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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팸플릿이 언급한 대로, “대각선 구도, 과감한 자르기, 배경 생략,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 굵고 진한 선, 사선 문양 등” 그의 포스터에선 생략과 집중이 돋보인다. 색은 아주 절제되어 있고, 단순해서 명료해진 그 그림의 위로 사선으로 배치된 글씨가 외려 눈에 띈다. 그러니까 포스터의 목적을 잘 달성하는 셈이 되겠다. 더욱 기묘한 것은, 저 글귀를 통해 그림이 완성된다는 감상에 있었다. 만약 이 그림에서 글귀를 지워내고 본다면, 그러니까 상상 속에서 포스터가 아닌 순수한 그림으로 바꾸어서 다시 본다고 가정하면 짙은 아쉬움이 밀리어 온다. 글귀가, 아마 저 폰트가 그림의 일부가 되어 있었구나. 흥미로운 생각이다.

 

당대에 그의 포스터를 가지려 안달이 난 프랑스 시민들의 심정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는 바이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벽에 붙은 포스터를 떼어 가지려고 혈안’이 되었다고. 그로써 그의 작품들은 ‘보다 폭넓은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 역할’을 했고, ‘미술 작품이 대중 소비를 위해 제작되고 활용되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는 설명도 얼추 이해된다. 여전히, 이 감상이 순수한 인식인지 저 설명과 권위에 영향을 받은 생각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섹션 7을 마지막으로, ‘에필로그’ 공간에 들어선다. 거기선 그에 관해 설명하는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그리고 그 객석의 뒤편을 이 사진이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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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감상이다. 분명히 실례될 것이나, 너무나 강렬한 인상. 그는 과연 행복하였을까 하는 질문에 멋대로의 답변이 서는 순간이다. 행복하지 않음이 곧잘 불행이 되지는 않기에, 불행하였다고 단정 지을 불손한 생각일랑 없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은 그치지 않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묘사하고 칭송하는 것과 같이, '정말로 행복하였던가' 하는. 그리고 이제, ‘인트로’의 어떤 글귀가 스치듯 소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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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음과 매춘으로 37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하였다는 그. 알코올 중독과 과대망상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를 받아들였다는 그.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장애로 인해 귀족적 취미를 영위할 수 없었다는 그. 그의 아버지는 당대 귀족 스포츠인 승마에 능했다고 하였지. 그리고 아마, 그 좌절된 열망은 다른 출구, 예술로 분출되고 승화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섹션 6, 뜬금없이 가득한 말의 그림들 사이에서 괜히 이런 쓸쓸하고도 무례한 짐작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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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행복하였던가. 행복의 일상적인 용례가 주로 ‘선사 받는 행복’ 혹은 ‘주어지는 행복’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의 일상과 생애를 결코 알 수 없지만, 얼마만큼이나 그는 행복을 받았을는지, 회의적인 생각을 사를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 그리 중요치 않은 까닭은, 그는 어땠든 행복하기 위하여, 그것을 ‘발견’하고 ‘창작’하고자 했기 때문이고, 심지어 잘 해냈기 때문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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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을 나오자마자 벽을 가득 메운 ‘아리스티드 브뤼앙’의 포스터이다. 영락없이 이 전시회의 하이라이트라고 말해 무방하겠다. 포스터의 화가, 툴루즈 로트렉 전에서 나는 보라는 포스터는 안 보고 스케치만 잔뜩 보고 나왔구나. 그러나 감상은 더없이 유쾌하다. 다행히도 이 전시회를 잘 향유하였구나 하는 생각의 덕분이다.

 

앞서 말했듯 저 그림의 앞에서 어떤 인식을 내가 부러 자아내고 있었더라면, 그 그림에 얽힌 역사와 설명과 권위에 영향을 받은 채, 의식으로 감상을 엮어내며 혹은 얽어내며 전시회를 보았더라면, 나는 이런 유쾌한 감상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 그림들의 가치를 폄하할 생각일랑 추호 없다. 분명, 눈길을 끄는 무언가가 있는 그림들이다. 그러나, 여전히 문화예술의 향유는 직감 차원에서 일어나고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무엇을 가졌는가. 예술 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직감과 영감뿐이라면, 나는 어떠한 것을 얻고 나왔는가.

 

퍽 즐거웠다. 그것은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친 덕이다. 그 상상의 나래가 또한 의미로써 내게 감각되는 까닭이란, 내 일상 영역 너머의 무언가로 그 새가 날아가 호흡한 덕분이다. 언제나 반복되는 나의 일상, 집과 독서실과 체육관. 그 안정된 순환 속에서 나는 평안을 얻을 수도 있었으나, 가끔은 무언가, 그저 무언가 새로운 것에 대해 그리운 때가 찾아오곤 한다. 그렇다고 모험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도 그럴 것이 집 바깥에는 너무 많은 길이 놓인 탓이다. 무작정 찾아가려도 거기 무엇이 있는지를 도통 모르는 그 세상의 앞에 서면, 주춤하다간 이내 나의 공간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우연한 계기로 찾은 전시회였다. 인트로를 거쳐 빨간 풍차를 스치곤, 어느 작은 거인의 일상을 아주 멀리서, 오만하고 불손하게 구경한다. 그러한 와중에 19세기의 프랑스와 몽마르트와 흥분되고 고조된 당대의 분위기와 퇴폐와 카바레와 저 많은 얼굴들과 그 각 얼굴들에 스민 심경들과 그림자들과 이 모든 것들을 관찰한 어떤 사내를, 그 사내의 눈높이와 그 안에 서린 심경을 본다.

 

152센티미터의 높이에서 바라보는 보통의 어른들과 그들의 세상은 어떠했을까. 저기 밑에서 위로 비추는 조명과 그것이 자아내는 그림자는 분명 카바레의 조명이었을 터이지만, 밑에서 바라보는 그의 눈높이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자신의 신체적 핸디캡과 직업여성들의 도덕적 결핍 사이에서 동질감을 발견하였다고. 그것은 응당 소외된 이들의 연대함이 아니겠는가 싶다. 마치 당연한 듯 일어나는, 그 외로운 손들의 맞잡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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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의 한중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의 얼굴에만이 그늘이 지워져 있다. 그 배경을 차지한 이들의 얼굴 위 그림자를 바라보기엔 충분히 멀기 때문이었을까. 저 위의 그림자들을 다시금 훑어보면, 모두 무대 위 인물들의 얼굴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무대에 오른 이들, 배우와 댄서들의 얼굴 위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표현하려 한 것일까. 어쩌면 자신이 동질감을 느끼는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공감하고, 그를 대변해주는 것이었을까. 어떤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 혹은 감추어내야 했던 그 많은 표정들을 암시하는 것일까. 무대 위의 표정은 응당 페르소나일 터이니 말이다.

 

여전히 저 그림자는 그저 인공조명에 의한 것으로, 사실적 묘사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만, 나는 이런 멋대로의 자유로운 생각을 그냥 한 번 해보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내가 이 전시회에서 즐거이 받은 것들이 되고 말이다. “언제 어디서나 추함은 또한 아름다운 면을 지니고 있다. 아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곳에서 그것들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짜릿하다.” 나는 이 문장을 통해 그를 그린다. 그리고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는 모든 몸부림들은, 응당 지금 잠깐 쓸쓸한 중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바 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얻고 전시회를 나왔는가. 공감되는 이에게서, 공감할 만 한 이야기들을 얻어 나온다. 아주 먼 이야기들을. 여전히 그것이 사실로 확인된바 아니지만, 어땠든 나의 상상이 나아갈 수 있게끔 하는 영감, 그것으로 족하다. 내가 장차 어디에 가서 “로트렉은 이러 이러한 이이지.”하고 선언하지만 않는다면야, 오로지 조용하게 품곤 찬찬히 새로운 영감으로 다듬어가는 것으로만 이 안에 머무르겠다고 한다면야 괜찮을 일이다, 이것도.

 

웃고 있는 인간의 그림자와 그것을 바라보고 바라볼 줄을 아는 어떤 작은 이가 만드는 이야기를 하나 건지고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이제 벚닢이 마구 흩날린다만, 퍽 괜찮다. 나는 이제 찬찬히 내 얼굴 위로 서리인 그림자와 가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쟁이의 눈높이로 비치는 내 얼굴과 초상이 어떠할지를, 나는 이제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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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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