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실재의 귀환', 진리의 장소로서의 혐오 미술 [도서]

글 입력 2020.04.1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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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와 주체, 그 사이의 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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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포스터는 <실재의 귀환>의 5장에서 지속적으로 '외상'을 주요 키워드로 인간 주체가 미술을 통해 실재에 어떻게 접근하고 그 실재가 어떻게 건드려는지에 대한 논의를 개진한다. 그리고 앞서 작성했던 오피니언에서는 해당 장의 초중반부를 다루었다. 초중반부에서 저자는 팝 아트를 '외상적 리얼리즘'으로 바라보며 이미지의 외상적인 반복으로 인해 발생하는 투셰는 실재를 가리는 동시에 생산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한 발짝 더 나아가 진정으로 실재가 복귀하는 미술은 무엇인지 논할 차례다.
 
저자는 워홀의 이미지 속의 역설, 곧 외상적 실재를 가리기 위해 이미지를 반복시키지만 외상적 실재는 그러한 반복 속에서 우연적으로 복귀한다는 것을 수퍼리얼리즘과도 연관짓고자 한다. 이를 설명하기에 앞서 저자는 다시 한 번 라캉의 개념을 불러온다. 라캉은 수퍼리얼리즘이 대두되었을 당시 한 세미나에서 응시란 주체에 앞서 존재하는 것이며 이때의 주체는 “모든 방향으로부터” 보여진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라캉에 따르면 주체는 응시를 위협으로 느끼게 된다. 즉 라캉은 오랜 시간 동안 재현에서 지배적 위치를 가져 왔던 주체의 개념, 그리고 그 특권에 도전한다. 그리고 이때 지배적 위치를 차지했던 개념은 당연히 르네상스 시대에 당연시되었던 ‘주체는 대상의 지배자’라는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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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크 라캉
 
 
라캉은 ‘스크린’이라는 개념을 재현의 주체와 빛의 점(응시) 사이에 나란히 위치시킨다. 스크린은 주체를 위해 대상-응시를 매개하는 동시에 보호하는 것으로, 문화적 제약과 관련이 있는 것이자 미술의 관례, 재현의 도식 체계, 시각문화의 약호들이다. 즉 스크린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응시를 붙잡아 하나의 이미지 속에서 길들인다. 그리고 라캉은 대상을 볼 수 있게끔 허용하는 이러한 스크린이 없다면 우리는 응시에 의해 우리는 눈이 멀게 되거나 실재에 접하게 된다고 보았다.
 
즉 스크린은 응시가 아무리 주체를 사로잡아도 주체로 하여금 응시를 길들이게 하고 응시를 포기하도록 협상한다. 나아가 라캉은 응시를 우리가 먼저 무장해제하지 않으면 응시는 우리를 포박할 정도로 위험한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그림 만들기는 응시의 포박을 사전에 먼저 포박해 응시를 응시를 진정시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는 곧 미적 관조이다. 그러나 모든 미술은 이와 동시에 응시의 길들임을 열망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는 동시대-의 일부 포스트-팝 미술은 환영주의적 눈속임과 길들임을 리얼리즘과 구별되는 방식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해당 절에서는 ‘눈속임’과 ‘길들여진 주시’에 집중하려 한다고 밝힌다. 그리고 눈속임의 미술 가운데 하나로 그가 집중적으로 다룰 미술은 앞서서도 언급했듯이 수퍼리얼리즘이다.
 
 
 
'외상적 환영주의'로서의 수퍼리얼리즘

 

라캉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미술의 덕목이었던 눈속임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며 환영주의와 실재의 관계에 새롭게 주목한다. 그는 잘 알려진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그림 대결 이야기를 통해 동물을 유인하는 것 - 파라시오스가 까마귀를 속인 포도 그림-은 표면과 관계가 있지만 인간을 속이는 것 - 파라시오스가 제욱시스를 속인 베일 그림 - 은 ‘그 이면에 놓여 있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즉 라캉이 보기에 그림 뒤에는 응시와 대상, 실재가 존재하며 화가는 그것과의 대화를 이끄는 창조자이다. 그러나 이때 실재는 배후에 남아 우리를 계속 유인할 뿐, 완벽한 환영으로 나타날 수 없다. 즉 실재는 재현될 수 없는 것이자 잃어버린 무언가이다.
 
그리고 수퍼리얼리즘은 그러한 눈속임 이상의 미술이다. 수퍼리얼리즘은 속이기를 통해 실재에 맞서면서 실재를 표면 뒤에 봉인시킨다. 그리고 저자는 이에 첨언하기를, 수퍼리얼리즘은 물론 외양의 리얼리티를 전달하려 하지만 이는 결국 실재를 지연시키거나 다시금 실재를 봉인시키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수퍼리얼리즘이 실재를 봉인하는 방식 중에서 저자는 외양적 리얼리티를 다양한 반영과 굴절들을 통해 시각적 수수께끼로 재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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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차드 에스테스, <이중 자화상>, 1976
 
 
그 예시로 저자가 다루는 리차드 에스테스의 <이중 자화상>은, 한 식당의 유리창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작품이다. 창에 반사된 바깥, 즉 거리의 모습은 식당 내부에 누가 있는지를 혼동하게 한다. 즉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내 앞에 있는 것인지 뒤에 있는 것인지, 무엇이 식당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를 헷갈리게 된다. 그리고 이는 관람자로 하여금 스스로가 ‘수많은 방향으로부터 보이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저자에 따르면 수퍼리얼리즘은 초현실주의와 은밀한 연관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수퍼리얼리즘은 근저에 놓인 실재와 관계한다는 점에서는 초현실주의와 유사하지만 실재를 살짝 건드려서 터져 나오게 하려 하는 초현실주의와는 달리 실재를 계속 밑에 두고 숨기려 한다. 그러나 팝 아트와 마찬가지로 결국 수퍼리얼리즘 또한 실재를 가리키게 된다. 그래서 수퍼리얼리즘은 ‘눈속임으로서뿐만 아니라 응시의 길들임, 즉 외상적 실재를 피하는 보호막으로서도 실패한다.’ 그래서 수퍼리얼리즘은 우리에게 실재를 상기시키지 않는 데 실패하는 ’외상적 환영주의‘다.

 
 
차용미술과 혐오미술, 상징적 질서를 향한 도전

 

그리고 저자가 본격적으로 ’실재의 귀환‘이라는 소제목을 가지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차용미술이다. 차용미술은 사진을 주 매체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앞서 다룬 수퍼리얼리즘과 유사하다. 그러나 복제가능성과 같이 회화적 가치를 위협할 만한 다른 것들은 배제하는 수퍼리얼리즘과는 달리 차용미술은 회화적인 독창성을 의문시하며 사진의 복제가능성을 이용한다. 즉 그들은 재현의 지시적인 가치나 사실 기록적인 진리를 의문시하며 환영주의에 대항한다는 점에서 수퍼리얼리즘과는 완전히 다르다.
 
수퍼리얼리즘과 차용미술이 다른 점은 이 한 가지뿐만이 아니다. 수퍼리얼리즘은 관람자가 정교한 환영에 열중하고 빠져들기를 바란다. 그러나 차용미술은 관람자가 비판적으로 환영의 표면을 꿰뚫기를 바란다. 이러한 시각은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기본적 입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라캉이 말했던 이미지-스크린에 대한 논의를 다시 한 번 불러온다. 차용미술은 스크린에 대해 비판적이고 적대적일 수 있지만, 스크린에 오히려 매혹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것은 차용미술이 재현적 환영들을 노출시킬 때 실재가 이미지-스크린을 뚫고 나올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때 저자는 리처드 프린스의 <무제(일몰)>을 들어 설명한다. 이 작품은 잡지에서 취한 흔해 빠진 휴가여행의 이미지들, 곧 태양과 해변, 젊은 연인들과 귀여운 아이들의 이미지들로 수퍼리얼리즘적 모습을 조작한다. 이로써 광고들은 ’‘외양’이라는 의미에서는 탈실재화되지만 ‘욕망’이라는 의미에서는 실재화된다. 이렇게 재현의 효과인 리얼리티가 외상의 실체인 실재로 전환되는 것은 당시의 동시대미술계에서 결정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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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디 셔먼, <무제 영화 스틸 #2>, 1977


이때 저자가 다루는 작가는 신디 셔먼이다. 셔먼은 ‘응시 하에 있는 주체’를 환기시키는 기법을 사용한다. 그는 응시에 사로잡혀 있는 여성 주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때의 응시는 남성 주체에 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주시하는 응시이기도 하다. <무제 영화 스틸 #2>을 예시로 들어 보자. 이 작품 속 화장한 젊은 여성의 모습은 거울에 비춰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적 이미지를 통해 셔먼은 상상되는 신체 이미지와 현실적인 신체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정신병적인 것으로 짚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미술에서 실재의 환기를 위해 시도하는 첫 번째 접근은 의도적으로 환영주의를 실재의 지점까지 밀고 가는 것이다. 이때의 환영주의는 실재를 기괴한 사물들 속에서 노출시키려는 목적을 갖는다. 반면 두 번째 접근은 첫 번째 접근과는 정반대로, 실재를 그 자체로 불러내기 위해 환영주의를 거부하고 대상-응시의 어떠한 승화도 거부한다. 이는 혐오 미술의 일차적 영역으로, 훼손된 신체의 와해된 경계들에 이끌린다.
 
그렇다면 미술에서 이야기하는 ‘혐오스러운 것’은 무엇인가?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혐오스러운 것은 내가 하나의 나이기 위해서 제거해야 할 어떤 것이다. 혐오스러운 것은 나에게 낯선 것이지만 또한 친밀한 것이기도 하다. 혐오는 주체에게 위기를 가져다주고 의미가 와해되는 상태를 뜻한다. 그래서 혐오는 아방가르드 예술가에게 매력적이다. 그리고 타자가 무너져버린 세계에서 예술가의 임무는 혐오스러운 것을 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파헤치는 것이고, 최초의 억압에 의해 구성된 근원성을 헤아리는 것이다. 즉 크리스테바는 혐오를 사회 질서를 보증하는 아버지의 질서가 맞이한 위기로 보며, 이는 이미지-스크린의 위기를 함축하기도 한다.
 
즉 혐오 미술가들은 이미지-스크린이 이미 찢어졌다는 가정 아래 그 뒤를 탐색하며 실재의 외설적인 대상-응시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지-스크린에 대한 상징적 질서가 온전히 힘을 다하고 여기며 그에 대한 공격에서 위반적 가치를 찾는 아방가르드의 오랜 소명을 끝낼 수도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 시점에서 아방가르드의 소명에 대한 재정식화를 요청한다. 즉 혐오 미술에서의 위반을 상징적 질서의 밖에서 생산한 파열이 아닌, 상징적 질서 안에서 축적한 균열로서 다시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결국 아방가르드의 목표는 상징적 질서가 돌파되어 전에 없던 새로운 가능성에까지 도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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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밀러, <딕/제인>, 1992
 
 
그리고 이러한 혐오스러운 것으로 상징적 질서를 시험하는 작업 중 존 밀러의 <딕/제인>은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인형을 똥 대체물 속에 파묻은 작업이다. 이때 제목인 딕과 제인은 초급 독본에 등장하는 이름으로, 그들은 북미의 많은 어린이들에게 글자를 읽는 법만 가르치지는 않았다. 밀러는 그들이 ‘성차’를 읽는 방법까지도 가르쳐 왔다고 본다. 그리고 밀러는 이 작업에서 제인을 딕으로 바꾸고 그 합성물을 똥 더미 속에 파묻어 여성과 남성 사이의 차이를 지우는 동시에 강조시킨다. 그리고 켈리 또한 자신의 창조물들을 항문적 세계, 곧 상징들이 확고하지 않은 공간에 위치시킴으로써 상징적 차이를 교란하고자 한다.
 
혐오의 제의 속 무관심한 태도는 정치학에 대한 피로를 표현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그보다도 더 근본적인 피로, 곧 욕망이 없는 상태에 대한 욕망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충동으로 인한 신체의 파열과 주체를 삼켜버리는 응시, 공간이 되는 주체, 그저 유사할 뿐인 상태의 미술은 미의 이상을 전복시킨다. 그리고 이는 치명적인 주이상스(쾌락원칙을 넘어서는 고통스러운 쾌락(라캉))에 내맡겨진 주체의 발작적 점유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발작적 점유가 이미지-스크린 혹은 상징적 질서의 와해를 상상하는 데에서 오는 황홀경인 동시에 절망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환상적 사건에 대한 공포라고 주장한다.
 
몇몇 초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미지 자체를 즐기려 했지만 몇몇 후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실재적인 것을 점유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양극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외상에 대한 매혹과 혐오에 대해 선망한다. 그들은 리얼리티에 대한 관례주의적 견해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포스트구조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억압되었던 실재를 외상으로서 복귀시키려 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욕구들의 원인에는 구조적인 가난과 범죄, 무너진 복지나 위협적 질병 등의 힘들이 영향을 미친다. 결국 그러한 힘들은 외상과 혐오에 대한 관심을 야기했다.
 
이로써 동시대 문화의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는 외상적이지만 혐오스러운 주체, 병들거나 손상된 신체에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차별주의자들 가운데 포함되지 않기 위해 그러한 차별주의적 주체들의 기피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위험성을 갖는다. 그래서 결국 혐오의 제의를 위한 역사의 주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시체가 될 수밖에 없다. 시체는 무관심에까지, 나아가 허무에까지 떠밀려가는 타자성의 결정체이다.
 
그리고 외상 담론은 주체에 대한 포스트구조주의적 비판을 다른 수단으로 계속한다. 이는 정신분석학에서는 외상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문화에서 외상은 주체를 보증하는 사건이다. 이때 심리주의에서는 주체가 아무리 교란당해도 목격자, 증언자, 생존자로 다시 돌아온다. 즉 외상적 주체는 존재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타인의 외상에 도전할 수 없기에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 결국 외상 담론에서 주체는 소거되는 동시에 승격된다.
 
그리고 저자는 이로써 외상 담론이 해체적 분석과 정체성 정치학이라는 명령 사이를 마술적으로 해결한다고 본다. 저자의 이상한 재탄생, 혹은 부재자 권위라는 이러한 모순적인 조건은 당대의 의미심장한 전환이다. 저자는 결국 실재의 복귀는 지시대상의 복귀와 수렴한다고 본다.
 
*
 
저자가 이 책을 출간한 지는 이십여 년이 흘렀다. 그래서 글 속에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동시대'라는 키워드는 지금의 시선에서는 꽤나 오래 전의 과거이다. 특히나 동시대의 미술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90년대의 미술은 동시대미술이 아닌 현대미술의 범주에서 다루어지는, 넓은 범위에서 보면 미술사의 한 부분이 된다.
 
그렇기에 지금의 우리가 바라보는 90년대와 저자가 바라보는 90년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개별적인 나무에서 한 발짝 떨어져 전체적인 숲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과거의 것을 돌아볼 때에만 가질 수 있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동시대의 상황에 대한 통찰력을 계속해서 지키려 한다. 그리고 당대인의 고찰이 이십여 년이 흐른 지금 어떤 방향으로 달라지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인 셈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뒤, 과거의 2020년은 어떤 논의를 낳을 수 있을지에 대한 동시대의 고민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기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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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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