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관능으로의 언어적 초대 - 모데라토 칸타빌레 [도서]

글 입력 2020.04.05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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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품을 고르든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작가가 있다. 타율이 좋은 대타 같은 작가랄까. 선발 타자로 출전시키지 않고, 승부의 분수령에만 이따금씩 대타로 출전시키는 그런 선수 같은 작가 말이다. 중요한 순간에 믿고 기용할 수 있는 그런 선수가 감독의 용병술을 완성시키는 것처럼, 일상의 반복 속에서 감각이 둔해졌을 때 믿고 고를 수 있는 그런 작가가 필요하다. 나에게는 그 작가가 뒤라스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어느 작품을 고르든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해내지’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작가이다. 삶에서 잊혀진, 그러나 한때 너울거리던 감각을 상기시켜주는 표현을 그녀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녀의 작품은 대부분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사랑이라든가 관계는 끝났지만 사랑은 모종의 형태로 남아있다든가 하는 식이다. 이런 사랑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체다. 사랑을 겪어본 대부분의 독자에게 단지 인물간의 관계나 일련의 사건을 나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사랑 이야기에 있어서 신박한 전개는 기대되지 않는다. 다만 서사 속에 녹아있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같은 사건이라도 그 표현에 따라서 그 사건의 가치, 사건에 대한 독자의 인식이 달라진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사랑 이야기는 스포일러를 당해도 작품을 소비하는 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스포일러는 사건과 배경에 관한 것이지 문체와 표현에 대한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작품으로 아트인사이트에 글을 쓰는 것은 이번이 네 번째이다. 소설로는 『연인』, 시나리오로는 『히로시마 내 사랑』, 그리고 연극으로는 『라 뮤지카』에 대한 글을 게재한 적 있다. 소설 『연인』은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로서 세계적인 작가의 대표작으로 두말할 것 없고, 『히로시마 내 사랑』은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이 크게 성공한 후에 뒤라스의 영화 시나리오를 출간한 것이다. 『라 뮤지카』는 기존에 뒤라스가 연출한 연극을 우리나라에서 재현해낸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뒤라스라는 거장의 작품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의 감동은 잊을 수가 없다. 아트인사이트 에디터를 『연인』으로 지원하고 문화초대를 통해 『라 뮤지카』를 향유하고, 『히로시마 내 사랑』에 대한 오피니언을 쓰며 작년 한 해를 마무리 했다. 아트인사이트에서 활동을 하는 동안 뒤라스의 작품들은 항상 함께했고, 별다른 예술적 취향이 없었던 나에게 뒤라스는 하나의 취향으로 정착했다.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모데라토 칸타빌레』이다. 안은 제련소 사장님의 아내로 평소에 흐트러진 모습이 없는 사람이지만 저택 2층의 방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에 이골이 난다. 그녀의 유일한 외출은 매주 금요일 아들의 피아노 레슨에 동행하는 것이다. 어느 날 레슨 도중 거리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안은 소리를 듣곤 현장을 찾아간다. 피를 흘리고 있는 여성과 여성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살인자. 이 기이한 상황에 대한 호기심은 다음날에도 안을 거리로 나오게 만든다. 이례적인 외출을 통해 안은 카페에서 젊은 남성 쇼뱅과 대화를 나누게 되고, 살인 사건에 대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이를 계기로 안은 레슨이 없는 날에도 카페를 찾아가고 쇼뱅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쇼뱅과 함께 살인 사건을 함께 재구성해 나가며 안은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관능적 사랑에 대해 주목하게 되고 쇼뱅과의 관계도 더더욱 깊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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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데라토 칸타빌레는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똑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안에게 일탈이 생길 수 있었던 계기는 살인사건이다. 피아노 레슨이 끝나고 나서 그녀는 아이더러 기다리라고 하고 살인사건이 일어난 거리의 카페를 찾아간다. 사랑으로 가득한 살인자의 눈빛, 그리고 피범벅이 된 여성. 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성을 어루만지는 손길. 뒤늦게 출동한 경찰에게 연행되면서도 저항하지 않는 살인자. 이런 괴이한 풍경이 한낮의 거리에 이루어진 것이다. 안은 구경꾼들의 장사진을 뚫고 들어가 이 광경을 생생하게 목격한다. 틀에 박힌 삶을 살고 있는 상류층 여성, 인간적·감정적 교류 없이 대부분의 시간을 저택의 창가에서 보내는 한 여성 앞에 펼쳐진 이 장면은 그녀의 내면에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일까.


이후 쇼뱅과 주기적인 만남을 가지면서 안은 살인자와 여성의 관계를 유추해나간다. 알려진 정보는 극히 제한적인 가운데 쇼뱅과 함께 사건의 전말을 재구성한다. 그들은 너무나 사랑하는 사이이고, 너무 사랑해서 그 남자의 손에 죽고 싶었을 수도 있다. 죽음의 순간 두 사람의 마지막 육체적 교감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일으켰을 것이다. 단순한 이성과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다. 현장의 구경꾼들은 소름이 돋는다는 둥 이 평화로운 도시에 별 일이 다 있다는 둥 말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안은 육체적 관능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인간의 감정을 살인사건을 통해 포착한다. 논리적으로 무결한, 이성적으로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는 한 여성이 스스로의 감각과 감정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인 것이다.


안이 그동안 외면받아온 자신의 감정을 다시 포착하게 되는 과정은 쇼뱅과의 대화를 통해서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둘 사이에 유별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둘은 대화를 나누고 카페주인에게 포도주를 더 달라고 부탁하고 서로를 쳐다보거나 닦달하거나 용기를 북돋아 주면서 대화를 계속 이어나간다. 하지만 뒤라스 특유의 문체는 눈빛교환과 대화뿐인 이들의 만남에서 전율이 느껴지게 만든다. 대화를 하는 동안 안은 방황한다.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돌아오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저택에서의 자신의 생활에 대한 설명으로 답한다. 혹은 자신의 아들에 대해 자랑하거나 거리의 풍경에 대해 이야기한다. 혹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든가 포도주를 더 달라는 말도 한다. 이러한 산만한 과정을 거치곤 다시 살인사건에 대한 대화로 돌아온다.


그녀는 아마 뇌리에서 사건을 전개시키며 새롭게 일어난 내면의 복잡한 감정을 마주했는지도 모른다. 감각과 감정에 대한 대화 주제를 이어나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이런 모습들을 담아내는 세심한 작가이다. 대화 중간에 안은 앉는 자세를 고치기도 하고 외투의 여밈을 고치기도 한다. 대화가 오가는 사이에 창밖의 풍경이 삽입되기도 한다. 이 긴밀하고 심각한 문제, 관능과 감정의 상호작용에 관한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 안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휴지(休止)가 필요할 것이다. 뒤라스는 서사의 속도를 조절해가며 인물의 깨어진 내면과 무거운 대화들을 그려낸다.


 

그 여자가 포도주를 한 모금 삼키자, 다시금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금세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서서히 취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 p.34 中


  

뒤라스의 서술은 서사의 속도를 조절할 뿐 아니라 인물과 독자 간의 거리 역시 세심하게 조절한다. 이어지는 문장들에서 문장의 주어를 보자. 맨 처음의 “그 여자가”를 제외하면 “미소”, “어두운 얼굴”, “취기”가 주어의 자리에 오고 있다. 문법적인 엄밀성, 번역상의 여지를 차치하면 문장을 주도하는 단어들은 저러한 보통명사들이다. “안이 미소를 지었다”가 아니라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라고 할 때, 이 문장에서 안의 주체성이나 의지가 지워진다. 인물의 의도가 가려지는 것이다. 그 자리는 어두움의 이미지, 취기의 분위기가 대신한다. 뒤라스의 서술 속에서 인물의 의지나 논리, 이성은 사라진다.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서사는 감각과 뉘앙스로 전개되고, 독자는 문체에 녹아있는 섬세한 관능에 도취된다.

 

단순히 유부녀의 일탈, 혹은 금지된 만남이라는 줄거리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매력을 알 수가 없다. 물론 줄거리의 추동력으로 완성되는 소설들도 있다. 하루키 유(類)의 장편소설은 숨막히는 서스펜스와 인물과 인물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생성되는 이야기들을 원동력으로 작품이 전개되고, 이러한 매력이 세계의 독자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문학에서 있어서 모든 작품들을 하나의 기준으로 분류할 수는 없지만, 줄거리의 추동력을 기준으로 봤을 때 뒤라스는 완전 반대편에 있다. 줄거리로는 작품에 대해 전혀 말할 수 없는, 시각적, 혹은 언어적 기교만으로 전개되는 작품을 그녀는 만든다. 그리고 그 특유의 언어는 독자의 감각 깊은 곳을 자극한다.


백 페이지 남짓한 이 작은 중편 소설 속에는 이성으로는 가늠될 수 없는 광적인 사랑에 대한 고민이 들어있다. 세계는 반드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개인 혹은 두 사람의 감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광기 혹은 관능의 모습은 인간의 내면에 들어있고, 이는 설명할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성으로 마주할 수 없는 모양의 무언가는 감성이라는 도구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감각과 육체의 도취의 세계에 뒤라스는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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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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