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 러브리스, 2019 [영화]

글 입력 2020.04.04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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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리스

Loveless, 2019

 

감독 :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배우 : 마리아나 스피바크, 알렉세이 로진

 

제냐와 보리스는 이혼을 준비 중이다. 서로에 대한 애정과 희망은 분노와 좌절로 바뀐 지 오래다. 이미 두 사람은 각자의 연인을 만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으로 잔뜩 들떠 있다. 그런 그들에게 아직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 알로샤는 걸림돌에 불과하다. 한편 소년은 부모가 자신을 서로에게 떠넘기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음 날 알로샤는 사라지고 부부는 뒤늦게 알로샤를 찾으러 간다.

 

***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남자와 여자는 오늘도 다툰다. 한때 부부였던 두 사람은 더 이상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마치 사냥을 준비하는 사자처럼 호시탐탐 서로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격렬하게 다툰다. 오늘은 남자가 먼저 선전포고를 했다. 기다렸다는 듯 여자가 되받아친다. 누가 아이를 데려갈 것인가. 그 누구도 실패한 사랑의 유산을 안고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마침내 폭발한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방문을 닫아버린다. 그러자 문 뒤에 숨어 있던 소년이 드러난다. 소년은 어둠 속에서 숨죽여 눈물을 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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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의 전작 <리바이어던>은 탐욕스러운 시장에 의해 집을 빼앗기게 된 어떤 남자의 이야기였다. 이를 통해 러시아 사회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쏟아낸 감독은 이번엔 시선을 돌려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을 바라본다.

 

영화 <러브리스>는 이혼을 목전에 둔 부부의 다툼으로 시작한다. 제냐와 보리스에겐 서로를 향한 털끝만큼의 사랑도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부부 사이만 박살 났을 뿐, 여전히 진정한 사랑을 갈망하는 그들은 가정의 바깥에서 새로운 인연을 찾는다. 한때는 행복한 추억으로 가득했을 부부의 집은 이제는 한시라도 벗어나고픈 답답한 감옥이다. 그러기에 보리스는 제냐에게 제발 좀 이 집을 떠나달라고 사정하고, 제냐 역시 하루라도 집을 빨리 팔아버리기 위해 집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애를 쓴다. 딱 하나, 어둠 속에서 마치 그림자처럼 숨을 죽인 채 흐느끼는 ‘알로샤’만 빼고 말이다.

 

<러브리스>는 ‘사라진 아이’라는 제법 익숙한 모티브를 가지고 극을 이끌어 나간다. 다만 흥미로운 건 아이를 잃어버린 대상이 이혼을 목전에 둔 부부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부부에게 아이란 그들이 품은 사랑의 결실이다. 그러나 제냐와 보리스에겐 다르다. 두 사람에게 그들의 아이, ‘알로샤’는 새로운 출발의 걸림돌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아이를 맡을 것인지를 두고서 다툰다. 제냐는 우선 기숙학교에 보냈다가 그다음엔 군대를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한다. 심지어 보리스는 독실한 기독교도인 상사가 자신의 이혼을 알아채는 것만 걱정할 뿐, 알로샤에겐 아예 관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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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결국 ‘사랑이 사라졌다 Loveless.’ 사랑이 사라진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어둠 속에서 펼쳐지는 두 남녀의 섹스는 새벽의 어스름 때문에 오히려 차가워 보인다. 예수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데 독실한 기독교 계열의 회사를 다니는 보리스는 이혼이 자신의 밥그릇에 미치는 영향에만 관심을 든다. 자신을 보러 오라는 아버지의 말에 멀리 사는 딸은 ‘제가 그곳에 왜 가요’라며 반문한다. ‘사랑을 위하여’라는 구호 뒤에는 ‘셀카나 찍자’는 냉소가 뒤따라온다. 제냐의 새로운 연인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랑 없는 삶이라니. 그 상태로는 절대 못 살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므로 사랑이 사라진 이 세계의 질료는 차가운 바람과 죽은 나무, 스산한 안개다.

 

영화 속에서는 똑같은 관계가 두 번 반복된다. 제냐와 그녀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불화에 시달렸다. 오죽하면 제냐의 남편인 보리스조차 그녀의 어머니를 향해 험담을 퍼부을 정도다. 알로샤를 찾으러 온 제냐에게 그녀의 어머니는 이제 이혼할 때가 되니 자신에게 아이를 맡기려는 수작이 아니냐며 폭언을 쏟아낸다. 그녀는 제냐로 인해 자신의 삶이 불행해졌다고 믿는다. 제냐는 그 말을 알로샤에게도 똑같이 해주었다. 예의가 없다느니. 날이 갈수록 자기 아버지를 닮아 밥맛이라느니. 그러다 마침내 알로샤가 사라졌을 때 제냐가 보인 첫 번째 반응은 당혹스러움이었다. 그 똑같은 얼굴을 제냐의 어머니도 제냐와 보리스가 떠난 빈 집에서 홀로 보였더랬다.

 

제냐와 보리스가 각자의 연인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사이, 두 사람의 아이는 사라졌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은 알로샤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앞에 4명의 아이가 나타난다. 첫 번째 아이인 알로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두 번째 아이는 알로샤의 친구다. 그가 알려준 알로샤의 아지트는 폐허가 된 건물 밑에 자리하고 있었다. 세 번째 아이는 밤사이 공원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걸 경찰이 발견해 병원으로 데려왔다. 네 번째 아이는 죽었다. 말하자면 그곳은 아이들이 사라지는 게 일상화된 세계인 셈이다. 오죽하면 사라진 아이를 찾아주는 전문적인 자원봉사단체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은 단순한 가출에 불과할 것이라며 무덤덤하다. 뒤늦게 그것이 단순한 가출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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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감독은 왜 하필이면 저마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던 부부의 아이를 사라지게 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단 한 번도 지금의 배우자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며, 당신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사랑이라는 제냐의 달콤한 말은 알로샤를 찾는 두 사람의 행로와 그대로 이어진다. 둘 다 ‘사랑’을 찾는 여정이었던 셈이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새로운 가정을 꾸린 보리스는 그의 새로운 아들이 뉴스를 보는데 방해가 되자 아이를 유아용 침대에 가둬버린다. 제냐는 새로운 남편의 곁에서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대신 핸드폰에만 신경을 쏟다. 그리고 두 사람의 알로샤는 여전히 실종 상태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사랑이 사라진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영화 속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털어놓는다. “이젠 뭐 때문에 싸우는지, 누가 시작했는지도 잘 모르겠어.” 사랑이 사라지면 혐오와 폭력이 빈자리를 대신 채운다. 제냐는 홀로 거실을 빠져나와 러닝머신 위에 오른다. 그건 아무리 달려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기계다.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 애를 썼던 그녀는 여전히 사랑 때문에 불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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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엔딩에서 카메라를 응시하는 제냐의 가슴팍에는 RUSSIA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다. 그 순간 이 가족의 작은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된다. 러닝머신 위에 오르기 전 그녀가 보던 텔레비전에서는 우크라이나의 분쟁과 관련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과거 소비에트 연방의 소속이었던 역사로 인해 현재 친서방파와 친러시아파로 나라가 갈려 내전을 겪고 있다. 마치 서로에게 날을 세우고 외부의 낯선 연인에게 매달리는 모습이 꼭 제냐와 보리스 부부를 닮아 있다. 그리고 둘 사이의 전쟁 같은 부부 싸움 속에서 평범한 소시민들의 일상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사랑이 사라진 시대라는 건 바로 그런 것이다. 집을 잃은 여인의 통곡 앞에서 누구 하나 안타깝다는 빈말조차 내뱉지 않는 것이다. 정작 사랑을 주어야 할 아이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는 것이다.

 

제냐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보리스가 탄 자동차의 라디오에서는 종말론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장르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였던 셈이다. 사랑이 사라져버린 오늘날, 보리스와 제냐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그렇게 마지막 종말을 향해 달려 나간다. 아주 내밀한 곳에서부터 조금씩, 서서히 주변을 잠식해가며 무너져 간다.

 

그리고 이는 바꿔 말하자면,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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