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를 잊은 나에게, 그리고 그대들에게 [도서]

코로나 블루에 빠져있을 이들에게 전하는 <가장 예쁜 생각을 너에게 주고 싶다>
글 입력 2020.04.0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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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가장예쁜.JPG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 중


 

매일매일 시를 접하던 때가 있었다. 주로 원해서 읽었다기보다는 국어 교과서를 통해 접하는 게 대다수였다. 그때 접했던 시들은 때로는 너무 짧아서, 혹은 한자로 되어있어서 홀로 의미를 헤아리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수업 시간이 되면 시를 분석하고, 학습하는 과정을 통해 그 내용을 이해하고 숨은 뜻을 찾는 것이 좋았다.


시에 쓰인 도치법이니 대조법이니 하는 것보다는 시가 가지고 있는 간결한 문장 속 커다란 의미들이 마음속에 와닿았었다. 그렇게 정지상의 <송인>이라든지, 김동명의 <내 마음은>과 같은 시들은 시대를 초월해, 어렸던 나에게 문학적 감상을 선사했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 그렇게나마 시를 향유하던 시간은 사라져버렸다. 대학에서의 시들은 형식과 문법, 시대 배경의 이해 등 학문적 연구에 치중해버린 나머지 감상할 여유가 사라졌던 것이다. 그렇게 지내던 중, 재작년 생일 시집을 한 권 선물 받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한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짤막한 시, <풀꽃>의 지은이 나태주 시인의 시집 <가장 예쁜 생각을 너에게 주고 싶다>였다.


선물 받았던 그때에는 현대시와 고전 시로 분류된 시들을 학문적 관점에서 보던 것이 익숙했던 터라 이렇게 서정적인 시들이, 심지어는 표지의 일러스트마저 낯설었다. 혹은 단편으로 된 시가 아닌 '시집'이 낯설었을 수도 있다.

 

사유가 어찌 되었든지, 그 당시에는 시집의 1장까지만 겨우 읽어보았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잊고 지내던 시집은 전 세계가 혼란에 빠져 있기에 집에서 고요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아진, 다소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한 지금에야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향유하게 된 시집에서, 가장 좋았던 몇 편을 감상과 함께 공유해보고자 한다.

 

 

 

가족




행복·1

 

1

딸아이의 머리를 빗겨 주는

뚱뚱한 아내를 바라볼 때

잠시 나는 행복하다

저의 엄마에게 긴 머리를 통째로 맡긴 채

반쯤 입을 벌리고

반쯤은 눈을 감고

꿈꾸는 듯 귀여운 작은 숙녀

딸아이를 바라볼 때

나는 잠시 더 행복하다.

 

(중략)

 

딸아이 손을 바꿔 잡고 가는 나를

아내가 뒤따라 오면서

꼭 머슴아저씨가 

주인댁 아가씨 모시고 가는 것 같애

놀림을 당하면서

나는 조금 더 행복해진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인 가족의 평범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아버지의 시선으로 그려냈다. 책의 표지에 쓰여있듯, 시집의 시작과 끝에는 아버지가 딸에게 건네는 따뜻한 사랑의 시가 자리해있었다. 따지자면 나는 시의 청자일 딸에 가깝지만, 오히려 화자인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 곧 내 마음인 듯 더욱 가까이 느껴졌다.

 

 

 

사랑




소망

 

받고 싶은 마음보다 

주고 싶은 마음이 좋은 마음이다

 

주고 나서 이내 잊어버리고

무엇을 또 주어야 하나

찾는 마음이 좋은 마음이다

 

꽃을 보고서도 저것을 가져다

주었으면 하고

구름을 만나서도 저것을 데려다

주었으면 하는

 

그 마음 뒤에 웃고 있는 네가

있음을 나는 모르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거기 너 그렇게

웃고만 있거라

예뻐 있거라.


        

사랑을 한다면 누구나 공감할 내용이다. 대상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것은 연인이든, 가족이든, 친구든 누구나가 될 수 있다. 주고 싶은 것을 단지 물질적인 것에 한정하지 않고, 그저 사랑하는 사람이 웃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을 시 한 구절 한 구절에 담아냈다.

 

 

 

자연




유월에

 

말없이 바라

보아주시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합니다

 

때때로 옆에 와 

서 주시는 것만으로도 나는

따뜻합니다

 

산에 들에 하이얀 무찔레꽃

울타리에 덩굴장미

어우러져 피어나는 유월에

 

그대 눈길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나는

황홀합니다

 

그대 생각 가슴속에

안개되어 피어오름만으로도

나는 이렇게 가득합니다.



새해 인사

 

글쎄, 해님과 달님을 삼백예순다섯 개나

공짜로 받았지 뭡니까

그 위에 수없이 많은 별빛과 새소리와 구름과

그리고

꽃과 물소리와 바람과 풀벌레 소리들을

덤으로 받았지 뭡니까

 

이제, 또다시 삼백예순다섯 개의

새로운 해님과 달님을 공짜로 받을 차례입니다

그 위에 얼마나 더 많은 좋은 것들을 덤으로

받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잘 살면 되는 일입니다

그 위에 더 무엇을 바라시겠습니까?


        

다른 시들에서도 조금씩은 느껴지지만, 위의 시들은 특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듯하다. 시를 읽다 보면 눈앞에 찔레꽃이, 장미가 선하게 그려진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졌던 자연의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그려냈기 때문일까? 무엇을 위해 바쁘게 살아가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시간을 가질 기회를 시로부터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감정


 


눈사람

 

밤을 새워 누군가 기다리셨군요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그만

새하얀 사람이 되고 말았군요

안쓰러운 마음으로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었을 때

당신에겐 손도 없고

팔도 없었습니다.



인생

 

화창한 날씨만 믿고

가벼운 옷차림과 신발로 길을 나섰지요

향기로운 바람 지저귀는 새소리 따라

오솔길을 걸었지요

 

멀리 갔다가 돌아오는 길

막판에 그만 소낙비를 만났지 뭡니까

 

하지만 나는 소낙비를 나무라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어요

날씨 탓을 하며 날씨한테 속았노라

말하고 싶지도 않아요

 

좋았노라 그마저도 아름다운 하루였노라

말하고 싶어요

소낙비 함께 옷과 신발에 묻어온

숲 속의 바람과 새소리

 

그것도 소중한 나의 하루

나의 인생이었으니까요.



누구나 느끼고 공감할 보편적 감정을 감성적으로 풀어내며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이미 상처받고 인간관계에 질려버린 이는 누군가 내민 손을 잡을 손이, 아니 팔 조차 없이 꽁꽁 얼어버린 눈사람이 될 수도 있다. <눈사람>은 이를 공감해 주고, 이해해 주는 듯했다.


혹은 상처받은 이를 위로해 주는 듯하다. 아홉 가지로 행복했던 하루가 좋지 않은 한 가지의 이유로 나쁜 날이 되진 않는다. 좋지 않은 일을 겪은 이를 그렇게 위로해 주는 듯하다. 어떻게 좋은 일만 있을 수 있으랴. 그래도 괜찮다고, 그래도 좋은 날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며.

 

*

 

이 책에서 마주친 나태주 시인의 시는 대체적으로 가족, 자연, 사랑, 감정 등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 내용들 역시 주제에 맞게 대부분 따스한 내용이 간결하게 가득 차있다. 다른 시들처럼 비유 속 숨은 뜻을 찾지 않아도, 한 글자 한 글자 읽는 순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조금은 정신없고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버린 현실 속에서, 시집을 읽은 시간이 올해 가장 평온했던 순간인 듯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일 수도 있고, 특별한 날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특별함이 행복을 뜻하지는 않는다.


해마다 같은 자리로 찾아오고 우리를 맞아주던 벚꽃, 개나리, 봄 내음, 햇살과 따뜻한 바람. 그렇게 당연했던 하루하루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행복이었다. <가장 예쁜 생각을 너에게 주고 싶다>는 시를 잊었던 나에게 시에서 느꼈던 감상들을 되살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잊고 있던 봄 향기와 그것이 주는 행복까지 일깨워주었다.

 

 

 

에디터 홍혜민.jpg

 


[홍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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